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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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 (4)
2022.02.19.
제르취의 손가락이 움직였다는 것은 사후 경직, 혹은 부활을 의미했다.
물론 사후 경직은 사망 후 2시간에서 3시간 사이쯤 일어나는 현상이었지만, 몬스터 시체가 순식간에 썩는 게이트 내부에선 그 속도가 훨씬 빠를 수 있어 가능성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새로 얻은 능력이 있었으니까.
‘게이트 지배력 조회.’
[현재 소유 중인 게이트의 점유율]
[1위. FFF급 건물주 주민성]
[2위. 죽음에서 돌아온 오크 로드 제르취(빈사)]
[3위. 칠흑 숲의 추적자 카르파크]
[4위. 고블린 첩보 대장 크룩스]
[5위. 폭식 마수 콩이(분노)]
‘역시.’
주민성의 예상대로 제르취는 예상대로 죽지 않았다.
만약 제르취가 죽었을 경우, 빈사 대신 사망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거나 2위의 자리를 카르파크가 대신 하고 있었을 터였다.
왜인지 분노해 있는 콩이는 가볍게 무시했다.
주민성은 곧장 다른 텐트를 꺼내 제르취의 얼굴에 덮었다.
“명복을 빈다.”
덮여 있던 텐트에선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기 위한 작은 발악이었다.
건물 부가효과가 적용되는 덕분에 목소리는 차츰 선명해졌고,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에 도달했다.
“……나 안 죽었다.”
“풋.”
주민성이 새로운 텐트를 덮어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전에 선물해 줬던 텐트가 협회 간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제르취는 힘겹게 텐트를 가슴으로 끌어내리며 말을 이어 갔다.
“끄윽……. 대체 이곳엔 강자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어찌 보면 제르취의 오크생도 파란만장하다 할 수 있었다.
나름의 포부를 가지고 게이트까지 진출했는데 하필이면 처음 만난 적이 주민성이었으니까.
게다가 하위 차원에선 크라노돈 때문에 수백 번 죽어나갔고, 다시 돌아온 게이트에서 만난 상대는 협회 간부 다수였다.
심지어 주민성이 잘 모르는 제르취의 과거조차 보통이 아니었다.
고대의 영혼들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들었을 때의 감상이었다.
파란만장했다.
이렇게밖에 평가할 수 없는 게 제르취의 삶이었다.
치직!
갈라졌던 제르취의 팔뚝이 빠르게 아물어 가기 시작했다.
콩이 때처럼 텐트 보정이 있다곤 하나 이번에 보이는 회복력은 절대 평범한 회복력이 아니었다.
‘역시 제르취도 달라졌군.’
차원 이동을 하면서 주민성에게 이식된 힘.
그 일부는 제르취에게 분배되어 있었다.
분명 제르취에게도 주민성만큼 큰 변화가 찾아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너 강해진 건 맞지?”
이젠 제르취에게도 몸을 일으킬 힘이 생긴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르취는 흙먼지를 걷어내며 답했다.
“확실히 강해졌다. 말이 안 될 정도로.”
“하지만 졌고. 죽을 뻔했고.”
“…….”
“삐지진 말고.”
주민성을 한차례 흘겨보던 제르취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복수하러 간다. 취익!”
“얼씨구.”
“취이익! 이번엔 다르다.”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흥분했는지 조절할 수 있는 콧소리까지 마구 뿜어내는 제르취였다.
복수의 대상은 볼 것도 없이 협회 간부.
“판단력은 그대로네. 그러니까 자꾸 죽지.”
“취익?”
펑! 펑!
쿠르르!
멀리서 들리는 폭음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머리를 써라. 머리를.”
“…….”
제르취를 한차례 질책한 주민성은 그대로 등을 돌려 황태범을 들어 올렸다.
황태범 성향상 놈은 제르취에게도 상당한 공격을 쏟아 부었을 터.
예상대로 제르취는 황태범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 그놈은! 쿠워!”
“머리만 쓰면 쉽잖아. 그리고 얘 이제 내 거다. 허락 받고 건드려.”
“취, 취익!”
상당히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주민성의 선언은 꽤 효력이 있던 모양.
제르취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너 막 서열 의식 생기고 그러지 않아? 나한테 존경심이 샘솟는다든지.”
“…….”
경멸의 표정이었다.
“……오크도 저런 표정이 나오는구나.”
방금 질문은 게이트 지배력 때문이었다.
적어도 하위 서열은 전부 주민성을 따르는 몬스터였으니까.
물론 여기서도 콩이의 까칠함은 의외였지만, 일단은 주민성을 따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에휴. 존경심 따위 생길 리 없지.”
“…….”
상황 정리를 마친 주민성은 곧장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움직일 수 있지?”
“그래.”
“가자. 일단 몸부터 숨겨야 해.”
이는 주민성 나름의 배려였다.
협회 간부를 추적하는 이들은 아까 만났던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폭음은 미묘한 크기로 반복 중이었다.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는 최소 둘. 아니면 셋.’
협회 간부들의 인원수를 고려해도 맞는 판단이었다.
“다음엔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지금 이곳엔 네가 말하는 강자들이 지금 엄청 많거든.”
인천 게이트도 그랬지만, 이곳의 몬스터들 역시 일부 중립 몬스터를 제외한다면 전부 주민성을 따른다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오크와 달리 개체 수가 많은 고블린은 활용도가 더욱 컸다.
‘노동력이 중요한 시점이야. 최대한 숨기자.’
그제야 제르취는 묵묵히 주민성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디든 괜찮지?”
“……맘대로 해라.”
주민성은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적어도 갈림길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일단은 둘 중 한 명과 합류해야 해.’
처음 만나야 할 대상은 이상 현상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움직일 수 있었던 송몽룡.
혹은 당장 수많은 능력자를 소집해서 움직이고 있는 신우빈이었다.
‘학교 아니면 폐허 도시인가.’
송몽룡은 학교에 숨어 있겠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신우빈이 있을 장소는 자연히 폐허 도시.
그중에서도 학원 건물인 아지트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판자촌 능력자들과 협회 관계를 생각해 보면 학교보단 폐허 도시에 있는 게 맞아. 그쪽 고블린들은 예전부터 내렸던 방침이 있었으니 알아서 잘 숨었을 테고.’
폐허 도시는 다른 지역보다 더욱 주민성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장소였다.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강하고 똑똑한 고블린들이 밀집해서 거주하는 장소였으니까.
물론 크룩스 직속 고블린이라는 예외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몽룡이 쪽이 낫겠군.’
신우빈은 알아서 행동한다고 말했었다.
그 결과, 실제로 신성측 능력자들과 용병이 파견 오기도 했고.
이런 경우엔 주민성의 개입이 오히려 변수로 작용해 신우빈의 오더가 꼬일 가능성이 컸다.
평범한 사람이 주민성을 알아볼 땐 아주 높은 확률로 성질을 건드릴 가능성도 컸고.
‘이젠 나도 가만히 당해 주지 않을 테니까.’
능력자의 뺨을 후려갈길 때 느껴지던 시원한 전율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잘 때리는 방법도 배워 두면 좋겠군.”
“무슨 헛소리냐. 한 판 붙고 싶나?”
“아…….”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마자 즉각적인 제르취의 핀잔이 돌아왔다.
“나중에. 지금은 안 돼.”
“흥.”
제르취와의 미묘한 동행은 갈림길을 지나 학교 근처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중간 중간 먼 곳에서 다른 능력자들이 급하게 달려가는 광경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중 일부는 주민성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더욱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듯했다.
폭음의 빈도도 상당히 줄어든 상황.
심지어 남은 교전 지역은 한 군데로 줄어들어 있었다.
‘어느 쪽이 이겼으려나. 그래도 용병 쪽이 이기겠지?’
주민성을 노리기 위해 모인 협회 간부들, 그리고 협회 간부들을 노리기 위해 모인 용병들은 준비 상태부터 차원이 달랐다.
준비해온 각종 장비부터 시작해 파견 온 능력자들의 자체 스펙도 상당했다.
흡사 레이드를 준비하는 파티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빈손으로 왔던 협회 간부로선 분명 까다로운 상대였으리라.
“크룩스.”
학교 근처에 왔으니 근처 어딘가엔 크룩스가 숨어 있을 터였다.
“크룩스?”
“뭐라는 거냐. 미친놈.”
“흐음. 대답이 없네.”
“…….”
예상 밖의 결과였다.
크룩스를 부르면 부하 고블린이라도 튀어나와야 정상이었기에 더더욱.
“학교로 가 보면 알겠지.”
주민성과 제르취, 그리고 여전히 기절해 있는 황태범은 학교에 도착했다.
“음…….”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냐.”
황당하게도 학교는 비어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상당수 남아 있었다.
특히 교육 과정이 진행되었던 교실에선 함께 고양될 정도로 치열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주민성은 자연스레 의자로 손을 뻗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다는 듯 미미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디로 갔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 문자도 확인했다.
-도와주세요. 일단 학교에 숨을게요.
이전에 남겼던 메시지로 보아 송몽룡은 학교에 숨어 있었어야 했다.
판자촌 능력자들의 전폭적인 도움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원래 대장의 자리는 송몽룡의 것이었으니까.
“하아.”
그런데도 송몽룡이 학교를 벗어나게 만든 이유.
호위 서비스까지 받는 강력한 집단이 동시에 움직인 이유.
그 이유를 고민하자 숨이 턱턱 막혀 들어갔다.
“후우.”
게이트 이상 현상은 주민성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흐름을 놓치면 튕겨 나올 것만 같은 압박감도 함께 느껴졌다.
실제로 지금의 난리는 주민성의 목을 죄어 오는 사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이곳에서의 사건은 협회 간부들의 암살 시도로부터 시작했으니까.
“다시 나가자.”
“……여전히 알 수 없는 놈이군.”
주민성은 체감하고 있었다.
마석 이식을 통해 제법 강해졌다곤 하나 지금의 흐름을 쉽게 뒤집을 수 없겠다는 사실을.
강자는 얼마든지 있었고, 확실하지 않은 새로운 집단은 그대로 새로운 변수였다.
조금만 실수해도 자신의 팔다리쯤은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는.
즉,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쿠르르르!
“음?”
그 순간, 주민성은 근처의 아파트 단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키에에에엑!
이어 수많은 고블린들의 괴성, 날카로운 파열음이 섞였다.
“젠장. 하필.”
고블린들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반드시 죽여야 할 적과 마주쳤다는 뜻.
“제르취! 뛰자!”
“취익!”
이번만큼은 주민성과 제르취의 생각이 일치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될 상황이었다.
고블린조차 확신 가득한 괴성을 내질렀으니까.
여태껏 여러 장소에서 교전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 또한 협회 간부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우직!
교실 바닥이 으스러졌다.
주민성이 순간적으로 내지른 발걸음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쿵!
그대로 2층 교실 창가에서 뛰어내린 주민성은 황태범을 창고에 던져 놓고 문을 잠근 후, 빠르게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단순히 건물 스펙이라면 학교만큼 튼튼한 건물은 없지. 괜찮을 거야.’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주민성은 말을 잃었다.
“…….”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성공이다! 진짜 공격이 통할 줄이야!”
“우와아!”
“키엑! 키엑!”
물론 아파트 단지엔 판자촌 능력자들이 있었다.
잠깐 마주쳤던 협회 간부 중 한 명도 있었다.
그럼에도 결과가 달랐다.
판자촌 능력자들은 고전은커녕 말도 안 될 정도로 손쉽게 협회 간부 생포에 성공했다.
“……대체 어떻게?”
너무나 순식간에 종결된 사건에 주민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대장님이다!”
앳돼 보이는 소년이 주민성을 발견했다.
소년은 사진으로 봤던 그대로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모, 몽룡이구나.”
“대장님!”
송몽룡을 시작으로 판자촌 능력자들 전원이 주민성을 발견했다.
“크흠.”
엄청나게 반가워하며 감격에 젖은 송몽룡과 달리, 판자촌 능력자들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하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 현상에 휩쓸리지 않은 사람은 송몽룡이 유일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주민성은 자주 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주민성의 시선은 아파트에 매몰되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향했다.
그녀 또한 이전에 봤던 협회 간부들 중 한 명이었다.
목숨을 잃었음에도 접근하면 베일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이게 다 대장님 덕분이에요!”
“나?”
송몽룡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의문에 답했다.
“적대하려는 의도만 없으면 되거든요. 제가 이 여자를 부축해서 아파트에 옮겨 놨고, 다른 분들이 아파트를 무너뜨렸어요. 그리고 아파트를 향해서 전원 공격했죠.”
“그, 그래?”
주민성은 송몽룡의 설명을 들으며 당시의 상황을 상상했다.
‘계약을 교묘히 회피하는 방법이 존재했구나!’
상대를 동정할 생각은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이려 덤벼들었을 테니까.
“네! 확인 사살은 못 해도 의도만 없으면 뭐든 가능하니까요!”
“그렇구나.”
상황에 납득한 주민성은 송몽룡의 자랑을 들으며 함께 아파트로 향했다.
협회와 관련된 증거는 많을수록 좋았다.
“어?”
“대, 대장!”
순간, 주민성의 목에 아찔한 감각이 스쳤다.
“흐읍!”
아슬아슬하게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주민성의 목에는 가느다란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의도만 없으면 된다? 고마워. 잘 들었어.”
주민성의 뒤엔 죽어 있던 협회 간부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