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건물 (1)
(69/250)
전설의 건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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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건물 (1)
2022.02.08.
“…….”
제르취의 표정은 한없이 복잡해져만 갔다.
“뭐 해? 출발하지 않고?”
주민성은 당당했다.
반복되는 죽음을 막아 준 정도면, 지금의 요구는 상당히 값싼 대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그러자 제르취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나 떨어져도 안 죽어. 너만 손해야.”
“……취익.”
주민성의 예상이 적중했는지 제르취는 명백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번만이다.”
“그러든지.”
작은 심리전이 끝나고, 텐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벼워 보이던 주민성의 발걸음과 달리, 제르취의 발걸음은 늪을 지나는 것처럼 무겁기 짝이 없었다.
처벅. 처벅.
텐트가 거칠게 쓸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반복됐다.
물론 속도는 이전보다 나았다.
체력과 하체 근력만큼은 제르취가 주민성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신호에 맞춰서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줘. 지금.”
“취익.”
태양의 순례길은 생각보다 구불구불했다.
왼쪽으로 급격히 꺾이다가도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지고,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다가 순식간에 완만해지기도 했다.
“좋아. 이대로 직진.”
주민성은 텐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정도면 엄청 많이 올라온 건데.’
위에서 내려다본 오크 마을은 건물 폭발로 날아올랐던 시점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그럼에도 태양의 순례지라는 종착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조건이 있는 건가?’
하위 차원은 지구와 상당히 유사했다.
중력도 같았고, 여러 물리 법칙들이 똑같이 성립했다.
이는 곧 들이닥칠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호흡 대책부터 세워야겠군.’
주민성의 귀는 이미 먹먹해진 상태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산소의 농도가 줄어든 것도 마찬가지.
만약 제르취와 건물 부가효과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 분명 호흡 곤란이 닥쳐 왔으리라.
“제르취.”
“……뭐냐.”
“이 길. 끝이 있긴 해?”
당연한 질문이었다.
태양의 순례지는 한때나마 오크들이 관리했던 성지.
이 정도로 올라왔다면 대부분의 오크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정상일 테니까.
“나로선 가 본 적이 없는 장소다.”
“그래?”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의 행군을 돌이켜볼 필요성이 있었다.
“제르취. 지금 뒤집어 쓰고 있는 텐트 벗어 봐.”
“이 특이한 천 쪼가리를 말하는 건가?”
“응.”
제르취는 망설임 없이 텐트를 벗어냈다.
“됐나?”
“흠…….”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작은 심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상해.’
명상소에 있던 고대의 영혼은 눈이 멀고 타죽을 위험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주민성은 그것의 정체를 태양의 강렬한 빛이라 추측했었다.
‘태양의 순례지. 태양…….’
주민성은 조심스레 뒤집어쓰고 있던 텐트를 벗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역시 이건 잘못됐어.”
“……무슨 말이지?”
간과하고 있던 사실 하나.
그것의 정체는 태양이었다.
“제르취. 너는 이 주변이 어떻게 보여?”
“어둡다.”
“그랬었군.”
주민성은 투혼 갑옷과 제르취의 저주로 인해 영원한 밤을 체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민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제르취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놓쳤을 줄이야.”
확신이 생긴 주민성은 인벤토리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냉방 장치를 해제했다.
치지지지지!
“……그건 뭐지?”
“아이스크림.”
조금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음에도, 아이스크림은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심지어 아이스크림 막대는 불타서 재가 될 정도.
이쯤 되면 성지를 주기적으로 방문했어야 할 오크조차 버틸 수 없는 수준이 확실했다.
“흠…….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길은 여전히 끝을 모를 정도로 뻗어나 있었다.
그것도 위를 향해서.
이 길의 끝에는 무언가 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건물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건물이야.”
“또 혼잣말인가?”
주민성은 침착하게 능력을 사용했다.
“건물 탐색.”
[건물을 탐색합니다.]
[조건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 주변에서.”
[주변의 건물을 탐색합니다.]
“가장 가까운 건물.”
[가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건물을 탐색합니다.]
“끝.”
[탐색을 시작합니다.]
주민성은 굉장히 간단한 조건만을 추가했다.
등급의 제한도 걸지 않았으며, 오로지 가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건물만을 바라는 조건이었다.
즉, 오로지 하나의 건물만이 결과로 나온다는 얘기였다.
[탐색 완료까지 10분 남았습니다.]
“후후……. 예상대로.”
“미친놈.”
건물 탐색은 간단한 조건이라면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제르취. 커피 한잔할까?”
“……뭔지 몰라도 필요 없다.”
“공짜야. 대가 없어.”
주민성은 텐트에 들어가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꺼낸 후, 제르취에게 건넸다.
“자.”
주민성과 제르취가 느끼는 주변의 온도는 뜨겁다기 보단 조금 쌀쌀한 수준이었다.
지금이라면 커피를 마시기 최적의 타이밍.
제르취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조심히 마셔. 뜨거우니까.”
“…….”
호로록!
잠깐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탐색 결과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탐색이 완료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건물.]
[한 개의 건물이 확인되었습니다.]
[특수한 장소에 존재하는 건물입니다.]
[해당 건물은 반경 10m 이내에 존재합니다.]
[해당 건물은 상공 1000m 이내에 존재합니다.]
“오.”
건물 탐색이 알리는 건물은 움집이 아니었다.
특수한 장소, 그리고 상공이라는 단어가 뒷받침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건물이라. 과연 전설인가.”
아래를 내려다봐도 보이는 건 오로지 황무지뿐.
주민성은 고대의 영혼이 했던 말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산 너머. 그리고 수양.”
시야엔 크라노돈을 토벌했던 산도 보였다.
“산은 분명 지났고.”
호로록!
제르취는 주민성의 혼잣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에 심취한 상태.
조언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수양……. 수양이 뭘까…….”
주민성은 고대의 영혼의 차림새를 떠올렸다.
“붉은 안대를 하고 있었지.”
안대라면 주민성에게도 있었다.
물론 눈 한쪽을 가릴 뿐인 안대였지만.
“이름이 콰트리취의 그림자였나?”
이 안대는 크라노돈의 고기와 맞바꾼, 재봉소의 소유권을 넘겨받기 위한 시련에서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대충 고대의 오크도 기겁하는 물건이었으니 뭔가 효과가 있겠지.”
주민성은 망설임 없이 콰트리취의 안대를 착용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치이익!
“오. 맙소사.”
안대를 착용함과 동시에 모든 것들이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미친 듯한 열기를 발산하는 태양도 느껴졌다.
주민성은 곧장 텐트를 뒤집어쓰며 갑작스레 일어난 변화에 맞섰다.
“제르취. 커피 다 마셨어?”
“아, 아직……! 취익!”
제르취는 주민성의 다급한 질문에 당황하며 커피를 허겁지겁 마셨다.
“취익! 마셨……!”
“오케이.”
[보온병이 수납됩니다.]
황급히 보온병을 수납한 주민성은 그대로 지상을 향해 뛰어내렸다.
‘안대가 열쇠였을 줄이야!’
지금의 현상에 대한 정확한 조건은 알 수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야 보인다든가 특별한 조건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젠 모든 것들이 정상적으로 보였으니까.
치이익!
‘이런.’
추락으로 인해 텐트 밖으로 삐져나온 팔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텐트로는 수습할 수 없는 수준.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주민성은 황급히 벌집을 꺼내 팔에 펴 발랐다.
‘이래도 부가효과가 적용되는구나.’
다행히 효과는 있었다.
이것으로 화상 대책은 마련됐다.
뒤늦게 안도한 주민성은 그대로 중력에 몸을 맡기며 추락했다.
‘저기군.’
시야엔 구름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것의 정체가 건물이라는 사실.
‘기둥. 촘촘한 벽돌.’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의 외견이 선명해졌다.
투박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신성해 보이는 느낌의 건물이었다.
‘고대 유적 같기도 하고.’
그렇게 건물을 둘러보던 주민성은 착지 준비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몸을 비틀었다.
“후웁!”
착지라기 보단 추락에 가까웠지만, 아무리 임시 권한이 있다 해도 머리부터 떨어지는 건 상당히 찝찝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안대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지만.
쿠웅!
“후우.”
추락과도 같은 착지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체감 온도 역시 급격히 낮아진 상태.
“제대로 도착했군.”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건물주 능력이 통제 구역과 연동됩니다.]
“이게 뭔 소리래?”
착지한 장소는 투박한 블록으로 가득 찬, 넓은 운동장 같은 장소였다.
주민성은 곧장 숨을 죽이고 메시지를 다시 한번 살폈다.
‘통제 구역?’
현실에서도 통제 구역은 존재한다.
3급 이하의 길드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일반인들이 방문조차 할 수 없는 통제 구역으로 구분됐었으니까.
더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DMZ나 각종 국가 기밀과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는 연구실이 이에 속한다.
“여, 여기가……!”
어느 샌가 주민성 뒤에서 나타난 제르취가 감탄했다.
“쉿.”
“…….”
통제에는 언제나 이유가 따른다.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목숨에 책임을 져 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식들을 기반으로 주민성은 한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연동이 되었다는 건 다행이지만…….’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연동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이득을 선사했다.
하지만 도저히 방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주민성을 압박했다.
건물 부가효과로 증폭된 감각에 잡히는 불안한 기운 때문이었다.
‘저곳이 태양의 순례지인가.’
주민성이 바라본 장소는 거대한 돔형의 건물.
그 안에선 어마어마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기운이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문제였다.
그 말은 즉, 건물 안에 살아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말이었으니까.
주민성은 곧장 제르취에게 속삭였다.
“제르취. 저 안에 누군가 있다.”
“그렇겠지.”
“……응?”
제르취의 표정은 감격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진한 아쉬움도 느껴졌다.
“성지는 진정한 전사들만이 허락받는 신성한 장소. 내가 도달하지 못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게 뭔 소리야.”
제르취는 주민성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평생 가 보지 못할 장소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죽어서야 보게 되는구나…….”
“…….”
주민성은 나름의 추리를 시작했다.
‘저 안에는 오크들이 있는 건가? 마을의 오크들과 다른 진짜 전투형 오크들이?’
움집의 오크들은 흔히 게이트에서 볼 수 있는 오크들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허약했고, 초라했으니까.
그렇다면 건물에 있는 오크들은 게이트에서 만났던 오크들과 마찬가지로 투지가 넘치는 강인한 개체들일 가능성이 컸다.
‘제르취 표정으로 봐선 위험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오크들에게 동족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일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인간보다는 끈끈할 거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지만.
자신의 욕망마저 인내하며 일족의 부흥을 위해 크라노돈의 꼬리를 쾌척하는 태도만으로도 입증은 충분했다.
“들어가도 괜찮지?”
“……취익!”
제르취는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위험, 위기감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그 말은 즉, 적어도 건물 안의 상대가 적은 아니라는 뜻.
“무슨 낯으로 그들의 얼굴을 마주한단 말인가……!”
“그래? 이번 기회에 마주하면 되겠네.”
물론 주민성에겐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었고, 제르취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좋아. 진입하자.”
“취, 취익!”
주민성은 먼저 앞장섰다.
다시금 탐욕도 샘솟았다.
눈앞의 건물은 누가 봐도 상급 이상으로 판정될 법한 건물이었으니까.
‘내가 상급은 못 먹어도 전설 등급은 먹을 수 있다 이 말이지.’
최초의 전설 건물.
분명 우연히 획득한 유일 등급보다 압도적인 보상을 선사할 것이 분명했다.
주민성은 곧장 인벤토리에서 벌집을 꺼냈다.
안전하다곤 하나 방심까지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도 먹을래?”
“필요 없다!”
“그래? 냠.”
상황이 어떻든 주민성은 인간이었다.
건물 안의 상대는 몬스터일 테고.
이럴 땐 동족을 앞세워 호의를 얻는 게 최선이었다.
“텐트 112, 119. 가르취, 차크취.”
[10분간 여왕벌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해당 건물 세입자를 호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