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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식구들 (3) (23/250)

또 다른 식구들 (3)2021.12.24.

지금의 상황은 개판이라는 말이 정확했다. 본성이 깨어난 몬스터들의 공세에 판자촌은 무너져 내렸고, 능력자들은 전부 데빌도그의 앞발에 깔려 반항조차 못 하고 있었다. ‘정말 능력자들이 맞긴 한 건가?’ 이들이 아무리 약하다 하더라도 고블린이나 데빌도그는 충분히 사냥하고도 남을터. “견뎌라! 저항하지 말고 견뎌라!” 리더로 보이는 남자 또한 그랬다. 범상치 않은 단련된 근육과 확신에 찬 눈빛. 누가 봐도 강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크윽! 아무리 봐도 고블린입니다!” “속지 마라! 그것이 괴물의 노림수다!” “…….” 이들의 무저항엔 주민성도 모르는 사연이 존재했다. 주민성은 진작 기절한 노인을 바라봤다. “끄극……. 미안하다……. 미안해!” 노인은 악몽을 꾸는것처럼 누군가에게 끝없이 사과를 반복했다. “아, 미치겠네.” “민성 씨.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을까요?” “…….”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만큼 솟구쳤지만, 주민성은 부가효과 중 하나인 정신적 안정감을 통해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수습해야겠죠.” “맞아요. 두 명만 잡으면 되는데 일을 너무 키웠어요.” “아오.” “네?” “……아닙니다.” 주민성이 정신 수양을 하는 사이, 철판남은 맨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망했어……. 우린 망했다고……. 이게 무슨…….” 바라보고 있는 것은 더 이상 판자촌이 아니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박살 난 폐허였다.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한 정착이었는데……!” 고블린에게 생포된 능력자들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그것보다 선아 씨.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선아 씨 F급 아니었어요?” 판자촌은 주민성이 오기 전부터 무난한 난장판이었다. 난장판을 만든 범인이 최선아라고 믿기 힘들 정도. “맞아요. 전부 민성 씨 덕분이에요!” “제 덕분이라고요?” “네! 보세요. 새로 맞춘 장비예요!” 확실히 최선아의 복장은 이전과 달랐다. 다소 칙칙한 느낌도 들었지만, 폐허에선 나름 트랜디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의상이었다. “이런저런 기능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철컥! 최선아의 손목 보호구가 개방됐다. “이쪽에선 마비 독이 발려있는 볼트가 발사되고요.” 다음은 작은 호스가 달려 있는 팔꿈치 보호구. “여기선 연막을 방출할 수 있어요.” 기능 소개는 한두 가지로 끝이 아니었다. 어깨, 관절, 심지어 발뒤꿈치까지. 별의별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발바닥 면에는 반영구 흡착 능력도 부여되어 있어요. 마석으로 충전할 수 있고, 완충 시엔 무려 두 시간 지속!” 흡사 홈쇼핑 호스트의 제품 소개를 코앞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그 장인이 만든 추적자 세트라고요?” “네. 정확히는 A급이에요!” 최선아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수준. “좋네요.” “그렇죠?” 그럼에도 주민성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부럽지도 않았다. ‘텐트가 훨씬 좋은데? 가성비는 비교할 필요도 없고.’ 주민성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판자촌의 능력자들에게까지 수익을 창출할 계획을. “네. 선아 씨는 저기 가서 손들고 계시구요.” “갑자기요?” “당연하죠. 이럴 거면 저한테 제대로 연락을 하셨어야지. 걱정했잖습니까.” “아, 손들게요…….” 짝! 주민성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동시에, 고블린의 행동도 멈췄다. “주목해 주십시오.” “크윽! 이 괴물!” “사람입니다. 저 모르세요? 꽤 유명할 텐데. 방송도 짱짱하게 나갔고.” 주민성의 대답에 능력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TV 안 봐요?” “흥! 협회의 헛소리를 뭐 하러 봐!” “아, 그건 인정.” 협회에 대한 생각이 같다는 사실. 이것은 작게나마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되었다. 능력자들을 지휘하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군. 당신이 유명인이라 칩시다. 이곳까진 왜 찾아온 거요? 우린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들일 텐데?” “…….” 사회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본인이 쉽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대상이 자신이라면 더더욱. 주민성은 판자촌의 능력자들에게 때 아닌 동질감을 느꼈다. “……저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 민성 씨!” “손 똑바로 드세요.” “네…….” 최선아를 노려보던 남자는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내뱉었다. “그 동료가 저 여자고?” “네. 공격은 그쪽에서 먼저 했습니다.”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당연히.” 이런 상황에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다 잡은 물고기였으니까. “제 동료를 공격하신 분은 누굽니까?” “…….” 주변엔 적막이 흘렀다. “자수하지 않네요.” “……뭐. 당연하겠지. 아가씨가 직접…….” 주민성은 말없이 능력자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쿠궁! “히익!” “주황머리. 너는 내가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하는데, 왜 자수를 안 할까?” 주황색으로 염색한 머리의 남자는 최선아에게 쫓기던 남자였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줬는데?” 주황머리 남자의 바로 뒤편엔 거대한 건물 잔해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 자초지종부터 털어 보자. 너 말고 고블린 공격한 놈 또 있을 텐데?” “저, 저기에요!” “…….” 남자가 가리킨 건 최선아에게 붙여 뒀던 고블린 라이더였다. 주민성과 눈이 마주친 고블린 라이더는 곧장 한 남자를 들어올렸다. “키엑!” “끄으으…….” 상의를 입지 않고 있는 남자였다. “쟤는 왜 자수 안 하는 거야?” 답변은 최선아에게 나왔다. “저놈은 제가 잡아 놨어요! 아직 마비 안 풀렸을걸요?” “네. 손은 내리지 마시고.” “흑…….” 황당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최선아가 알아서 처리했을 상황이었다. 주민성은 최대한 인내심을 끌어올리고 염색남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저는 그저 판자촌에 귀환하던 길이었습니다! 이상한 고블린에게 붙잡혀있는 여자가 있길래 총으로 쏴서 도와줬을 뿐이에요!” “이상하다니! 귀여운 고블린이겠지!” “선아 씨는 말하지 마세요.” “흑.” 머리가 지끈거려 왔지만, 설명은 끝까지 들어야했다. “총알은 확실히 명중했어요. 그런데 고블린이 죽지 않지 뭡니까? 말이 되냐고요! 제 능력이 회전력 강화라고요!” “등급은?” “D요…….” “그러니까 안 죽었겠지.” “아, 아닌데……. 무조건 죽어야 정상인데…….” 남자의 공격 패턴은 총알의 회전력을 증폭시키는 형태. 폐건물에 남아 있던 흔적은 엄청났었다. ‘확실히 고블린이 버틸 수준은 아닌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첫발은 맞췄는데, 두 번째부터 다 피하더라고요.” “고블린이 총알 피하는 소리 하네.” “진짜라니까요? 날린 총알 값만 200만 원 어치가 넘어요!” “그건 명중률 문제가 아닐까?” “크흑!” 염색남은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제 친구는 C급이에요! 그것도 발화계!” 고블린이 입었던 화상의 정체까지 밝혀졌다. “고블린이 반격해 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제 친구도 전력으로 맞서 싸웠죠!” “너가 잘못했네.” “왜요! 능력자가 몬스터 사냥하는 게 잘못이냐고요!” 주민성은 말없이 건물 잔해를 쓰다듬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내 동료는 왜 공격한 거야? 겪어 봤으면 알 텐데? 가속계 능력자인 걸?” “엄연히 선제공격 받은 건 저예요! 정당방위였다고요!” 총은 먼저 쐈지만 몬스터가 타겟이었다. 능력자 간의 선제공격은 최선아였다. 이것이 염색남의 주장이었다. “확실히 일리는 있군.” “그렇죠?” 이에 최선아의 표정이 똥 씹은 것마냥 일그러졌다. ‘사고방식이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럼에도 최선아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처신 한 번 잘못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게 F급 능력자의 현실이었으니까. “선아 씨. 발언권 필요해요?” “네.” “말해 보세요.” “일단 제 수첩부터 확인해 주세요.” “…….” 주민성은 최선아가 건넨 수첩을 펼쳤다. “읽어보면 이해하실 거예요.” “음.” 수첩에 적혀 있는 글은 주민성조차 경악할 만한 내용이었다. [장기 이용자는 추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호위 서비스의 이용이 가능합니다.] [건물주 휘하 직원에게만 신청할 수 있습니다.] [호위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이용료는 한 개체당 200만원 입니다.] [호위 개체는 장기 이용자의 능력을 공유합니다.] “이게……. 진짜예요?” “네.” 주민성이 경악한 부분은 능력 공유에 있었다. 능력을 사용하는 몬스터. 이는 크룩스를 통해 직접 겪어 봤었다. ‘가속 능력을 사용하는 고블린……. 그것도 라이더.’ 고블린은 둘째 치더라도, 데빌도그는 쉽사리 놓칠 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주민성은 데빌도그의 돌진을 수차례나 맞아 봤으니까. ‘그 돌진에 가속력까지 더해진다라…….’ 그 정도면 기차에 치이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어설픈 방어구쯤은 한방에 박살내는 이빨까지. 심지어 데빌도그에 탑승한 고블린의 공격이 더해진다면? 이는 방어계 능력자가 아닌 이상 손조차 섞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린다. ‘미쳤네.’ 미친 수준의 고블린 라이더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다섯 마리씩이나. 주민성은 부상당했던 고블린을 바라봤다. “키에엑!” 고블린은 이제 완전히 회복했는지 노골적으로 가속 능력을 발동하고 있었다. “블랑이 귀엽죠?” “아, 조금은 귀여워졌을지도…….” 능력자 고블린이 늘어나는 건 주민성으로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어차피 고블린은 주민성의 부하였으니까. 심지어 이 관계는 변할 일도 없었다. 인간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판자촌 리더가 말했다. “듣자하니, 우리 측의 잘못이 아닌 걸로 보이는데.” “맞아요! 풀어 주세요!” 한 여중생이 동의를 표하자, 다른 사람들도 빠르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옳소! 옳소!” 안타깝게도, 주민성에겐 강압적인 수단도 있었다. “크룩스.” “크룩!” 한때 주민성을 기묘한 공포에 몰아넣었던 괴성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아!” “크윽!”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고,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는 판자촌 리더가 힘겹게 말했다. “그만해 주십시오! 비슷한 처지끼리!” “비슷한 처지?” “당신이 직접 유명하다고 했잖습니까? 우리처럼 언론플레이라도 당했겠지. 그것도 대대적으로.” 주민성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확실히……. 판자촌의 능력자들에 대해선 뉴스를 통해서만 알고 있었어.’ 만약 이들이 주민성과 비슷한 피해자라면, 복수의 대상도 같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협회에 대한 시각도 일치했다. “……당신들.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었습니까?” “당신도 알 텐데? 협회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하. 크룩스. 전부 풀어 줘.” “크룩!” ‘오직 나만이 불행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빠진 탓이었을까, 그제야 주민성은 자신이 생각의 폭이 좁아진 상태였음을 체감했다. “얘기나 좀 들읍시다. 선아 씨. 먹을 거 있죠?” “네! 많아요! 나눠줄까요?” “네.” 최선아의 배낭에서 온갖 먹거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라, 라면!” “햄버거도 있어!” 평범한 편의점 식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판자촌의 능력자들이 크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는 능력자까지 등장했다. “으엉! 김치가 먹고 싶었어!” “…….” 오랫동안 음식 구경도 못 해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드세요.” “저, 정말 먹어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 조건?” 최선아의 수첩 덕분에 쓸 만한 아이템이 떠오른 데다, 저마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능력자들까지 갖춰졌다. 이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주민성은 상대의 형편에 맞게 수익을 만들 계획을 떠올렸다. “먹고, 거주 장소 좀 옮깁시다.” “……예?” “말 그대롭니다. 저도 이 게이트에 살거든요.” “저, 정말입니까? 그런데도 이런 귀한 음식들을?” 주민성은 김밥 한 줄을 받아 들고 말했다. “고민할 시간은 드리지 않습니다. 먹으면 바로 이동할 계획이구요, 안 먹으면 저희만 물러납니다.” “자, 잠시! 상의가 필요합니다.” “아뇨. 손만 드세요. 주도권은 제 겁니다.” “크윽!” 판자촌의 능력자들은 이미 음식에 눈이 돌아간 상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먹을게요! 먹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들었어요!” “저는 볶음 김치면 됩니다!” 결과는 전원 거수. 활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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