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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건물이 아님. (1) (53/250)

이 세상 건물이 아님. (1)2022.01.23.

메시지는 장난을 치지 않는다. 언제나 적혀 있는 그대로. 반드시 이뤄진다. “…….”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이건 또 뭔데.” 꿈이 아니었다. 메시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임시 권한 종료까지 남은 시간: 7분] [투혼 갑옷과 제르취의 영혼석이 연동됩니다.] [하위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주민성은 잠시 메시지를 응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생명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언덕이다. “여기가 진짜 하위 차원이라는 말이겠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태양은 두 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기회일지, 혹은 새로운 위험이 될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키아아아! ‘위험하겠네.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괴성의 근원지는 건너편 언덕 너머. 주민성은 그대로 숨을 죽이고 바닥에 엎드려 몸을 숨겼다. ‘몬스터라. 게이트 같은 곳인가?’ 멀리서도 포악함이 느껴지는 방금의 괴성은 몬스터에 가까웠다. ‘인벤토리.’ 스슷! 다행히 능력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임시 권한도 마찬가지. 주어진 7분의 시간은 주민성에겐 기회나 다름없었다. ‘일단은 안전부터 확보해야겠군.’ 지금의 언덕은 멀리서도 눈에 띄기 쉬운 장소였다. 주민성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몸을 굴렸다. 데굴데굴. 군데군데 박혀 있는 뾰족한 돌멩이는 문제없었다. 적어도 타격 면역이 유지되는 7분 동안은. 데굴데굴데굴. 얼마쯤 굴렀을까. 주민성은 무사히 저지대로 내려올 수 있었다. ‘여기는 조금 낫네.’ 언덕 아래의 상황은 언덕보단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메마른 풀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으니까. 주민성은 망설임 없이 메마른 풀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하. 이게 뭐람.” 주민성이 지금 겪고있는 현상은 절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면도 의심해 봤다. “어라?” 놀랍게도 주민성은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특히 계약으로 제한되었던 협회 간부의 이름마저도. “임진석. 이게 되네?” 오히려 지금 상황은 최면을 넘어 계약까지 벗어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최면이라기엔 너무나 멀쩡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메시지까지. “진짜 하위 차원인가 보다. 하위 차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차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어딘지 고민할 시간도 아니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이 문제는 게이트에 귀환해도 마찬가지. 게이트엔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낸 협회 간부들이 주민성을 노리고 있었다. “산 넘어 산이군. 선아 씨는 잘 도망갔으려나.” 신우빈은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 워낙 잘난 데다, 협회를 무서워하긴커녕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니까. 귀찮음은 조금만 부지런해져도 해결될 문제였다. “에휴. 그래도 이게 어디냐. 이것도 기회겠지.” 상황이 어쨌건 처음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엔 풍족한 먹거리가 가득하고,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텐트만 수백 개. 여기에 초고가 유물까지 더해졌으니까. “생존 대책은 완벽해.” 지금의 주민성은 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식주를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었다. 키아아아아악! 다시금 알 수 없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일단 여기부터 벗어나자. 소리도 가까워지는 느낌이고.’ 주민성은 괴성이 들리는 방향을 잠시 바라보곤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냅다 달렸다. “헉! 헉!” 건물 부가효과 덕분에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체력만큼은 극복하기 힘든 고질적인 문제였다. FFF급의 한계이리라. 털썩! 주민성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새삼 데빌도그의 존재가 소중해지는 순간.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라?” 상당히 강하게 넘어졌음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임시 권한이 아니라면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했다. “후우! 임시 권한이 왜?” 하지만 주민성이 달린 시간은 절대 짧지 않았다. 체력은 약해도 의지만큼은 강했으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나?” 이유가 어쨌건 타격 면역은 아직 유지 중. 주민성은 망설임 없이 몸을 굴렸다. “일단 움직이자.” 데굴데굴데굴. 얼마쯤 굴렀을까. 주민성은 이것마저도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근육의 통증도 타격으로 판정되었는지 통증은 없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일 힘도 없었다. “헉! 헉! 이걸 망했다고 하기도 어렵고…….” 주민성은 구르는 와중에도 시간을 쟀다. 덕분에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그래도 임시 권한은 계속 유지네. 대박.” 압도적인 혜택에 주민성의 입가가 끊임없이 씰룩였다. 타격 면역은 통각을 없애는 개념이 아니었다. 무한에 가까운 방어력을 선사하는 권한인 것! “뭐야. 여기선 죽는 게 힘든 수준인데?” 하위 차원의 난이도가 급격히 하락하는 순간이었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주민성은 있던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텐트를 폈다. 몸을 지킬 무기라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완성!” 텐트가 완성되고, 내부엔 쾌적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온도까지 조절된다. “아, 편하다.” 주민성은 인벤토리에 넣어둔 육포를 씹으며 휴식을 만끽했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가 문제군.” 임시 권한의 유지로 안전이 확보된 상황. 이 하위 차원이라는 장소에 고민할 여유가 생겼다. “여긴 대체 뭘까.” 이곳이 게이트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공기가 정확히 게이트였기 때문이다. “이동 원인은 영혼석과 유물의 연동……. 이름이 투혼갑옷이었지?” 주민성은 유물 설명서를 꺼내 천천히 읽었다. 첫장은 유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였다. -유물명: 헤라클레이온 -발견지: 그리스 이라클리오 SS급 게이트 -드랍 몬스터: 블랙 미노타우로스 킹 (변종) -발견팀: 서풍 길드 (다국적) “와. 서풍이구나.” 서풍은 세계를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한 길드였다. 이들의 주요 활동 지역은 지중해 주변. 길드 마스터의 능력 중 하나인 수상전은 서풍 길드를 바다의 최강자로 만들었다. “서풍이라면 믿을 만하지.” 주민성은 서풍 길드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풍 길드 마스터가 한국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서풍과 국내 협회의 사이가 상당히 나빴기 때문이다. “서풍이 신성과 연결되어 있었구나. 어쩐지.” 주민성은 유물의 발견 과정을 즐겁게 상상하곤 설명서를 넘겼다. -유물의 주요 능력 -사용자의 감각 증폭 -능력 사용 한도 5배 증폭 -S급 수준의 방어력 -자동 수복 -외형 변환 (갑옷 형태로 한정) “와…….”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스펙이었다. 특히 능력 사용 한도 증폭은 능력 출력이 부족한 주민성에게 너무나 유용한 옵션이었다. “대박이다. 괜히 200억대가 아니네.” 바깥에선 다시금 괴성이 울려 퍼졌다. 키아아아아! “그럼 저 괴성도 예측한 것보다 훨씬 멀리서 들린다는 말이겠군.” 건물 부가효과로 증폭된 감각. 그리고 유물로 인해 추가로 증폭된 감각은 인간을 초월한 청력을 선사했다. 청력이 이 정도로 증폭되면 다소 예민해질 수도 있었지만, 건물 부가효과는 이런 단점을 상쇄할 정도로 건물주를 보호한다. 즉, 잘 듣되 귀는 아프지 않은 상태라는 뜻. “좋아. 성능은 완벽하고. 다음 장은 뭐지?” 설명서는 끝나지 않았다. 뒷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사항 -유물을 80시간 이상 착용할 시 광증에 빠짐 -유물은 이틀 이하로 착용할 것 -사용 이후 일주일 이상 휴식을 취할 것을 권장 -테스터 등급: SS (광증에 의한 돌연사) “…….” 테스터 등급 SS. 이 유물은 SS급 능력자가 착용하고 80시간 후 광증에 빠졌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테스터인 SS급 능력자는 사망했다. “미친.” A급과 FFF급 사이엔 무려 다섯 등급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SS급과 A급 사이엔 S, SS급 두 개. 유물의 착용 제한시간은 이틀 이하인 40시간 근처로 권장된다. 즉, FFF급에겐 1시간의 유물 착용도 상당히 위험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일단 벗자.” 주민성은 서둘러 유물을 벗어 던졌다. 아니, 벗어 던지려 했다. “…….” 황당하게도 투혼 갑옷은 벗겨지지 않았다. “착용 해제! 탈착! 수납!” [소유물의 수납이 불가능합니다.] [소유물이 영혼석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소유물이 하위 차원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아. 망했다. 헤헤헤.” 주민성은 아직 미치지 않았지만,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착용 이후 80시간까지 버티는 건 SS급 능력자. 그리고 보통 유물을 구매하기 시작하는 능력자 등급은 최소 A급 이상. 그런 능력자도 착용 후 이틀을 넘기면 안 되는 유물이 바로 투혼 갑옷이었다. “이런 걸 FFF급이 입어 버렸네? 헤헤.” 동시에, 자신이 하위 차원에 온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되기 시작했다. “이런 저주받은 갑옷이, 나를 저주하던 몬스터와 힘을 합쳤네? 헤헷.” 사용자를 미치게 만드는 유물. 이 유물을 얻기 위해선 보스 몬스터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블랙 미노타우로스 킹은 서풍 길드를 저주하며 죽었을 게 분명하다. “우와. 얘도 블랙이다. 하하.” 다크오크는 보통의 오크가 모종의 이유로 흑화한 결과였다. 그리고 블랙 미노타우로스 킹 역시 변종이라는 표기가 되어있었다. 왠지 상황이 너무 잘 들어맞았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 “타격 면역이니까 통째로 부술……. 아, 이거 자동 수복이지.” 심지어 이 유물은 완파라는 개념이 없었다. 자동으로 수복되는 미친 갑옷이었다. “와. 진짜 망했는데?” 허탈함이 극에 달하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주민성은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입에 물고 있던 육포는 흙바닥에 기부한 지 오래. 주민성은 잠시 내려뒀던 생존 욕구를 주워 담았다. “이제 자리 좀 잡을 것 같았는데…….” 그리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정신 차리자. 주민성. 이대로 무적의 미친놈이 될 순 없어.” 주민성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 이번 임시 권한이 메인은 아니었지.” 주민성은 임시 권한을 얻기 전, 확실하게 얻은 보상을 떠올렸다. [고대 등급의 건물이 해금됩니다.] [이제부터 고대 등급의 건물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전설 등급의 건물이 해금됩니다.] [이제부터 전설 등급의 건물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신화 등급의 건물이 해금됩니다.] [이제부터 전설 등급의 건물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건물! 건물은 답을 알고 있을 거다!” 주민성은 언제나 건물에서 답을 찾아왔다. 콩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크룩스도 마찬가지. 여태까지의 해답은 하급 이하의 건물이었다. “새로운 등급! 건물! 문명! 생명체!” 주민성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일단은 단서부터. 주변에 생명체라곤 언덕 너머의 괴생명체뿐. 놈은 몬스터일 확률이 높아.” 놈은 분명 공손한 인사를 건네고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몬스터는 아닐 터.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포악함은. 보이면 죽인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그런 괴물이 농사를 지으며 밥을 해 먹지는 않겠지.” 놈은 포식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포식자가 있다면 피식자도 존재한다. 주민성이 주목하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피식자를 찾아야 해. 적어도 문명을 이룬 피식자를.” 문명이 존재한다면 건물도 존재한다. 당연한 이치였다. “괴성은 하나뿐. 놈은 분명하게 억제되고 있다.” 주민성은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임시 권한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쿵! 건물 잔해로 새끼발가락을 찍어 임시 권한을 다시 한번 검증했다. “응. 안 아프네. 좋아.” 유물의 걸린 저주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내느냐, 시간 초과로 미쳐 버리느냐. 이젠 시간과의 싸움이다. “읏차!” 주민성은 망설임 없이 텐트 위로 올라갔다. “음. 튼튼하군.” 건물 부가효과를 받은 텐트는 힘껏 누르건 밟건 무너질 일이 없었다. 건물 잔해도 버티는 수준이었으니까. “스읍. 후우.” 심호흡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일단 입은 유물은 최대한 써먹자.” 정신을 집중해 유물의 새로운 형태를 상상했다. ‘외형 변환.’ 철그럭! 집중을 이어가자 투혼갑옷이 반응했다. 츠츠츠츳! 어느새 흐물흐물해진 갑옷은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조금만 더.’ 이윽고 투혼 갑옷이 얼굴을 덮었다. ‘숨은 쉴 수 있게.’ 츠츳! ‘그리고 전신을 덮는 갑옷으로.’ 츠츠츠츠! 주민성이 떠올린 건 전신을 뒤덮는 풀 플레이트 아머와 비슷했다. 철그럭! “후우.” 외형 변환은 성공적이었다. 철걱! 철걱! 유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주민성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편함은 없는지 체크했다. “좋긴 좋네.” 투혼 갑옷은 상당히 좋은 착용감을 선사했다. 과장 없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과 똑같았다. “읏차.” 주민성은 그대로 텐트 위에 주저앉아 언덕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읊조렸다. “건물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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