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세상 레이드 (1)2022.01.26.
고대의 영혼들이 동요했다. “시련이 시작됐다!” “무라크! 부디 우리를 보살펴 주소서!” 크라노돈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놈이 오크의 천적이라는 사실을. 키아아아아아! 제르취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대응은 빠를수록 좋다. 어떻게 할 거냐. 악마.” “흠.” 왜인지 임시 권한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유물의 부작용이 광증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이용료는 받아야겠지.” “좋다.” 제르취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밤이네.’ 밤이 된 건 제르취가 나타난 순간부터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도 아니었다. ‘근데 왜 잘 보이지?’ 주변의 움집들부터 메마른 나무들까지. 전부 선명하게 보였다. 주민성은 어둡지만 잘 보이는, 기묘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야. 같이 가.” “…….” 제르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새삼 운전기사가 그리워질 정도. 저벅. 저벅. 주민성과 제르취는 한참을 걸었다. 우회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이동 코스는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후우! 후우!” “…….” 숨이 벅차오를 때마다 제르취에게서 살기가 느껴졌지만, 이미 이용료가 청구된 마당에 제르취가 주민성을 공격할 방법은 없었다. “악마 놈. 끝까지 나를 고뇌에 빠트린다.” “꼬우면 돈 내든가.” 힘든 와중에도 주민성은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앞으로 얻을 이득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이야.’ 제르취는 이용료를 납부할 확률이 있는 희귀종. 어찌 보면 절대 을보다 훨씬 깔끔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대상이었다. ‘어떻게든 데리고 돌아가서 건물 투어를 시켜 봐야지.’ 보유한 건물은 어느새 1000개를 넘어섰다. 그리고 오크의 이용료는 크라노돈의 조각 뼈. 물론 이용료의 정확한 기준은 알 수 없다. 주민성이 주목하는 건, 지금처럼 이용료를 벌기 위해 직접 나서는 모습이었다.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잠시 후, 가파른 벼랑 앞까지 도달했다. “저기 있다.” “…….” 주민성은 비로소 크라노돈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걸 사냥한다고?” 크라노돈은 공룡과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였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보통은 수천의 오크 전사가 힘을 합쳐 사냥한다.” “그런데 저걸 혼자 잡아?” “당연하다.” 공룡은 당연히 크다. 하지만 크라노돈은 커도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무슨 아파트 상대로 레이드하는 느낌인데.” 아파트도 보통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크라노돈은 강남의 유명한 80층 아파트 단지와 비슷한 크기를 자랑했다. “조각 뼈는 대체 어느 부위야? 손톱보다 작겠는데.” 주민성이 황당해하는 사이, 제르취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냥. 시작한다.” “어? 어어?” 이미 제르취는 벼랑에서 뛰어내린 상태였다. “쿠워어어어!” 심지어 기습이 무의미할 정도로 거칠게 포효했다. “키아아아아아!” 크라노돈 역시 제르취를 포착했다. 쿠구구구구! 쾅! “아오! 뭐야 이게!” 크라노돈의 꼬리가 순식간에 제르취를 강타했다. 그 충격파는 주민성에게까지 전달됐다. 쿠르르르! 제르취는 크라노돈이 꼬리를 회수하고 나서야 발견됐다. “야! 사냥한다며!” 제르취는 말이 없었다. 땅에 파묻혀 있을 뿐. “젠장.” 이대로 제르취가 죽어 버리면 곤란했다. “뛰어내려야 하나?” 크라노돈에게 피해를 입힐 만한 수단은 건물 폭발 정도. 하지만 이 능력은 사용해선 안됐다. 제르취가 폭발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일단 구하는 게 급선무군.” 공격 수단은 마땅치 않아도, 방어 수단은 확실했다. 벼랑에서 뛰어내려 제르취 대신 크라노돈의 공격을 버티면 될 일이었다. “시선을 끌어서 멀리 유인하는 게 좋겠네.” 주민성은 심호흡하며 벼랑 끝에 섰다. “죽지 마라.” 그렇게 뛰어내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제르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이미 죽어 있다.” “…….” 황당하게도 제르취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멀쩡히. “네놈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어? 뭐야.” 주민성은 제르취가 파묻혀 있던 자리를 다시금 바라봤다. “…….” 그곳엔 크라노돈의 꼬리가 휩쓸고 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복수자는 불멸. 복수가 끝날 때까지 죽지 않는다.” “뭐야. 너 안 죽니?” “난 이미 죽어 있다.” “…….” 제르취는 다시 한번 벼랑에서 뛰어내렸다. “쿠워어어어!” “크라아!” 압도적인 전력 차이. 제르취가 크라노돈을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쾅! 쾅! 쾅! 승패는 명확했다. 크라노돈은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제르취를 압도했다. 그리고 제르취의 재등장. “야. 너 자꾸 죽을 거야? 제대로 공격도 안 하던데.” “이것은 사냥이다.” 제르취는 끊임없이 되살아나 벼랑에서 뛰어내리길 반복했다. “…….” 쾅! 차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크라노돈이 아닌 제르취에게. “쿠어어어…….” “야. 괜찮은 거 맞아?” “쿠어어어어…….” 제르취를 휘감은 새까만 기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이성도 조금씩 상실하는 모양. 흡사 게이트에서 만났던 제르취를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네. 죽을수록 강해지는 건가?’ 실패를 집어삼키며 성장하는 모습은 확실히 복수자에게 어울리는 특징이었다. 쾅! “쿠워어……” 제르취가 벼랑 위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 이유도 밝혀졌다. ‘나를 세이브 포인트처럼 사용하네.’ 제르취는 복수의 대상인 주민성 주변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군.’ 지금이라면 주민성이 직접 개입해도 됐다. 하지만 제르취의 사냥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더불어 자신을 노리던 상대였으니만큼, 많은 정보를 얻어두는 쪽이 이득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쾅! 어느덧 제르취는 50번이 넘는 죽음을 맞이했다. “쿠워……!” 제르취의 목소리에선 강렬한 힘이 느껴졌고, 팔뚝은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멀거리던 검은 기운도 이젠 마음껏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활개 쳤다. 그리고 크라노돈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크라아아아아!” 분노에 가득 찼던 포효 속에 미세한 공포가 섞이기 시작한 것. 쾅! “쿠어어어어…….” 콰직! 제르취의 첫 공격은 74회차에서 성공했다. 크라노돈이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었다. 이는 맞서지 않으면 죽는다는 느낌의 경고였다. ‘심리전도 하는구나.’ 쾅! “쿠워어어어…….” 되살아난 제르취는 오로지 크라노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뛰어드는 속도도 점차 빨라졌다. “야. 괜찮아?” “쿠워어……!” “…….” 제르취의 부활이 100회차를 넘겼다. 끔찍한 죽음의 연속이었지만, 성과는 확실했다. 쾅! 콰직! 크라노돈의 공격을 회피하고, 동시에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허무한 죽음은 없었다. 콰직! 콰지직! 본능만 남은 두 몬스터의 싸움. 한 편의 판타지 영화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와그작! 주민성은 아늑한 텐트 속에서 감자칩을 씹어대며 관전을 이어나갔다. “오. 이번엔 맞겠네.” 쾅! 분투 끝에 죽어버린 제르취가 텐트 옆에서 나타났다. “쿠워…….” “냠냠. 방금은 아까웠다.” “…….” “뭐 해? 빨리 싸우러 가야지.” 주민성의 이런 태도는 이성을 잃었던 제르취마저도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넌 정말 악마다.” “알았으니까 빨리 출발!” “…….” 제르취는 다시금 투지를 일으키며 벼랑에서 뛰어내렸다. “……이성은 남아 있네. 다행이다.” 방금은 주민성의 고의적인 케어였다. “앞으로 건물 이용자를 넘어 입주자가 될지도 모르는 녀석인데. 이 정도 서비스는 괜찮겠지.” 주민성이 원하는 제르취는 싸움에 미쳐버린 제르취가 아니었다. 이용료를 따박따박 내주는 제르취였다. “납부 확률은 1%니까. 절대 방심하면 안 돼.” 실제로 크라노돈은 힘과 속도는 물론, 판단력까지 겸비한 괴물 그 자체였다. 수천의 오크 전사가 뛰어들어야 크라노돈을 사냥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 “그런데도 혼자 100인분이라…….” 주민성은 게이트에서 오크와 싸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강했었지. 전부 오크 전사들이었나?” 그리고 송몽룡의 호위를 담당하는 오크도 떠올렸다. “그건 투사급이었지.” 그동안의 공부로 알고 있는 오크 계급 중엔 전사라는 계급이 없었다. 게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오크부터. 긴 송곳니와 붉은 문신이 특징인 투사. 그리고 누가 봐도 보스급인 족장이 전부였다. “그럼 몬스터 웨이브로 출현한 다크울프 라이더가 일반 오크가 아닌 전사급?” 광증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확실히 평범함을 따지자면 귀신 오크들 쪽인데.” 주민성이 말하는 귀신 오크는 건물주 능력에 의해 나타난 고대의 영혼이었다. “심지어 투지도, 적대감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 고대의 영혼, 움집 지하에서 들려온 오크의 겁먹은 목소리까지. 이것은 몬스터보단 일반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 차원은 도대체 뭘까……. 평범한 오크와 무식한 괴물이 있는 세상이라니.” 주민성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 * * 같은 시각. F급 게이트에선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경악을 넘어 전율할 정도의. “맙소사…….” 송몽룡은 얼빠진 표정으로 경비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누구라도 대답 좀 해 주세요……. 네?” “취익.” 송몽룡 주변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이는 송몽룡의 능력을 공유하고 있는 오크 투사뿐이었다. “난 이렇게 무식하게 능력을 쓰지 못한다고…….” 신우빈을 비롯해 최선아, 운전기사, 그리고 얼굴도 본 적 없는 협회 소속의 인물들까지. 전부 멈춰있었다. 지금의 현상은 시간 정지를 사용했을 때 보이는 현상이었다. “내가 아니야…….” 송몽룡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시간 정지 능력을 사용하면 급격한 노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대로라고…….” 송몽룡의 손은 여전히 쪼글쪼글했다. 만약 여기서 능력이 사용됐다면 손이 쭈글쭈글하게 변해야 하는 게 맞았다. 이것으로 송몽룡은 자신이 능력을 쓰지 않았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아. 대장님도 안 보이고, 저 장벽은 또 뭐야…….” 송몽룡은 게이트와 도시의 경계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계선엔 반투명한 장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파지지! 장벽에선 손만 닿아도 위험할 것 같은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송몽룡은 시험 삼아 근처의 돌멩이를 집어 장벽에 던졌다. 치직! “…….” 그렇게 돌멩이는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이트째로 갇힌 건가…….” 송몽룡은 장벽 너머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벽 너머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움직이는 차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간 정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송몽룡은 특별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분명 누군가는 이곳의 변화를 알아차리겠지.” 장벽을 발견한 누군가는 게이트에 문제가 있음을 신고할 것이고, 그 이후엔 상황을 진정시킬 협회의 고등급 능력자가 파견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구원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 기준이라면. “협회가 정상적이어야 말이지.” 송몽룡은 지금의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지원을 받는다 한들 계약이 문제였고, 처지가 문제였으며, 허공을 향해 적대적인 눈빛을 쏘아대는 남자도 문제였다. 파지직! “젠장.” 수상해 보이는 남자의 품을 뒤지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명백히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송몽룡은 상대의 신원을 알고 있었다. “그놈의 계약…….” 협회인을 상대로 어떠한 피해도 줄 수 없다는 계약. 약자는 약자로서 철저히 고개를 숙일 것만을 강제한 계약이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판자촌 식구들 모두에게 걸려 있는 제약이었다. 송묭룡은 처음 주민성을 만났을 당시, 상대가 협회인이라는 착각 때문에 아무런 힘도 못 썼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와 지금은 달라…….” 눈앞의 협회인 역시 주민성을 처음 만났을 당시와 비슷한, 위협적인 기세가 느껴진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도 송몽룡에겐 희망이 있었다. 자신들을 대신해서 협회에 한 방 크게 먹여 줄 사람이 생겼으니까. “대장이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판을 깔아야겠어.” 송몽룡은 주민성의 가르침을 재차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