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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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 (3)
2022.02.18.
트릭 없는 마술이 펼쳐지고, 콩이는 거칠게 짖어 댔다.
이미 건물에서 벗어나 콩이에게선 만물 소통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들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식충이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마석 파밍은 능력자의 생계 수단이니까.
“컹! 컹!”
“미안. 마석 없다.”
주민성은 콩이에게 순순히 사과했다.
“컹!”
하지만 콩이는 그대로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고,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
크룩스와 남은 고블린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고.
“참나. 바쁘구만.”
털썩.
근처 바닥에 주저앉은 주민성은 이전의 싸움을 복기했다.
왜인지 정확히 최하급 마석 30개만큼 강해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 이러면 좋은지 나쁜지도 애매한데.”
차원 이동을 통한 마석 이식은 분명 힘을 선사했다.
SS급 능력자와 육탄전을 벌이고도 이길 정도의 힘을.
주민성은 기절해 있는 황태범을 바라봤다.
“원래라면 이길 수 없는 상대였어.”
당시 이성은 잃었지만, 기억만큼은 남아있었다.
때문에 황태범과의 싸움은 정상적인 싸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공격이 전부 보였으니까.”
황태범은 주민성에게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었다.
처음엔 턱을 노린 매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한번 피하고 나니 황태범의 손과 발은 주민성의 명치, 목 등의 급소를 집요하게 노려 왔었다.
“날 진심으로 죽이려고 했었지.”
그럼에도 주민성은 모든 공격을 피해 내면서 황태범을 때렸다.
회피할 때의 감각은 고등학생 시절 즐겨 하던 족구공이 날아오는 느낌과 비슷했다.
즉, 집중하면 대응할 수 있는 수준.
“……다시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새로운 문제가 생겼지만, 새로운 선택지도 생긴 상황.
주민성에겐 나쁠 게 없었다.
“에휴. 돈벌이야 마석만 있는 건 아니니깐.”
이 게이트엔 주민성의 모든 기반이 있었다.
인력소 식구들과 최선호를 데려와 건물을 올리려는 계획도 있었고, 노동력이라면 남은 고블린들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좋게 생각하자. 도시에 돌아갈 방법도 생각해야 하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중 가장 큰 문제는 게이트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주민성의 발이 닿는 장소가 곧 게이트가 되는 현상이 문제였다.
“밸런스 게임이냐고. 참나.”
그렇게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는 사이.
“크룩!”
“키엑!”
크룩스와 고블린이 주민성을 잠시 바라보곤 어딘가로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응? 왜?”
몬스터들이 주민성의 곁을 떠난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주민성을 찾아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외국인도 섞여 있는 일행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폭발을 일으키신…….”
“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게이트 출입자 명단에는 분명…….”
주민성은 잠시 사람들을 살폈다.
기자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땅을 면밀히 살피는 사람도, 당장이라도 공격해 올 것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민성은 상대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몽룡이가 제대로 해 준 모양이네.’
이전에 송몽룡에게 요청했던 신성 측과 해외 언론의 지원인 모양.
그 증거로 한 남자의 배지가 주민성의 눈에 띄었다.
“신성 소속입니까?”
“아, 맞습니다.”
“……주민성입니다.”
주민성은 선뜻 신원을 밝혔다.
“저, 정말 주민성 씨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주민성 씨라면 분명 게이트 출입자 명단에는 있습니다만…….”
“…….”
상대가 신성 소속이라 선뜻 이름까지 밝혔지만, 남자의 태도는 여전했다.
오히려 눈에는 확연한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황태범과 주민성을 수없이 번갈아 보며 경계하는 것은 덤.
“곤란하지 않으시다면 소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네? 왜요?”
“최근 유명해진 능력자의 이름과 같아서요. 좋은 쪽으로 유명한 이름도 아니고…….”
주민성은 답하지 않고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신우빈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군.’
철컥!
주민성은 그대로 투혼 갑옷을 조정해 얼굴을 가렸다.
그사이,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있는 상대측 능력자 중 한 명이 주민성과 대화하던 남자에게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네고 있었다.
“과장님. 저거 주민성 맞습니다. 목소리도 정확히 일치하고요.”
“뭐? 무슨 소리야? 주민성은 FFF급일 텐데?”
“하지만 확실합니다. 아마 위험한 무기라도 소지한 건 아닐까요?”
“……그래.”
헤드셋은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장비였던 모양.
상당히 은밀한 대화였음에도 건물 부가효과 덕분에 주민성은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대화는 여기까지 합시다.”
“예? 곤란한 질문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하하!”
신성 소속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눈앞의 사람들은 아군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민성의 사회적 위치는 멀쩡한 아군도 돌아서게 만드는 수준.
당장 눈앞의 남자조차 주민성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크흠.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럼 황태범은 저희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예?”
주민성이 황당하게 답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 말할 뿐이었다.
“게이트에 숨어든 협회 간부 전원의 포획. 저희가 받은 임무라서요.”
“그럼 협회 간부를 잡아야죠.”
“어떻게 기절시켰는지는 몰라도 저 남자는 협회 간부 중에서도 전투력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황태범입니다. 주민성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명백한 무시.
불만이 있으면 가진 패를 꺼내 보라는 도발이기도 했다.
“다른 간부들은 안 잡습니까? 이놈은 제 것인데요.”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다른 사람들도 주민성에 대한 경계를 높이기 시작했다.
특히 귓속말을 건넸던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주민성을 또렷이 노려보고 있었다.
‘짜증나는군. 같은 편이라는 놈들이.’
처음엔 인내하기로 마음먹었다.
따질 대상은 신우빈이었으니까.
“김 대리. 정 주임. 바로 황태범 챙기고 외국인들에겐 상황 설명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주민성의 의지와는 별개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보통은 압도적인 무력감에 허우적댈 만한 상황.
지금은 달랐다.
쩌억!
힘을 잔뜩 실은 주민성의 손바닥이 눈앞의 남자를 강타했다.
콰당탕!
“과, 과장님!”
“크윽! 이, 이게 무슨?”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야! 저거 주민성 맞다며!”
“그, 그렇습니다!”
이젠 주민성에 대해 귓속말은커녕 대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FFF급이야!”
남자는 방어계 능력자였는지 뺨엔 푸르스름한 막이 펼쳐져 있었다.
주민성의 완력을 견디지 못해 실금이 잔뜩 펼쳐져 있었지만.
“전부 가만히 있어. 죽기 싫으면.”
“흐읍!”
이번 경고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눈앞 남자의 직급 또한 상당히 높았는지, 그는 필사적으로 손짓해 일단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름의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자 주민성은 조금의 여유를 찾았다.
“이것들이 잡으라는 간부는 안 잡고 양아치 짓을 하네. 대기업 맞아?”
뚜둑. 뚜둑.
손가락 마디뼈를 살짝 풀어 준 주민성은 자세를 낮춰 쓰러진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이봐요.”
“으어……. 뭐, 뭐야.”
“뭐야?”
쩌억!
콰지직!
남자의 방어를 깨트리는 데엔 싸대기 두 방으로 충분했다.
“뭐야?”
“뭐, 뭡니까!”
쩌억!
상대의 방어가 깨져서인지, 이번 공격엔 이빨을 우수수 날려 보내는 결과가 나왔다.
“뭡니까?”
“으, 으으……. 제홍함히다…….”
“죄송합니다?”
보통은 이쯤에서 손이 내려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주민성은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반발심을 품고 있었다.
“뭐가 죄송한데요?”
“으어?”
공격이라면 말로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막을 수 없는 필살기 수준으로.
“뭐가 죄송하냐니까요?”
“그, 그게…….”
“죄송하지도 않은데 죄송하다고 한 겁니까?”
짜악!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손에 묻은 피를 남자의 옷에 닦은 주민성의 시선은 헤드셋을 끼고 있는 능력자에게 향했다.
“거기.”
“아, 예!”
“핸드폰 좀 씁시다.”
“여, 여기 있습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있었다.
주민성을 주민성이라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어……. 그, 그 번호는…….”
주민성이 누른 번호는 신우빈의 휴대폰 번호.
큰 도련님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였다.
“그쪽. 이름이 뭡니까.”
“죄송합니다! 제 이름만은 제발!”
애초에 주민성은 이런 트러블에서 허우적댈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도 할 일은 넘치도록 많고, 귀찮은 사람과 엮이는 시간조차 아까운 상태였다.
“차, 차라리 때려 주십시오! 반쯤 죽이셔도 좋습니다!”
“…….”
주민성의 손가락은 이미 통화 버튼에 도달해 있었다.
“으으……. 죽이셔도 좋으니 가족만은…….”
“……하.”
결국 주민성은 신우빈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박살냈다.
우지직!
‘신성도 나름 복잡한 규칙이 있는 모양이군.’
주민성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반해, 헤드셋을 끼고 있던 능력자는 안도감과 희망이 섞여 있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 들리니까 입조심 하는 게 좋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람 함부로 무시하지 말고.”
“예!”
어차피 이 남자는 주민성이 처리하지 않아도 기절해 있는 남자가 개인적으로 보복할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이번만큼은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일단은 봐주는 쪽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심지어 다른 이들, 특히 외국인 집단은 지금의 사태에 당황하긴 커녕 상당한 흥미를 느끼며 주민성을 관찰하고 있었다.
‘건물 안이 아니라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군.’
적어도 이들은 주민성에게 적대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자신 있어 보이는,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중엔 주민성조차 경계하게 될 정도로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능력자도, 생글생글 웃고 있음에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는 능력자까지 섞여 있었다.
‘저들이 협회 간부들 전담인가.’
즉, 외국인들의 능력 수준은 협회 간부와 맞상대 할 수 있는 수준이라 볼 수 있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군.’
생각을 마친 주민성은 곧장 헤드셋 능력자에게 말했다.
“가던 길 가시죠. 황태범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예!”
신성 측 직원이 자리를 떠나고, 용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일행 중 한 명은 주민성에게 접근했다.
은근히 눈에 띄는, 경박한 느낌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남자였다.
주민성이 경계하던 몇 사람 중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주민성 씨. 그리고 세계 최초의 빌딩 오너.”
“……한국말 할 줄 아시네요.”
“조금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이것을.”
외국인이 건넨 것은 먹빛의 작은 명함이었다.
-Butcher
“부처?”
괴상한 명함에 주민성이 얼굴을 찌푸리자 외국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비공식 길드입니다. 그쪽이라면 자격은 충분하군요.”
“아…….”
“의뢰인의 신원은 묻지 않습니다. 의뢰금만 충분하다면 무슨 의뢰든 받기도 하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걸 왜 나한테…….”
남자는 주민성에 대해서 아는 눈치였다.
심지어 무시는커녕 상당히 신사적인 자세였다.
“분명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제 능력도 주민성 씨와 비슷하거든요.”
비슷한 능력.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상하게 치솟던 경계심마저도 맞아 떨어진다.
이 남자는 협회 간부들보다 더욱 위험한 느낌을 주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능력자신지.”
“흐음. 일단은 물주라고 해 둡시다. 자세한 대화는 다음에 나누죠. 수행 중인 의뢰부터 처리해야 하니까요.”
“…….”
물주.
건물주와 상당히 유사한 이름이긴 했다.
느낌도 비슷했다.
이름만 들어선 어떤 강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물주이기에 더욱 친하게 지내고 싶을 정도.
하지만 주민성은 건물주 능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몸으로 직접 깨달아왔다.
‘적으로 만들면 안 되는 부류. 혹시나 적이 된다면 가장 먼저 지워 버리거나 피해야 하는 부류.’
주민성은 자신을 물주라 칭하던 남자의 얼굴과 명함을 번갈아 보며 그의 존재를 똑똑히 기억해 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연락 주시길.”
“예.”
신성, 그리고 부처라는 이름의 특이한 용병들은 그대로 주민성에게서 멀어졌다.
유능한 추적 관련 능력자도 있었는지 용병들의 발걸음엔 확신이 가득했다.
“후우.”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주민성은 그제야 숨을 고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물주라.”
상당히 임팩트 있는 만남이었다.
신성 측 직원들과의 만남조차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따라서 명함은 챙길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
곧이어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협회 간부 추적에 성공한 모양이다.
“실력만 검증된다면야 얼마든지 이용해 줄 수 있…….”
몇 번이고 반복되는 폭음 속에서 잠시간의 휴식을 마친 주민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르취에게 향했다.
제르취의 손가락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