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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세력 (3) (87/250)


거대 세력 (3)
2022.02.26.


통화가 종료되고 30분쯤 지났을까.

자신을 비서실장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주민성을 찾아왔다.

“계약서 사본, 그리고 피해보상금입니다. 전부 현금이니 사용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드르륵.

곧이어 비서가 타고 온 차량에서 007가방 10개가 꺼내졌다.

“전부 얼마죠?”

“가방 하나당 5억. 총 50억입니다.”

“…….”

평생 만져 보지도 못했던,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함부로 받기조차 찝찝할 정도로.

그렇게 머뭇거리자, 비서가 말을 이어갔다.

“억류하고 계신 간부분들의 몸값도 포함된 금액입니다. 나머지는 주민성 님이 여태껏 받아 온 피해에 대한 보상이고요.”

“…….”

“받으시지요.”

주민성의 표정은 한없이 복잡했다.

고작 300만 원에 강제적으로 신상이 팔려나가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원흉은 계약서에 있었다.

“이것부터 받죠.”

“편하실대로.”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건네받은 주민성은 천천히 계약서를 찢었다.

가지고 있던 원본 계약서와 함께.

찌지직.

별다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수많은 제약에서 비로소 벗어났기에 기분만큼은 묘했다.

구석에 꿇려 둔 임진석의 얼굴도 드러났다.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넌 나중에 보자.”

“…….”

임진석의 신병 확보는 협회장도 동의한 사항이었기에 넘겨야 할 협회 간부는 총 여섯으로 정해졌다.

물론 학교에 구금되어 있던 황태범과 성아영은 판자촌 능력자들이 데려오고 있었기에 문제는 없다.

“음. 30분 정도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네.”

신성은 신우빈이 아닌 신명철 쪽에서 협회장과 별도의 협의가 있었는지 별다른 이견 없이 주민성에게 협조했다.

그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나긴 했지만, 대기업이라는 울타리에 소속된 이상 별다른 행동은 없을 터였다.

“각자 휘하 직원들 인솔해서 바로 움직여.”

“예!”

오히려 보스 몬스터에 관한 정보 때문이었을까.

신성의 움직임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상부 쪽에서 주민성의 의견을 제대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뜬구름잡는 소리로 여길 수 있었을 텐데. 별도의 정보라도 있는 걸까.’

잠시간의 대치가 끝나고, 판자촌 능력자들의 합류로 본격적인 포로 인계가 시작됐다.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주위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하, 정말 어이가 없군.”

의식이 회복된 황태범이 주민성을 향해 이죽거렸다.

물론 온몸이 구속된 상태였기에 반항은 하지 않았다.

협회장이 직접 나선 것 또한 한몫했는지 분노보다는 수치심이 앞서는 표정이었다.

FFF급이 SS급을 이겨 먹는 일은 전세계를 통틀어도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장면이었다.

“……기억해 두지. 주민성.”

“응. 잘 가.”

다른 간부들 역시 비슷했다.

협회장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르는 이들이니까.

그렇게 임진석을 제외한 모든 간부들이 넘어가고.

주변 모든 사람들이 비서의 입을 주목했다.

협회장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가장 위험한 타이밍이었다.

“구속을 해제하겠습니다.”

“…….”

레이디 퍼스트 같은 개념이었을까.

비서는 가장 먼저 성아영의 구속을 해제했다.

딱히 문제 될 일은 없었으니 주민성은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 가십시오.”

“……뭐? 어딜 가?”

비서는 대답없이 주민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제야 성아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 그런 뜻?”

하지만 비서의 대답은 달랐다.

“아뇨. 한국 능력자 협회 특임대장 성아영 씨는 현 시간부로 직위를 해제. 주민성님께 배속됩니다.”

“……야. 너 미쳤어?”

“협회장님 명령입니다.”

금방이라도 교전이 오갈 것 같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여기서 가장 황당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뇨. 받지 않습니다. 쓰지 않습니다.”

“야! 니가 뭔데!”

주민성의 대답은 완곡한 거절.

이런 위험천만한 여자를 곁에 두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일이었다.

이에 비서가 대답했다.

“성아영 씨의 인계는 피해 보상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제안을 받아 주시지 않으면 협상 결렬입니다. 회장님과 다시 의견을 조율하시겠습니까?”

“…….”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피해보상금 50억은 성아영을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이었던 것.

“돈은 받습니다. 하지만 저 여자는 필요 없어요.”

“간부 한 명을 남겨 달라고 하신 건 민성님입니다.”

“네. 그건 맞죠. 제가 남겨 달라고 한 사람은.”

계약이 파기된 지금은 임진석의 이름이 뚜렷이 인식되고 있었다.

“……임진석입니다. 성아영이 아니고요.”

“물론 회장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임진석님은 협회 내에서도 특히 중요하신 분. 이번 성아영씨의 파견은 임진석님의 생존을 위한 감시역이라고 보시는 게 맞습니다.”

“…….”

즉, 협회장의 생각은 이랬다.

성아영을 볼모로 보낼 테니 헛짓하지 마라.

“회장님께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임진석 님을 반환할 경우 50억을 추가로 지급, 성아영 씨의 파견도 없는 일로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추가 혜택으로…….”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게이트의 자치권이 보장된 이상, 50억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이트를 발전시켜나가려면 필연적으로 돈이 들어가니까.

돈은 주민성의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본이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을 세웠군.’

주민성으로선 더 억지를 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신성의 협력은 받을 수 있겠지만, 신명철의 입김이 닿는 인원들은 통제 대상이 아니니까.

결국, 직접 두 발로 일어서야 하는 것이 주민성의 몫이었다.

“……그게 회장님 명령이야?”

“예.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협조하라고 하셨습니다.”

황당하기는 성아영도 마찬가지였다.

납득은 빠른 모양이지만.

“좋아. 그렇게 할게.”

성아영의 먹잇감을 노리는 시선이 주민성에게 닿았다.

“잘 부탁해?”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앞으로 더 볼 사이니까 말해 둘게. 무슨 협상을 했건, 회장님 명령은 거절 안 하는 게 좋아. 돈까지 받는다며. 이 정도면 회장님 있는 방향으로 절까지 해도 무방할 정도니까.”

성아영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실제로 회장 쪽에서 엄청나게 양보를 했던 모양이다.

“특히 돈에 대해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분이셔.”

“지금 양보하신 것 같은데.”

“어휴. 너는 누나한테 교육 좀 받아야겠다.”

괜스레 말대꾸하긴 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조건임은 틀림없었다.

괜히 협회장을 자극해봐야 손해만 볼 테니까.

주민성은 그대로 비서에게 말했다.

“……받겠습니다. 이러면 문제없죠?”

“물론입니다. 회장님의 호의를 얻으신 걸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

회장의 뒷공작은 이미 병 주고 약 주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

주민성은 조금도 공감하지 않았다.

이후의 대화는 순탄했다.

자잘하게 억류된 협회 사람들까지 돌려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협회 사람들이 물러난 이후엔 신성측 파견 직원들이 뒤를 따랐다.

다음은 용병들의 차례.

그렇게 모든 절차가 마무리됐다.

“후우. 지긋지긋하다.”

이젠 묵은 체증이 내려갈 만도 했지만, 아직은 목에 가시가 박힌 느낌이었다.

성아영 때문이었다.

“이제부턴 민성이라고 부를게? 괜찮지?”

“알아서 하세요.”

“근데 귀환은 언제 해? 게이트 너무 오래 있지 않았니?”

“안 가요.”

“뭐?”

실제로는 못 간다가 맞았다.

지금의 주민성은 보스급 몬스터 그 자체.

만약 게이트 경계 밖으로 이동한다면, 주변이 게이트화 되는 해괴한 현상을 실시간으로 인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살 거예요. 불만이면 혼자 나가든지.”

“뭐야. 반항이야? 풉.”

“풉도 금지. 싫으면 나가든지.”

“1절만 더해라?”

“나가든지.”

“아오.”

다행히 성아영의 말발은 센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용료까지 청구한 이상 직접적인 공격도 불가능할 터였다.

‘일단은 성아영도 고등급 능력자니까.’

모든 것은 주민성이 활용하기 나름이었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민성 씨. 괜찮겠어요?”

최선아는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임진석과 성아영이 같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리라.

“아. 임진석은 지하에 가둬 두죠.”

당장은 능력이 봉인되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임진석이었지만, 놈을 봉인하고 있는 구속구는 물주에게 반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민성에겐 그 전까지 이용료 청구든 뭐든 임진석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게이트의 자치권을 확보해서일까.

판자촌 능력자들은 더욱 진지하게 주민성을 대했다.

심지어 김대위는 자진해서 임진석을 옮겨두겠다고 할 정도.

“예. 그러면 아저씨들이랑 선호도 불러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이수길을 비롯한 사람들과 재회하며 간단하게 회포를 푼 주민성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이젠 여기서 뭐든 해도 됩니다. 비록 협회의 감시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제어권은 없거든요. 막말로, 게이트에 편의점을 차리고 장사를 해도 됩니다. 세금도 안 빠져나가고요.”

“세, 세금까지?”

“네.”

실제로 주민성은 계약서와 더불어 몇몇 문서를 넘겨받은 상태였다.

이전처럼 이상한 능력이 개입되진 않았을까 텐트에도 넣어 보고 온갖 테스트를 마쳤기에 문서는 확실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은, 서류에 협회장의 도장이 찍힌 것으로 공신력이 확보된다는 것.

“뭐 협회장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양보해줬겠죠. 방심은 절대 안 할 겁니다.”

건물주라는 능력이 가진 잠재력.

이는 분명 협회장이 깔아 놓은 판에도 큰 변수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점에서 주민성이 진행할 사업은 차고 넘쳤다.

“본격적인 게이트 정착에 앞서, 건물을 지을 겁니다.”

주민성의 선포에 최선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게이트 이상 현상에 휘말렸기에 며칠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텐데도 상당히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완공된 건물은 다양하게 활용될 예정이고요.”

“건물주 능력자가 하는 말이니 확실히 기대되는구나.”

“감사합니다. 기대해 주셔도 좋아요.”

큰 그림을 그렸으니 다음은 디테일의 차례.

주민성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임무를 전달했다.

인력소 식구들과 최선호에겐 지을 건물에 대한 견적 준비, 판자촌 능력자들은 게이트 치안을 담당하기로 됐다.

그리고 다른 고블린 라이더들 역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안전을 책임지게 됐다.

“읍읍!”

성아영의 입은 진작 막아 둔 상태.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주민성을 향해 황당한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냥 감시역이라니까 없는 사람 치세요. 그냥 CCTV가 있다고 보시면 될 거에요.”

“아쉬워요! 지하에 콱 가둬 버려야 하는데!”

주민성의 과격함에 유독 최선아가 열광했다.

성아영이 꽤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리고 선아 씨는 보급 담당입니다.”

“맡겨 주세요!”

최선아의 가속 능력과 고블린 라이더를 이끄는 통솔력은 보급에 적합했다.

더불어 운전기사를 비롯한 신우빈 측 사람들은 최선아를 지원하는 포지션이었다.

“재밌는 계획을 세웠군. 주민성.”

신우빈에겐 아무런 역할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뭐든 알아서 잘해 낸다는 걸 증명해 냈을 뿐더러, 신성의 후계자라는 어마어마한 포지션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경비 생활은 끝낼 수 있겠어. 여긴 너에게 맡기겠다.”

“음?”

신우빈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유럽 연합을 맡겼어. 그래서 간다.”

“…….”

신명철의 소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이야 한국 어딘가에 있겠지만, 내일이면 그조차 알 수 없어질 가능성이 컸다.

“윈윈이네. 사람들 전부 데려갈 거야?”

“아니. 비서만.”

“괜찮겠어?”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날 따르는 직원들은 네 생각보다 훨씬 많아.”

“……그렇기야 하겠지.”

대화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협회에 맞서기 위해 뭉친 사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일단은 알아서 각자 살아남아야 다음을 꾀할 수 있을 테니까.

“읍읍!”

성아영이 중간중간 방해해 왔지만, 계획 설명은 순조롭게 끝났다.

당장의 방침은 이랬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는 것으로.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물론 주민성에겐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그중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물주에게 구속구를 넘겨야 하는 것.

“임진석한테 가 봐야겠군. 임진석. 개자식.”

이젠 확실히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을 되뇌며 주민성은 임진석이 갇혀 있는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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