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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입장 (1)
2022.02.27.


임진석과의 독대.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뿐이었다.

“기분이 어때?”

“…….”

평범하게 능력을 각성하러 왔을 뿐이었다.

죄는 당연히 짓지도 않았고.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능력을 각성했던 게 원인이었다.

어째서인지 협회는 그걸 알아차렸을 뿐이고.

“어이야 없겠지. 나도 믿어지지 않는데.”

결과적으로 주민성은 상황을 반전시켜냈다.

터무니없이 약하다 평가받은 상태에서도.

“어쩌겠어. 현실은 현실이야. 받아들여라. 임진석.”

“……하.”

주민성은 임진석에게 현실을 주입했다.

협회장과 나눴던 자세한 이야기들은 전부 생략한 채로.

철컥!

주민성은 그대로 임진석의 구속구를 해제했다.

물론 황태범이 착용하던 구속구를 대신 착용시키긴 했지만, 실로 과감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지?”

SS급 능력자와 FFF급 능력자의 독대.

그럼에도 주도권은 FFF급 쪽에 있었다.

“너, 나 이겨 본 적 없잖아.”

“…….”

“죽이려 했다면 진작 죽였겠지. 안 그래?”

묵직한 팩트가 임진석의 명치에 연달아 꽂혔다.

“언제든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너는 어려운 방법들을 써 왔어. 계약이며 최면이며.”

“…….”

이것이 그동안 진정으로 알고 싶었던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물어봐야만 했다.

“이유가 뭐야?”

“……그걸 말해 주리라 생각하나?”

임진석은 완고했다.

물론 처음부터 바로 대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너도 봤으면 알 거 아니냐. 협회장이 널 버렸다는 걸.”

임진석의 눈빛에 동요가 깃들었다.

육감마저 발달한 지금의 주민성은 지금의 사소한 변화조차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협회장이 너와 성아영을 나에게 맡겼다. 무슨 의미일까.”

“…….”

임진석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홀로 뭔가를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임진석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회장님께서.”

“응.”

“나에게 별다른 명령은 하지 않았나?”

괜히 협회장과 임진석을 이간질해 볼까도 했지만, 이것은 확실한 복수가 될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것과 똑같이 돌려주는 게 옳았다.

“몰라도 돼. 너에게 그런 걸 알 자격은 없어.”

“…….”

“너도 나한테 그랬잖아. 얼굴도, 이름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모든 권리를 박탈했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그리고 주민성에겐 무엇보다도 지금의 주장을 관철할 히든카드가 있었다.

“이건 너도 잘 알지?”

주민성이 꺼낸 것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였다.

팔랑.

임진석의 눈빛에 경악이 물들었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민성이 꺼낸 건 계약서였으니까.

“협회장이 보내 주더라.”

“…….”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받았던 서류 중엔 계약서도 있었다.

보이자마자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기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눈썰미 좋은 일부에 불과하리라.

“이제 어떻게 할래?”

처음엔 막연한 복수심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힘이 생겼기에 생긴 여유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주민성은 알고 있었다.

임진석의 압박은 주민성의 성장 원동력이었다는 걸.

예를 들어 어느 히어로의 변신 시간을 기다려 줬다는 의미와 비슷했다.

“똑같이 날 인식 못 하는 조항이라도 넣을까?”

주민성은 임진석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기에.

“FFF급을 체험해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조항만 삽입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주민성은 임진석의 심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사냥에 실패한 사냥개가 될지. 아니면 나랑 같이 새로운 사업 한번 크게 해 볼지.”

주민성은 임진석의 전향을 기대했다.

최면은 위험하니 봉인한다 치더라도, 그의 기이한 절단 능력은 활용처가 무궁무진했으니까.

특히, 뭐든 잘라 버리는 절단 능력은 이번 건설 계획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이건 기회야. 너의 협조는 이미 기정사실이고, 단지 최소한의 자유를 선택하라는 말이기도 하고.”

의외였지만, 이런 권유조차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에 부합했다.

임진석은 주민성을 제압할 결정적인 기회마다 뒤로 내빼는 선택을 해 왔으니까.

전부 주민성의 허세에 낚인 덕분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임진석은 침통한 표정으로 주민성의 권유에 응했다.

“……협조하겠다.”

“잘 생각했어.”

주민성은 임진석의 대답과 동시에 계약서에 글을 휘갈겼다.

“뭐, 뭐 하는 짓이냐.”

“협조한다며?”

“계약서를 빌미로 협박하던 것 아니었나?”

그런 와중에도 계약서엔 수많은 조항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응. 맞아. 대답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예정이었지.”

“치밀한 놈.”

생각보다 임진석의 반항은 거세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한 표정이었다.

사각. 사각.

그렇게 계약서가 완성되고.

주민성은 임진석에게 펜을 내밀었다.

“서명해.”

“…….”

주민성은 입가를 씰룩거리며 임진석의 반응을 지켜봤다.

“……조항은 확인시켜 주지?”

주민성은 팔로 계약서를 가린 상태였다.

임진석이 볼 수 있는 부분은 오로지 서명란뿐.

“서프라이즈. 어떻습니까?”

“…….”

각성 당일, 정확히 임진석이 했던 말과 일치했다.

자다가도 괜히 생각날 때마다 텐트를 걷어차게 했던 그 말이었다.

“서명하고. 내용은 나중에 확인해. 원본은 줄 테니까.”

업보 그 자체.

임진석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저 주민성이 내보인 의외의 호의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좋습니다. 사인하죠. 라고 말하면 되는 건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슥슥.

“……탁월한 선택입니다.”

당시의 기억들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주민성은 서명이 끝난 계약서를 나눠 임진석에게 원본을 전달했다.

이젠 계약서가 진품인지 검증할 때.

“이제 네가 받았던 명령에 대해 들어볼까?”

“많은 임무가 있었지. 전부 필요한가?”

“……당연하지. 일단, 누구의 지시였지?”

“…….”

임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협회장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을 테니까.

절그럭.

이젠 구속 장비도 필요 없었다.

계약서는 진품이었다.

-‘을’ 임진석은 계약에 동의한 이후 ‘갑’ 주민성에게 반드시 협조한다.

-‘을’ 임진석은 계약에 동의한 시점부터 ‘갑’ 주민성과 거래한 협회장 정혁수를 떠올릴 수 없다.

핵심 조항들이 전부 지켜지고 있었으니까.

특히, 주민성과 협회장을 거래로 엮어낸 조항은 필살기 그 자체.

갑과 연관된 대상만이 계약에 적용되는 점을 노렸던 게 주효했다.

“……성가신 조항을 넣었군.”

임진석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주민성을 노려봤지만, 이내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떠오르지 않는 사람에 관해선 설명할 수 없다.”

“계속해.”

“첫 임무는 너도 알다시피 계약이었다.”

“대상이 나란걸 인지하고 받은 임무?”

중요한 문제였다.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주민성을 감시해 왔다면 심각한 문제였으니까.

“그렇다. 협회의 기밀정보 중엔 감시대상 일반인들이 몇 존재한다. 너는 그중 하나였고.”

“……감시대상?”

“각성 등급 판정은 무작위가 아니라는 건, 너도 눈치챘을 거다.”

실제로 주민성은 많은 능력자의 기대를 받아왔었다.

고등급의 자질이 있다며.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감시했다고?”

“협회가 그 정도로 인력이 넘쳤다면 내가 나설 일도 없었겠지. 각성 등급은 자질뿐만 아니라 성향과 유전의 영향도 있어.”

“…….”

여태 몰랐던 정보.

유전적인 부분은 특히 의외였다.

의문도 함께했다.

주민성은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성장했으니까.

“유전이라면 양부모도 등급에 영향을 끼친다는 소리잖아. 나와 관련이 있긴 한 거야?”

“거기까진 나도 모른다. 하지만 주민성, 너는 감시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어.”

“…….”

임진석은 알아서 말을 이어 갔다.

“넌 보통의 감시대상도 아니었고,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네가 각성하기 위해 협회에 방문한 날. 임무가 내려졌다. 널 사회적으로 매장하라는 임무가.”

“……대체 왜?”

주민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포섭도 아니고 매장이라니.

이는 상식에서 지극히 벗어난 임무였다.

“너의 능력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른 이들의 개입 없이.”

주민성은 각성 전부터 수많은 길드, 능력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를 전부 끊었다고? 단순히 스카우트해도 되는 일이잖아.”

협회장의 명령에선 일종의 광기가 느껴졌다.

평범하게 좋은 조건을 제시해 왔다면, 각성 이전의 주민성은 협회의 제안에 응했을 테니까.

“아니. 그래선 안 돼. 임무의 최종 목표는 스카우트가 아니었으니까.”

“……뭐?”

“말 그대로다. 너의 자질이 평범했다면 그대로 폐기할 예정이었다. 그전까지의 임무는 감시였고.”

폐기는 즉, 주민성의 죽음.

실제로 주민성의 능력이 FFF급 그 자체였다면, 임진석은 그대로 걸음을 돌렸을 거라는 말이기도 했다.

“……자질이 평범하지 않았다면. 얘기가 달라지나?”

“그래. 그때는 내가 직접 너를 생포할 예정이었다. 나 역시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에 믿기 힘들었었지. 네가 FFF급이라는 건 진짜니까.”

“……하. 어이가 없군. 스카우트는 처음부터 없었어…….”

임진석은 까칠한 벽에 등을 기대고 주민성을 향해 섬뜩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스카우트? 그게 더 끔찍했을 거다. 그땐 산채로 실험재료가 될 예정이니까.”

“……실험.”

“네가 데리고 다니는 보스 고블린. 놈 역시 실험체였다.”

“…….”

확실히 크룩스는 다른 몬스터와 달랐다.

주민성처럼 메시지를 사용할 수 있었고, 화폐를 사용하는 특이종이었으니까.

심지어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조차 능력자와 흡사했다.

“크룩스가 실험체였다니…….”

예전의 크룩스가 주민성에게 떠올린 메시지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고블린 리더 크룩스가 거래를 요청합니다.]

[이용료 150만 원 대신 자신의 생존을 요구합니다.]

크룩스는 협회, 혹은 임진석에게서 벗어나 주민성에게 생존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후우…….”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협회장에 대해서 더 알아내야 해.’

계약서에 넣은 조항이 괜스레 아쉬워지긴 했지만, 넣을 수밖에 없는 조항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석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협회장을 향한 충성심을 지워낼 필요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주민성 전력으론 협회장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

실험체의 존재에 대해서 알았으니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고도 할 수 있었다.

“협회는 대체 무슨 실험을 하는 거야……. 전부 말해.”

“아는 만큼만 설명하지. 협회는 몬스터에게 능력을 이식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여기서 내 역할은 실험체에 최면 암시를 넣어 세뇌하는 거고.”

“……미쳤군.”

협회에 충성하는 몬스터.

그것도 능력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비밀리에 양성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실험은 아직 초기 단계이고 크룩스처럼 완성형 실험체가 20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대체 왜?”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 지상 최강의 능력자라는 칭호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협회장이 고작 몬스터에게 의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진 나도 모른다.”

“골 때리는군.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너의 능력은 실험체를 양성하는 데 최적화된 능력이니까.”

“…….”

폐허 도시의 몬스터들을 실험체와 동일 선상에서 놓고 보자면 임진석의 말이 맞았다.

주민성을 따르는 몬스터는 지금도 수천은 남아 있는 데다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늘어날 예정이니까.

심지어 크룩스와 판자촌 능력자들 역시 고블린과 데빌도그를 다룰 줄 알기에 주민성이 직접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여기다 호위 서비스까지 섞어 주면 능력까지 입맛대로 부여해줄 수 있었다.

“후우. 몇 시간의 대화로도 부족하겠군. 너는 당분간 나랑 함께 다니자.”

“좋을 대로 해라. 그보다, 너와 함께 다니는 데빌도그가 있을 텐데? 어디 있지?”

“콩이?”

“……콩이. 콩이인가.”

문득 싸한 생각이 스쳤다.

“설마 콩이도 실험체냐?”

“전혀.”

“근데 왜 물어봐.”

임진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개, 개인적으로 키우고 싶은 데빌도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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