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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2)2022.01.05.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지금 묻고 있잖아요.” “그, 그건!” 주민성은 쉴 새 없이 점원을 갈구며 그동안 묵은 체증을 해소하고 있었다. “해당 제품은 전량 리콜 요청하겠습니다!” “흐음…….” 그러는 와중에도 주민성은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점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은 매장 입구 쪽. ‘누군가의 지원을 기다리는 건가.’ 전력은 누가 봐도 주민성측이 압도적이었다. 매장 안에 있던, 대충 봐도 강해 보이는 능력자들조차 주춤할 정도였으니까. “매장에 대놓고 저러면 좀 빡센데.” “야. 빼박 A급 이상이야. 일단 피하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사실은 점원의 다른 얼굴을 알고 있는 데다 건물 부가효과로 귀까지 밝은 주민성만이 눈치채고 있었다. ‘A급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자라.’ 필사적으로 빌고 있는 점원의 눈빛은 절대 죽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마냥. 이럴 때 중요한 건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최대한 뜯어내고 내빼야겠다.’ 처음부터 진상이 될 속셈으로 입장한 매장이었다. 때문에 주민성에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전량 리콜은 알아서 하시고요. 여기 사장 연락처 좀 주세요.” “고, 고객님! 그건 정말 곤란해요!” “저는 괜찮아요. 사양하지 마세요.” “아아…….” 주민성은 말없이 점원을 응시했다. ‘사장의 지원을 기다리는 건 아니네.’ 절박해 보이는 점원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했다. 복수할 생각조차 사라지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대충 양산형 장비들만 사서 나갈까…….’ 100만 원이 넘는 손해를 입힌 매장이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장비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성에게는 고블린 라이더라는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성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점원의 제품 소개가 시작되었다. “이 제품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민성이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예전에 구매 엄두조차 못 냈던 고가의 장비들만 진열된 장소였다. “이 충전식 입자 절단기는 어떠세요? 평범한 B급 게이트의 몬스터들은 전부 일격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흠.” 주민성은 점원의 소개를 뒤로하고 제품부터 살폈다. -made in korea 높은 가격대답게 코라에같은 장난식 문구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좋은 무기군.’ 그리고 가격대 또한 매우 높았다. -8000만 원 “가격이 저렴한 대신 마력 충전 비용이 조금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8000만 원짜리 무기는 저렴한 가격이라는 소개가 덧붙여져 있었다. B급 게이트에서 얻는 수익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흠.” 평소 같으면 바로 다른 제품부터 살폈겠지만, 지금의 주민성은 입자 절단기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이게 있으면 건축 자재 걱정은 없겠는데?’ 인벤토리 안엔 막대한 양의 건물 잔해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절단기를 이용해 잔해의 크기나 모양까지 가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좋네요. 충전기는 얼마예요? 따로 챙기고 싶은데.” “네? 충전기를요? 충전기는 마석을 소모해서 상당히 가성비가 나쁜 편인데……. 간단하게 협회에서 정산하거나 지정된 매장에서도 충전할 수 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그러면 사장님 불러 주실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주민성은 점원에게 조금의 주도권도 허용하지 않았다. 예전에 무시 받았던 만큼, 철저히 점원을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 충전기는…….” 그때, 입구 근처에서 중년 남성의 호통이 들려왔다. “뭐야? 매장에 왜 손님이 없어? 김 대리! 어디야!” 대답은 주민성의 곁에서 들려왔다. “저, 점장님! 여기입니다!” “음?” 중년의 정체는 이 매장의 점장이었다. 그의 시선이 주민성 일행을 빠르게 스캔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귀한 손님이 와 계셨군요!” 점장의 급격한 태도 변화는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주민성에겐 큰 기회였다. “아, 점장님이셨군요. 잠시 여기 좀 봐 주시겠어요? 점원 교육 상태가 영…….” 주민성의 핀잔에 점장이 크게 분노했다. “김 대리이이!” “히익!” 눈으로 욕한다는 건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점장의 기세에 점원은 순식간에 물러섰고, 점장이 싹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주민성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점원이 아직 일반인이라서요…….” “아, 네.” 일반인보다 못한 위치. FFF급 능력자의 위상이 이 정도였다. 단지 눈앞의 화려한 남자가 주민성이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뿐. “확실히 저는 이 매장에서 큰 손해를 봤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점원이 멀리 떨어진 것은 오히려 기회였다. 권한이 좀 더 많은 점장이라면 이 매장에서 봤던 손해를 메꾸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예전에 여기서 구매한 무기와 방어구를 전부 날려먹었어요. 제품에 대한 소개도 제대로 듣지 못했고요.” “그럴수가……! 정말 죄송합니다!” 주민성의 목적은 확실했다. 입자 절단기를 잔뜩 흥정할 속셈이었다. “입자 절단기가 필요하긴 한데……. 또 날려먹을까 걱정이에요. 몬스터라고 가만히 맞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 그렇지요? 하하…….” “역시 그냥 신성 쪽 매장을 가야하나…….” 주민성에게는 또 다른 허세 카드가 있었다. 바로 VVVIP용 골드 카드였다. 이 카드는 점장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허업! 큰 고객님이셨군요……!” 괜히 점장이 아니었는지 카드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는 모양. “오늘은 그냥 따지고 싶어서 왔습니다. 물건이야 뭐 다른 데서 사도 괜찮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따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시다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런가요? 저는 입자 절단기 말고는 흥미가 없는데.” 예감이 아주 좋다. 주민성은 점장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폈다. “드리겠습니다!” “……예?” “그냥 드릴 테니 직원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노린 것은 단순 흥정이었지만, 놀랍게도 100% 할인이라는 터무니 없는 결과가 나왔다. “설마 충전기도요?” “다, 당연하지요! 하하하하하!” 골드 카드의 위력은 엄청났다. 정확히는 신성 VVVIP의 뒤끝이 두려운 모양. 주민성은 이를 거절할 정도로 속 편한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으로 점원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 다른 분들도 마음에 드는 물건 한 개씩 골라 주시지요!” 점장의 호의는 엄청났다. 최선아와 운전기사에게까지 호의를 베푼 것. 정계에 진입한다면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오를 만한 배포였다. “호의니까 거절하지 말죠. 이것으로 전에 있던 일도 없던 일로 합시다.” 주민성은 최선아와 운전 기사에게 윙크하며 호응할 것을 재촉했다. “……네.” “감사합니다.” 최선아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나 운전기사는 정말 깔끔하게 주민성의 연기에 호응했다. “저는 이것이면 됩니다.” 운전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5천만 원 상당의 능력 감지 기능이 있는 팔찌를 집었다. “저는 이거요…….” 최선아의 선택은 500만 원짜리 마비 독 카트리지. 기존 장비와 호환되는 소모품이었다. “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충전기는 카운터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점장을 따라 카운터에 도착한 주민성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단순 가구가 아니었군요.” “하하. 충전기는 처음 보신 모양이군요. 서울에도 몇 없는 귀중한 충전기입니다.” “오호.” 충전기의 크기는 상당했지만, 건물 잔해도 아무렇지 않게 수납하는 주민성에겐 문제되지 않는다. “이건 어디로 배송해 드릴…….” “감사합니다.” [인벤토리에 특수 충전기가 수납됩니다.] “점장님의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여기 명함도 받아 주십시오!” “예.” 허무하리만큼 빠른 행동력이었다. “자, 이제 병원으로 가죠. 선아 씨도 얼른 타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당연하죠.” 주민성이 리무진에 오르고, 매장 안에선 고성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 * * “김 대리이이!” “예! 점장님!” “너 미쳤어! 지금 무슨 실수를 한 건지 아냐고!” 김대리는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 무기에 문제가 있다며…….” “닥쳐! 방금 손님은 신성 VVVIP다! 알고 있어?” “모, 몰랐어요!” 신성은 협회와 유명 길드 몇몇과 더불어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괴물 집단 중 하나였다. 특히 기업으로서의 신성의 존재감은 독보적. “젠장! 절대 자극하면 안 되는 상대를 건드리다니!” “저는 정말 몰랐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징계 받을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다.” “점장님!” 점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점원에게 훈수했다. “이번 기회에 잘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신성 쪽 사람은 절대 자신의 정체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 “헉…….” 점원의 열띤 반응에 의기양양해진 점장이 말을 이었다. “방금의 경우도, VVVIP 곁에 있던 사람들이 더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 그래서 장비를 무료로 주신 건가요?” “그래. 너도 능력자로 각성하고 나면 이들의 진면목을 알게 될 거다. 그러니까 제발 돈 좀 모아라!” “아, 알겠습니다……. 그보다 점장님.” 점원은 점장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말했다. “저, 그것도 모르고 긴급 콜 S급으로 조치를 해 버렸는데요…….” “아……. 젠장.” 긴급 콜. 매장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본적으로 취하는 조치였다. 긴급 콜의 선택 등급에 따라 협회측에서 그에 맞는 능력자를 파견보내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점원이 누른 버튼은 S. “젠장! S급이 온다고?” “저, 저는 지침대로 조치했는데…….” 그와 동시에. 한 남자가 매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십…….” 점장의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남자의 견장은 붉은색. 협회 소속의 S급 능력자라는 표식이었다. “무슨 문제지? 감시카메라상으론 A급 능력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던데.” “헉! 그, 그게!” S급 능력자는 말없이 바닥에 손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3명. 능력 사용은……. 음?” “아무 일 없었습니다! 저희 직원이 당황한 나머지 S콜 버튼을 눌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능력자는 천천히 눈을 뜨며 점장을 노려봤다. “충전기 앞. 매장 안에서 능력을 사용한 사람이 있었군.” “아, 예! 그렇습니다! 충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절도인가? 그렇다면 즉시 추적팀을 파견하겠다.”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점장은 정신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 손님은 신성의 VVVIP였다?” “그렇습니다!” “신성이라……. 확실히 곤란하군.” “다행히 제 선에서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능력자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아니. 내가 본 능력은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었다. 물건을 통째로 어딘가로 전송했을 가능성이 있어. 밀수 또한 가능하겠군.” “허억…….” “제보에 감사한다. 문제된 능력에 대해선 건의하지.” “그, 그것만은…….” 협회와 신성의 갈등은 고래 싸움이나 마찬가지. 사이에 끼어있는 매장 입장에선 온갖 불이익이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능력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화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오로지 대답뿐. “예. 예. 알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되고, 능력자는 점장과 점원을 응시했다. “두 분. 잠시 협회에 가 주셔야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밀 사항입니다.” “어, 어째서…….” “설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따라오십시오.” 단 몇 마디 통화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길어도 하루면 끝나니 출발하시지요.” “저, 정말입니까?” “예. 대화에 협조적으로 응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점원과 점장을 협회로 보낸 능력자는 그대로 매장의 잠금장치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3명의 능력자가 가져간 물품을 조사했다. “입자 절단기, 마비 독 카트리지, 능력 감응 팔찌…….” 전부 은밀한 작전에 사용되는 물건들뿐. 그리고 상대는 신성의 VVVIP와 신원 미상의 2인. “임진석이 직접 관여하다니. 이건 대체…….” 능력자는 한숨을 쉬며 임진석의 합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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