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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건물이 아님. (3) (55/250)

이 세상 건물이 아님. (3)2022.01.25.

황당한 상황이었다. 몬스터의 말이 들리고, 말이 통하고. 심지어 물리력의 행사까지 가능했다. “다 던졌냐고.” “크아아아!” 제르취의 날카로운 도끼가 다시금 날아왔다. 쐐액! “우와. 너 도끼 많구나.” 토옹!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날아온 도끼는 황당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올 뿐. 타격 면역은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돼.” 주민성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이건 광증이 아니야.’ 주민성의 정신은 멀쩡했다. 보이는 게 바뀌었을 뿐. 죽었던 몬스터와 재회했으니 광증이라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제르취! 네 놈 어떻게 된 게냐!” “나, 나는 투사 제르취! 제르취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주민성은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봤다. ‘고대의 영혼은 이곳에서 죽은 오크들이겠지. 살다 살다 사람 귀신보다 오크 귀신을 먼저 볼 줄이야.’ 고대의 영혼은 오크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제법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주어진 단서들을 종합하면 이쪽이 가장 유력했다. ‘여기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는 나와 더불어 제르취라 불리는 저 오크겠지.’ 주민성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제르취는 주민성이 사는 세상의 게이트에서 만난 몬스터였다. ‘저놈에게 뭔가 있다.’ 주민성은 제르취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내 마지막 기회를 이대로 날려 버릴 순 없단 말이다!” “건방진 놈! 규칙까지 어겨 놓고 뻔뻔하구나!” “시끄럽다! 나는 투사 제르취!” “너는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사라지거라!” 고대의 영혼은 제르취를 노골적으로 질책했다. “죽어서 얻어낸 마지막 기회란 말이다!” “오호.” 마지막 기회. 즉, 주민성에게 복수할 기회였다. 이것으로 광증의 정체가 어느 정도 뚜렷해졌다. 건물 탐색의 결과도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한 사항. ‘영혼석이 원한을 품은 몬스터가 죽어서 남긴 것이라면, 기회는 이 유물이 줬다고 볼 수 있겠지.’ 이 유물의 이전 사용자, 테스터는 사망했다. SS급 능력자임에도. ‘SS급 능력자가 단순히 미쳐서 죽는다는 건 이상하지. 서풍에 회복계 능력자가 없을 리도 없고.’ 유물 설명서엔 테스터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 유물의 이전 사용자는 서풍 소속 길드원이 유력했다. 서풍은 이렇게 스펙 좋은 유물을 팔아 버릴 정도로 가난한 길드가 아니다. 물론 이것도 유물의 부작용이 발견되기 이전의 얘기. 주민성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또 하나의 가설을 추가했다. ‘이 현상은 죽였던 몬스터와 재회하는 것. 이게 만약 실체라면?’ 서풍은 길드의 큰 전력을 차지하는 SS급 능력자를 잃었다. 그리고 광증에 대해 자세히 파헤치는 것보단, 유물의 매각을 통해 새로운 전력을 보충하는 선택을 했다. 따라서 주민성의 가설 역시 타당하다. SS급 게이트의 보스급인 블랙 미노타우로스 킹, 즉 블랙 미노킹을 SS급 능력자 혼자서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것도 이렇게 별개의 공간에서. ‘정말 현실 속 시간은 멈춘 게 맞는 걸까.’ 하위 차원을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 정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풀이는 가능하다. ‘멈췄다면 말은 되는데.’ 현실 속 시간이 멈춰 있는 사이, 서풍의 SS급 능력자 또한 별개의 차원으로 이동했을 가능성. 전리품인 마석을 남기지 않는 블랙 몬스터. 그리고 유물. ‘어?’ 주민성의 가설은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상상이 깊어 갈수록 생기는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 겪은 사람이 더 존재할 텐데?’ 게이트 원정의 기본은 과도한 전력 구성에 있다. 게이트에서 무한히 나오는 몬스터와 다르게, 능력자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몬스터 입장에선 능력자들이 비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뜻. 저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내 한 몸 불사라 네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제르취는 주민성이 상념에 빠진 것을 노골적인 무시로 판단했는지 더욱 거세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보다 못해 꺼낸 한 마디. “이용료 청구.” “취익?” [대상에게 이용료를 청구했습니다.] “실내는 처음이지?” “췻! 취이잇!” 당황한 제르취는 알 수 없는 현상에 저항하려 했다. 필사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하지만 그것은 건물주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으로 판정된다. “안 돼!” 제르취의 터질 듯한 팔 근육이 점차 굳어 갔다. [대상이 이용료를 납부할 확률은 1%] 제르취는 일방적인 복수를 상상했다. 목숨을 바쳐 얻은 기회였기에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그리고 장소까지 나빴다. “이 집. 이제 내 집이거든. 행패 타임은 끝났어.” “마, 말도 안 되는 소릴!” “어쩌겠어. 내가 건물준데.” 주민성은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제르취를 도발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당황하고 있었다. ‘뭐야. 1% 뭔데.’ 이용료 납부 확률 1%. 황당하게도 눈앞의 귀신 오크는 건물 이용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은 최초였다. ‘아, 잠깐. 최초면…….’ 주민성은 제르취를 건물 이용자로 만들어 얻을 손익을 빠르게 계산했다. 답은 빠르게 나왔다. ‘이건 못 참지.’ 건물을 이용하는 오크. 심지어 이미 한번 죽은 상태. 그런 몬스터가 이용료까지 낸다? 누가 봐도 달성하기 어려운, 터무니없는 업적이었다. ‘엄청난 능력을 얻겠군.’ 주민성은 제르취를 향해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뭐 하세요. 메시지 봤을 거 아냐. 돈 내야죠.” “마, 말도 안 된다!” “불만이면 돈 내세요. 고객 놈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역겹구나! 제물에 미쳐 있는 인간아!” “네.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비는 따로 정산할게.” 곧이어 이용료를 수금하는 인벤토리가 나타났다. “보이지? 거기다 돈 넣으세요. 가격은 어디 보자…….” [이용료는 크라노돈의 조각 뼈 50개입니다.] 메시지는 주민성과 제르취가 동시에 확인했다. “…….” “참으로 악랄하구나. 노잣돈까지 요구하다니.” 놀랍게도 메시지는 원화를 표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크라노돈의 조각 뼈라는 터무니없는 화폐가 나타났다. ‘이게 하위 차원의 화폐인가?’ 새로운 의문들이 마구 샘솟았다. 왜 달러가 아니고 원화였는지. 능력이 국적을 판정하는 건지. 지역을 판정하는 건지. ‘아니야. 일단은 받고 보자.’ 제르취가 이용료를 낼 확률은 존재하지만, 이는 1%에 불과하다. 때문에 주민성은 필사적으로 의문을 억누르고 닦달을 시작했다. “아 빨리. 털어 봐. 조각 뼈인가 뭔가.” “명예도 모르는 자식! 죽어도 내줄 수 없다!” “넌 이미 죽어 있다.” “췩!” 다행히 오크는 죽어서도 머리가 나빴다. 여기서 주민성이 해야 할 건, 제르취를 어떻게든 구워삶아 이용료를 납부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헛소리!” “지금도 봐. 난 언제든 널 제압할 수 있어.” 조금의 허세가 섞였지만, 사실은 사실. 이용료 청구는 제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돈 내놔. 살려는 드릴게.” “난 이미 죽어 있다.” “아, 그랬지.” 오크와의 대화는 덩달아 머리가 나빠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주민성은 태세를 바꿔 협박을 시작했다. “지하에 다른 오크들 있던데.” “……취잇!” “이용료만 내. 전부 살려는 드릴게.” 그제야 말하고 싶었던 고전 영화 속 대사가 완성되고, 제르취는 고민에 휩싸였다. “나한테 선택지는 많아. 다른 오크들까지 전부 부하로 만들어도 되고.”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돈 내는 거 봐서.” 주민성에겐 이곳에서 아주 잘 먹힐 가능성이 있는 무기가 있었다. 걱정하던 변수였던 광증은 제르취의 등장으로 대부분 해소된 상황. 주민성은 당시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오크 리더 제르취를 토벌했습니다.] [다크울프 리더 제르취를 토벌했습니다.] [오크 종족의 지휘권 일부를 인계받습니다.] [다크울프 종족의 지휘권 일부를 인계받습니다.] ‘지금이라면 쓸 수 있어.’ 일부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의 작은 부락이라면 지휘권도 유효하게 쓰이리라. “어떻게 할래?” “취잇……!” 제르취는 크게 갈등했다. 주변에 있던 고대의 영혼들 또한 동요했다. “제르취! 어찌하여 재앙을 불러들였느냐!” “우리의 역사도 여기서 끝인가……!” 건물주 능력의 보정이 들어갔는지, 고대의 영혼들은 주민성을 크게 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르취를 나무라고 있었다. “요구 사항을 들어주거라! 제르취! 어쩔 수 없어!” “살아야 할 오크는 살아야지!” 제르취는 억울해하며 말했다. “이놈만 죽였어도 우리의 염원은 이뤄졌을 거요!” “하지만 실패했지.” 주민성의 훅 들어오는 팩트 폭력은 제르취도 어찌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앞으로도 쭉 실패할 거야. 대충 협상하자. 조각 뼈가 뭐 대단한 거라고.” “네, 네놈이 정녕! 이 뼈의 가치를 모르는가!” “응. 그렇게 설명만 할 거면 넌 그냥 여기 있어. 나는 밖으로 나갈 거야.” 주민성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르취가 동요하는 걸 확인한 이상,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 이.’ 한 걸음에 한 번씩. 주민성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걸었다. 그리고 일을 세려던 순간. “멈춰! 요구에 응한다!” “……그래.” 제르취가 항복을 선언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어서도 복수가 불가능한 상황에 다른 오크들까지 인질로 잡혀있었으니까. ‘1%라더니. 생각보다 쉽군.’ 주민성은 느긋하게 이용료가 납부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건가.’ 제르취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거대한 몬스터의 조각 뼈 한 개가 장식된 목걸이였다. 뚝! 제르취는 자신의 목걸이를 끊어냈다. “지독한 놈…….” 그리고 이어진 감격스런 납부. [크라노돈의 조각 뼈 1개가 납부되었습니다.] [완납까지 남은 금액: 크라노돈의 조각 뼈 49개.]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용료가 완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해. 아직 49개 남았잖아.” “…….” 제르취는 주민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해?” “……시간이 필요하다.” 목걸이를 끊어내는 순간부터였을까. 제르취의 말투가 달라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말투가 아니었다. “10초 준다.” “불가능하다. 거절의 의미가 아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죽어서까지 간직했던 목걸이에 고작 조각 뼈 한 개만이 장식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시간이 필요하길래?” “조각 뼈를 가져올 시간이 필요하다.” “흐음…….” 크라노돈의 조각 뼈는 오크들에게 있어 아주 큰 가치의 화폐로 통하는 모양이다. “나머지 조각 뼈는 집에 있니?” “……나에게 집은 무의미하다.” “집에 뭐라도 쟁여 뒀을 거 아냐. 복층 살면서 발뺌하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상에 방이 있고 지하층까지 있다면, 그것은 엄연한 복층 건물이었다. 그리고 주민성에게 복층 건물은 부자가 사는 집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살았던 집으로 안내해. 조각 뼈 한 개만 나와 봐.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 “……그곳엔 단 한 개의 조각 뼈도 없다.” 주민성은 제르취를 응시했다. “진짜로?” “그렇다.” “…….” 제르취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함까지 느껴질 정도. ‘살다 살다 몬스터랑 대화하며 동정까지 하다니.’ 제르취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주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조각 뼈는 어디서 가져올 건데.” “크라노돈을 직접 사냥한다. 그리고 차지한다.” 귀신에 대한 온갖 상식들이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너 이미 죽은 거 아니니?” “맞다. 허나 가능하다.” 물리력을 마구 발휘하는 눈앞의 귀신 오크는 자신이 직접 사냥할 것을 장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네가 말하는 크라노돈. 사냥하기 쉬워?” “……쉽지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지금이라면 사냥할 수 있다.” 단순한 대답이 이어졌다. 때문에 주민성은 좀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했다. “사냥 계획부터 말해 봐.” “크라노돈의 목을 치고, 조각 뼈를 차지한다.” “흐음.” 직접 쉽지 않다고 말해 놓고도 제르취는 사냥의 성공을 장담하고 있었다. “나는 복수자다. 복수가 끝나지 않는 이상, 나는 소멸하지 않는다.” 이번엔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죽지 않는 복수자가 끝없이 복수를 반복해 온다면 그 대상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터. “그래서. 크라노돈은 어디 있어.” “놈은…….” 그 순간. 키아아아아아아! 꾸준히 들었던 괴성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설마.”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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