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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에게 물어봐 (2) (68/250)


벌들에게 물어봐 (2)
2022.02.07.


작업 지시 능력의 사용법은 간단했다.

떠올리고, 메시지의 안내에 따라 활용하면 된다.

건물 탐색처럼.

[건축업자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민성이 벌들에게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사고 치지 않고, 벌집 열심히 짓고.

이게 전부였다.

“번식 금지. 산란 금지. 오크 공격 금지.”

[건축 작업과 관련된 지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진행할 수 없는 작업입니다.]

“아하.”

작업 지시는 지휘권처럼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여왕벌들은 주민성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모양이었지만.

“건축, 건축이라.”

주민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작업 지시에 걸맞은 명령을 내렸다.

“벌집 확장은 오직 지하로만 제한한다.”

주민성 휘하의 벌들은 흔히 보던 꿀벌이 아니었다.

엄연히 땅을 팔 수 있는 땅굴 벌이었다.

[지하에 한정된 건축을 지시합니다.]

[건축 지시가 적용됩니다.]

위이잉!

다음은 번식과 관련된 지시였다.

“개체 수는 지금 상태로 유지, 건축 기한은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작업 지시가 적용됩니다.]

편법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건축이라는 목표에 걸맞은 지시라면 뭐든 되는 모양.

지시에 탄력을 받은 주민성은 다른 조건을 추가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오크에 대한 공격은 금지. 오크에겐 협조적일 것.”

[작업 지시가 적용됩니다.]

그리고 추후 나타날 고대의 여왕벌에 관한 지시도 추가했다.

“건축 도중 또 다른 벌을 발견할 시, 산 채로 포획해 둘 것. 절대 죽지 않게 할 것.”

[작업 지시가 적용됩니다.]

위이이잉!

추가된 작업 지시도 성공적이었다.

이것으로 태양의 순례길에 다녀온 사이, 새로운 사고는 생기지 않으리라.

주민성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주민성이 자리를 비워도 이곳의 원래 주인은 오크였다.

땅굴 벌들에게 오크에 대한 협조를 강조한 이상, 마을은 오크들에 의해 알아서 잘 통제될 것이 확실했다.

“이제 마지막 작업을 하러 가 볼까.”

어느덧 잠에서 깨어난 오크들이 양봉소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오크가 당당하게 주민성을 보며 외쳤다.

“취익! 골동품! 꼬리!”

“응?”

고기 파티를 하루 미룬 효과가 벌써 발휘되기 시작한 모양.

오크의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골동품! 정말 나타났다! 취!”

“오오.”

겉보기엔 조금 투박한 재질의 옷감이었다.

“오케이. 줘 봐.”

“취익!”

주민성은 곧장 인벤토리를 열어 옷감을 수납했다.

[고대의 옷감이 수납됩니다.]

“물건은 맞군.”

“취익! 고기는 내 것이다! 취익! 취익!”

“그래. 따라와라.”

“취익!”

주민성은 분명 오크들에게 고기룰 구워 준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말에도 허점은 있었다.

직접 구워 준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휘권도 엄연한 명령권인데 써먹어야지.’

오늘의 목표는 태양의 순례길 탐험.

이는 전설 이상 등급의 건물을 파밍하는 여정이었기에 고기 굽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일정이었다.

“일어나라. 스취.”

“취, 취익!”

주민성이 도착한 장소는 첫 번째 오크 부하인 스취의 집.

그리고 이 움집의 명칭은 푸줏간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대장! 취익!”

“이곳은 푸줏간이었다. 알고 있겠지?”

“취익! 뭔지 모른다!”

“너의 조상은 고기 장사를 했었어.”

“그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를 구할 수 없다!”

철썩!

주민성은 크라노돈 고기를 냅다 스취에게 던졌다.

“이젠 구할 수 있다. 구워라. 고기.”

“취, 취익! 고기는 파는 것이다! 굽지 않는다!”

희박하게 남은 장인 정신이라도 발휘된 걸까.

스취는 장사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스취의 생각일 뿐.

한국에는 이름만 푸줏간인 식당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오늘부터 푸줏간은 식당이다. 그리고 너는 고기를 굽고 물건을 받는 역할을 할 거야.”

“취익!”

확신에 가득 찬, 답이 정해져 있는 명령을 내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황무지 마을 오크 스취를 지휘합니다.]

“너는 내 첫 번째 부하다. 맞지?”

“취익! 첫 번째!”

[황무지 마을 오크 스취가 자부심을 각성합니다.]

영문 모를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전의 가르취, 차크취의 사례로 볼 때 이것은 분명 좋은 징조이리라.

“취익! 첫 번째 부하다!”

“그래.”

스취의 굽혀졌던 허리가 펴지고, 두꺼운 어깨엔 당당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킹카콜라를 가장 먼저 먹는다! 취익!”

“…….”

안타깝게도 스취는 콜라의 맛에 눈을 뜬 오크 중 하나였다.

메시지를 물릴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콜라에 대한 욕망이 확실해진 이상, 주민성에겐 스취의 욕망을 이용해 줄 필요가 있었다.

“콜라가 마시고 싶니?”

“취익! 첫 번째 부하는 콜라를 가장 먼저 먹는다!”

주민성은 인벤토리에서 회심의 물건을 꺼냈다.

물건의 정체는 한때 콩이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기 위해 구매해 둔 방탄유리 금고였다.

“후후. 콜라라면 있지.”

주민성은 스취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금고의 비밀번호를 조작했다.

달칵!

그리고 금고 안에 콜라를 집어넣고 금고를 봉인시켰다.

“취, 취익! 콜라다!”

스취는 홀린 듯 콜라를 향해 접근했다.

“기다려.”

“취, 취익?”

“콜라는 아무나 먹을 수 없어. 시련을 통과해야만 먹을 수 있다.”

주민성은 시련이라는 단어가 오크들에게 꽤 잘 먹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스취. 이것은 첫 번째 부하인 너에게만 주어진 시련이다.”

스취는 콧김을 거세게 뿜으며 주민성의 말에 심취했다.

“취익! 취익!”

“고기를 굽다 보면 문이 열릴 것이니.”

“취이이익!”

“구워라. 고기.”

[놀라운 지휘가 발휘됩니다.]

[황무지 오크 스취의 의욕이 대폭 증가합니다.]

효과는 굉장했다.

“취익! 굽는다! 고기!”

스취의 의욕을 다잡은 주민성은 그대로 마석 화로와 크라노돈의 꼬리 고기를 꺼냈다.

“한 번만 보여 준다. 배워라.”

“취익! 배운다! 고기 굽기!”

[황무지 오크 스취의 학습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시련과 지휘는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했다.

고작 한 번의 굽기 시연만으로 스취는 마석 화로의 조작법까지 깨달았다.

“취익! 굽는다! 고기! 마신다! 콜라!”

“좋아. 잘하고 있어.”

어느새 푸줏간 주변은 고기 냄새를 맡은 오크들로 대성황을 이루기 시작했다.

“취익! 먹고 싶다!”

“우리 집엔 물건이 나오지 않는다!”

“취익! 비켜! 나는 물건이 있다!”

고대의 물건을 들고 있는 오크는 자신 있게 푸줏간에 입장했다.

주민성은 묵묵히 스취의 대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취익! 가져왔다! 물건!”

하지만 스취는 고기 굽기에 심취해 있었다.

“물건은 구석에 놔둬라!”

“취익! 알았다!”

100%의 대응은 아니었지만, 고대의 물건을 수령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민성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럼 먹어라!”

“취이이익!”

10분쯤 지났을까.

스취 곁엔 가르취와 차크취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나도 시련 원한다! 취익!”

“콜라취!”

[황무지 오크 가르취의 의욕이 상승합니다.]

[황무지 오크 차크취의 의욕이 상승합니다.]

다행히 배불뚝이 오크들도 부하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

하지만 이 둘은 주민성의 히든카드나 다름없었다.

“너희에겐 음……. 대충 기다림의 시련을 준다.”

이번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대충 기다림의 시련!”

“대충취!”

주민성은 둘에게 텐트를 씌웠다.

“그래. 대충 그렇게 기다리고 있어.”

가르취와 차크취가 하위 차원 치트키인 이상, 주민성은 이들을 여왕벌의 권능을 활용해 호출할 생각이었다.

‘태양의 순례지엔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까.’

물론 인벤토리에 챙겨 두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것은 뼈를 깎고 살도 깎는 멍청한 수단이었다.

인벤토리에 있는 한정판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금의 방법이 옳다.

“취익! 더 맛있는 고기였다!”

크라노돈의 꼬리 고기는 다른 부위보다 더 맛있었는지 오크들은 더욱 열광하고 있었다.

‘부위가 다르면 맛과 효과도 다른 건가?’

호기심이 생긴 주민성은 스취가 구워낸 꼬리 고기를 조금 덜어 먹었다.

[포식자의 허기가 발동됩니다.]

[피식자의 힘을 일부 포식합니다.]

[정력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소화 완료까지 남은 시간 5분.]

“미, 미친.”

고기의 맛은 너무도 훌륭했지만, 그 효과는 주민성에겐 독이었다.

이곳에 사람이라곤 주민성뿐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르취가 말했던 종족의 부흥이라는 말뜻도 해석되기 시작했다.

“취익! 대장! 고기 더 있다! 먹어라!”

“……안 먹어.”

주민성은 당장 이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 이 마을에선 광란의 파티가 벌어질 예정일 것이 분명할 테니까.

“취익! 너무 맛있는 고기! 이상한 기분이다!”

“힘이 솟는다! 취익!”

푸줏간을 빠져나온 주민성은 다시 명상소 앞으로 돌아왔다.

태양의 순례길을 오르기 위함이었다.

“이제 출발하는 건가?”

“그래.”

제르취의 목소리엔 작은 기쁨이 서려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종족의 부흥이 이뤄질 테니 당연했다.

“너는 어쩔래. 따라올래?”

“따라가진 못하겠지. 다만 너에게서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뭔 소린지 모르겠네. 너 알아서 해라.”

“……그러지.”

아마도 제르취는 투혼 갑옷을 매개로 주민성을 추적할 수 있는 모양.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크라노돈조차 사냥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하나 추가된 셈이니까.

“읏차.”

주민성은 반투명한 길에 올라섰다.

적응하기 힘들 것 같은 부유감이 느껴졌다.

“가까우면서도 멀다고 했었지?”

주민성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행군을 시작했다.

“후우. 후우.”

행군길은 상당히 고달팠다.

특히 정신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태양의 순례길은 오로지 하늘만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무한한 오르막길인 데다, 몸을 기댈 난간조차 없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임시 권한 덕분에 몸이야 멀쩡하겠지만, 멘탈이 나가는 건 확실하리라.

“처음부터 다시 갈 생각은 없어. 무조건 원 트라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태양 빛이 주민성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

투혼 갑옷의 저주는 오로지 밤하늘만을 선사했다.

“후우! 이것도 나름 이득이네!”

고대의 영혼은 이렇게 말했었다.

보고자 하면 눈이 멀 것이고, 가까이하면 타 죽을 것이다.

이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태양 빛도 강해질 테니까.

“후우! 후우!”

얼마쯤 걸었을까.

이젠 주민성의 거친 숨소리에 한 가지 익숙한 소리가 추가됐다.

“취익!”

“쯧쯧.”

콧소리의 정체는 제르취.

거리가 멀어져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제르취는 주민성의 등 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라노돈을 사냥하던 때와 비슷했다.

“후우. 후우.”

주민성은 굳이 제르취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걸 틈이 없었다.

“취익!”

제르취는 태양의 순례길을 걸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취익!”

제르취가 다시 나타나는 순간은, 제르취가 지상에 부딪히는 시간과 맞물렸다.

“취익!”

“에휴.”

주민성은 결국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되살아난다곤 하나, 죽음으로 광폭해지는 제르취의 성향은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짜식. 나한테 감사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다행히 태양의 순례길 판정은 너그러운 편이었다.

주민성뿐만 아니라 소유물도 태양의 순례길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고고고.”

주민성은 유연성을 발휘해 상체만 돌린 채 텐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르취가 재등장했다.

“취!”

“그만해. 시끄러워.”

“……익!”

체념 어린 제르취의 표정은 당황으로 시작해, 경악으로 변해 갔다.

“떠, 떨어지지 않는다고?”

제르취는 자신이 순례길에 오를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태양의 순례지는 한때 오크의 성지였던 장소.

“맙소사…….”

제르취에겐 지금의 기적이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민성은 그런 감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텐트를 계속해서 설치했다.

“후후후후…….”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서……. 두 발로 서 있다니……. 취익!”

주민성은 부지런히 작업에 몰두했다.

새로 설치된 텐트는 어느새 제르취의 다리와 허리에 감겨 있었다.

“음. 이걸로 마무리할까.”

주민성은 텐트 천을 꼬아 밧줄처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밧줄은 주민성의 텐트와 제르취의 텐트에 이어졌다.

“제르취. 앞장서. 저쪽으로 가면 된다.”

주민성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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