세입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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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 (3)
2022.04.19.
주민성의 엄포에 성아영은 그대로 물러났다.
“……진짜 능력 맞나 보네.”
“사람 간 봐도 맞는다.”
“너무해.”
왜인지 벌꿀이 깃든 팔크라스 고기는 성아영에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했다.
신기한 결과였다.
‘고기 서비스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군.’
적어도 고기 서비스는 지구의 소재들을 활용할 것.
이것이 교훈이었다.
“능력. 내 허락 받고 써.”
“……씨.”
갑의 말이었다.
이것으로 성아영의 돌발행동은 봉인된 것이나 마찬가지.
이젠 정말로 고기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쯧. 너도 먹어. 즈쉬.”
“취익! 알았다!”
“그 문신 돼지 씨도 같이 먹고.”
“취익……. 나는 즈민성이다…….”
“후.”
하필 오크 이름이 즈민성이다.
‘여기서 가르취랑 차크취까지 있었으면 더 끔찍해지겠군.’
일단 다행인 이야기는 다행인 거로.
앞으로 나눠야 할 희망찬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즈쉬. 황무지 마을에 있는 고대의 물품들, 여기로 옮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줄 수 있다. 여태 대장이 있는 곳을 찾지 못했을 뿐.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취익.”
“오오…….”
살이 찌긴 했어도 즈쉬는 아주 유용하게 성장했다.
물론 카르파크라는 오크답지 않게 충직하고 과묵한 오크도 있었지만, 왜인지 계산이 빠른 즈쉬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취익.”
즈쉬가 손을 뻗자 허공에서 비단옷을 두른 오크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황무지 대족장이시여.”
“…….”
즈쉬는 어느새 대족장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문신 돼지와 즈쉬의 표정엔 위엄이 깃들어있었다.
“그래. 미취. 이분이 전설의 주민성 님이다.”
“취익?”
미취라는 오크와 눈이 마주쳤다.
“취, 취익! 전설이 내 눈앞에!”
콰드득!
미취는 그대로 맨땅에 머리를 박아넣으며 외쳤다.
“황무지의 전설을 뵙습니다! 취익! 일족의 영광! 황무지의 신화! 취익!”
맨땅을 파괴하며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 요즘 오크들의 존경 표현인 모양이다.
“뭐야. 쟤는 왜 갑자기 그랜절 해? 뭐 잘못 먹었나.”
성아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고기를 계속해서 집어먹고 있었다.
주민성은 그런 성아영을 무시하며 미취에게 답했다.
“어, 일단 일어나고. 즈쉬랑 얘기하렴.”
“취익! 말씀을 받듭니다!”
자세를 바로잡은 미취는 머리에 박힌 아스팔트도 빼지 않고 즈쉬의 말을 경청했다.
“황무지 창고를 개방할 것이다. 전부 챙겨오도록.”
“취익! 명령을 받듭니다!”
곧이어 수많은 짐수레와 몬스터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물론 오크를 제외하면 전부 노예로 추정되는 몬스터들이었다.
“저, 저게 다 뭐야? 웨이브 아니지?”
“……어. 아니야.”
주민성으로선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궁핍한 오크 부락 하나 먹여살렸을 뿐인데 이런 결과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주민성에겐 전혀 없는 능력조차 즈쉬는 전부 해내고 있었다.
“즈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즈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부 대장님 덕분입니다. 크라노돈 고기, 그리고 대장님의 축복이 담긴 움집을 통해 저희는 예전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취익.”
그리고 장황하게 이어지는 설명들.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크라노돈 고기를 먹고, 어마어마하게 번식한 오크들.
죽지만 않으면 뭐든 치료해 주는 건물 부가효과.
이런 요소들이 합쳐져 차원 최강의 종족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취익.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킬 때였습니다. 그때, 저와 스취에게 지금의 권능이 부여되었습니다.”
심지어 주민성의 또 다른 직속 수하인 스취에게도 이런 비슷한 능력이 생겼단다.
“그리고 저와 스취의 직계 혈족들에게도 권능이 부여됐지요. 취익.”
“맙소사.”
가장 강한 종족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는 세상.
밸런스란 단어는 진작 말아먹은 구조였다.
어찌 보면 지구와도 비슷했다.
인간이 대륙 전체를 집어 삼킨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사고는 자연스레 협회장에게 닿았다.
‘인간 최강이라는 그 사람한테도 즈쉬 같은 권능이 있는 건가?’
이미 협회장의 힘은 당해낼 자가 아무도 없었다.
협회장vs그 외 능력자 전원이라는 구도를 그려도 협회장 쪽으로 무게추가 쏠릴 지경이었으니까.
여기에 즈쉬가 얻어낸 권능까지 떠올린다면 승산은 더욱 협회장 쪽에 있었다.
‘그 인간도 차원 경매장쯤은 간단히 쓸 수 있다고 봐야겠군.’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대격변 이후.
그때까지 어떻게든 승산을 높이는 것이 주민성의 할 일이었다.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어. 세입자들은 전부 차원 전체에서 최강자급은 된다는 소리군.’
지금 즈쉬에게 구박받고 있는 저 문신돼지 즈민성도 하위차원으로 돌아가면 절대자 중에 한 명쯤 될 터였다.
당장 첫 만남에서 느꼈던 압박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1번 세입자도 어마어마하게 강하겠군.’
1번 세입자의 목적은 부상 치료.
주민성과 마찬가지로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사람이리라.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 보자.’
이번 경우엔 정말 운이 좋았다.
첫 손님부터 인연이 있는 상대였다.
물론 오크 우대라는 조건을 달아 필연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하위차원의 오크 말고도 강력한 오크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이번엔 진짜 생판 남이야.’
주민성은 지금도 쉴 새 없이 짐을 나르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아, 즈쉬. 땅굴 벌집은 따로 챙겨주라.”
“물론입니다! 취익!”
나름 절대자가 된 즈쉬의 집은 양봉소.
주민성이 떠난 뒤에도 벌집을 수없이 연구했는지 지금의 벌집은 어마어마하게 변해 있었다.
일단 빛깔부터가 다르다.
“벌집은 이제 일족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취익.”
“그냥 식량 아냐?”
“취익! 절대 아닙니다! 무기로도! 방어구로도! 양념으로도! 전부 쓸 수 있습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짐을 챙겨오는 오크들의 무기 빛깔도 요상했다.
단순히 금칠이라도 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사실은 벌집을 가공해 만든 날붙이였던 것이다.
“대박이네. 벌집이 이렇게 좋아졌을 줄이야.”
확실히 벌집이 수납되었던 당시 로얄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로 붙어 있었다.
여태 연구는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모양.
‘그래도 나는 다르지. 먹어야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주민성도 이젠 즈쉬처럼 오크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여왕벌의 권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이젠, 전쟁도 할 수 있다.’
벌집을 찾기 이전에도 주민성의 전력은 군단급이었다.
이제 한 차원의 최강자가 된 오크 군단까지 불러낼 수 있었으니 대놓고 자치권을 신나게 주장해도 될 정도였다.
협회장만 아니었더라면.
‘그래도 협회장은 껄끄럽다. 젠장할.’
협회장 정혁수는 억제기 그 자체였다.
성아영이 가구를 재배치할 때도, 고상수와 고기를 구워 먹을 때도 틈틈이 봤던 인터넷 뉴스.
뉴스에서 본 협회장은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사방에서 출몰하는 변종 보스 몬스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해냈기 때문이다.
‘더더욱 전력이 필요해. 국가급으론 부족해.’
협회장이 정신없이 바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차원 경매장에 신경 쓸 시간도 없을 테니 발각될 위험도 지극히 적다.
‘물론 키워야 하는 건 힘만이 아니지.’
여론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협회장은 지금도 순탄하게 인류의 영웅이라는 길을 밟아가고 있었으니까.
‘고기집을 시작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해.’
이젠 전부 가능하다.
고대의 물품이라는 유일무이한 자원이 생겼다.
“취익! 이쪽은 빈자리가 없다!”
“저쪽에 놔! 취!”
주민성은 차곡차곡 쌓여가는 고대의 물품들을 보며 감탄했다.
“즈쉬. 저것들 활용법 알지?”
“물론입니다! 취익! 손재주가 뛰어난 노예들을 통해 수많은 장비들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헐?”
“보여 드릴까요? 취?”
“……응.”
곧이어 또 다른 문이 형성됐다.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땅딸막한 사람이었다.
“사, 사람?”
“취익? 이놈들은 드워프입니다. 손재주가 뛰어나지요.”
“어어?”
현대 인류와는 다른 유사 인류 정도로 보였다.
뒤이어 고블린도 튀어나왔다.
“키엑!”
“고블린도 손재주가 뛰어난 편입니다.”
“……고블린이?”
“취익. 물론 드워프처럼 정밀한 작업에선 다소 부족하지만, 생산 속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양산형 무구를 만들 때 쓸 만하지요.”
생각해 보니 게이트 내에도 건물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고블린이 있었다.
꽃블린이라든지.
“음. 우리 쪽 애들이랑은 피부색이 조금 다르긴 하네.”
크룩스를 비롯한 고블린들과는 달리 눈앞의 고블린들은 좀 더 팔이 길고 음흉해 보이는 눈빛이 특징적이었다.
“취익. 대장에게 드리겠습니다.”
“좋군.”
성아영은 진작에 주민성 뒤로 숨어 들어갔다.
물론 주민성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었다.
몬스터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거부감이 느껴진 모양이다.
“여기 뭐야……. 무슨 사람이 몬스터랑 말을 해……. 나 여기서 나갈래.”
“들어올 땐 자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윽.”
성아영은 당분간 이곳에 머물게 시킬 예정이었다.
주민성이 온종일 세입자들만 돌볼 수는 없었으니까.
“즈쉬. 그러면 건축도 가능해?”
“취익! 물론입니다!”
“그럼 머물 집은 알아서 근처에 장만해. 대신 저 빌딩 주변으론 접근하지 말고.”
“취익!”
즈쉬는 그대로 노예들을 지휘해 건축을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뭐지.”
노예들이 짓고 있는 것은 집이 아니었다.
평범한 오크들의 움집도 아니었다.
오히려 텐트와 비슷했다.
“취익! 걱정 마십시오! 대장! 저곳은 투사급 이상의 전사들만이 머물 수 있는 신성한 집이니.”
“…….”
뒤이어 평범한 건축 현장도 형성됐다.
텐트보다 좀 더 화려하고 오크다운 투지가 느껴지는 나름 멋진 집이었다.
‘괜찮은데? 컨셉 호텔로 써볼까?’
주민성이 흥미 있게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즈쉬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곳에 노예들이 머물 겁니다!”
“…….”
하위차원에선 텐트와 비슷해질수록 좋은 집인 모양이다.
현대적 감각으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와……. 몬스터가 계속 나와…….”
성아영이 질겁하며 감탄했다.
주민성이 떠난 이후, 오크들은 어마어마하게 증식했다.
전부 크라노돈 고기의 힘이었으리라.
“저쪽은 더 신경 안 써도 되겠군.”
인천 게이트는 넓다.
오크를 위한 부지쯤은 얼마든 줘도 될 일.
‘랜드마크로 써먹으면 되겠군.’
주민성은 수첩을 꺼내 인천 게이트의 구획을 정리했다.
‘이용자 구역, 오크 구역, 세입자 구역인가. 추가로 손님 구역을 마련해야 할 텐데. 일단 경비실하고 가까워야겠군.’
성아영은 주민성이 끄적이는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 그리는 거야? 울퉁불퉁하네. 지렁이도 있고.”
즈쉬를 비롯한 오크들은 운반과 건설에 한창이었고, 주민성은 성아영과 티격대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1번 입주 신청자가 차원 이동을 시작합니다.]
[도착까지 남은 시간: 1분.]
“드디어 왔군.”
“뭐가? 제정신이?”
주민성은 성아영의 입을 테이프로 봉인하며 답했다.
“다음 세입자. 1분 후에 도착한다.”
바비큐장엔 주민성과 성아영, 그리고 시무룩해진 즈민성이 남아 있었다.
‘저 오크도 일단은 세입자였지. 이용료도 제대로 냈고.’
주민성은 즈민성에게 말했다.
“들어갑시다. 손님.”
“취, 취익…….”
시무룩해도 위엄이 느껴지는 문신 돼지 오크.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다.
즈민성은 주민성을 너무나도 어려워하고 있었다.
“고기는 나중에 한 번 더 구워 줄게.”
“취익? 저, 정말입니까?”
“응. 즈쉬 몰래.”
“취취취취!”
즈민성의 텐션이 급격히 상승했다.
주민성은 그런 즈민성을 데리고 빌딩으로 향했다.
‘좋아. 보험도 완벽해.’
즈민성은 보험이었다.
1번 세입자가 어떤 사람일지는 몰라도, 같은 초강자급 즈민성이 있다면 함부로 날뛰진 못할 테니까.
구우우웅.
빌딩 안에선 즈민성이 방문했을 때처럼 진동음이 느껴졌다.
“……!”
곧이어 폭풍 같은 압박감이 몰아쳤다.
즈민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읍! 읍읍!”
성아영이 다급하게 주민성의 어깨를 쥐었다.
마찬가지로 존재감을 알아차린 모양.
즈민성 역시 모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또각.
뭔가 낯선 구두소리와 함께 1번 세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좌가 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