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마다의 사정 (2) (20/250)

저마다의 사정 (2)2021.12.21.

신우빈과 임진석 그리고 최선아의 기묘한 대치가 펼쳐졌다. “이렇게 야심한 밤에 게이트에 입장하겠다고?” “…….” 신우빈은 도무지 최선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출입 일지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F급 가속계. 서포트 계열도 아니군. 시야가 제한되는 밤중엔 특히 더 위험할 텐데?” “제가 광원 장비를 구매했거든요! 빠, 빨리 테스트해 보고 싶어서…….” “아, 서민은 그럴 수 있지. 워낙 없이 사니까.” “…….” 기묘한 대화 사이에서도 임진석은 알고 있었다. 경비에게 최면을 걸어 탐색 의뢰를 명령했으니까. 그렇게 합류한 사람이 최선아였다. ‘주민성의 지시가 있었군.’ 그녀가 주민성과 동행한 것도,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최면이 풀려 탈진 증상만 오지 않았다면 은밀히 접근해 주민성과 관련된 정보를 캐낼 생각이기도 했었다. ‘이 여자는 들여보내야 해.’ 그녀가 축적하는 정보량은 누적될수록 좋았다. 최면이 늦어지더라도 지금까지의 실패를 절반의 성공으로 반전시킬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름의 계산을 마친 임진석이 입을 열었다. “차기 대표님. 지금 저 서민의 용무보다 중요한 문제의 해결이 필요합니다. 정보 말소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호.” 신우빈에겐 큰 실권이 없었다. 아직은 후계자였으니까. 경비님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상황이니 차기 대표라는 호칭이 적절했다. 더불어, 최선아에게 신우빈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줄 의도이기도 했다. 이 사실은 주민성 귀에도 들어갈 터. “확실히 중요하긴 하지. SS급 능력자가 아무런 용무 없이 이깟 F급 게이트에 방문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게 무슨!” “너도 방금 말했지? 차기 대표님이라고.” “……!” 나름의 계산속에서 정해진 호칭은, 도리어 임진석의 발목을 옭아맸다. 그리고 이 상황은, 최선아의 눈을 핑핑 돌게 했다. “SS급 능력자……!” “그래. 이 남자는 SS급 능력자다. 더 알려 줄까?” “아, 안 됩니다!” 신우빈의 심계는 비범했다. 망나니는 겉모습일 뿐. ‘신성은 신성인가. 제기랄!’ 나름의 작전을 세웠지만, 임진석은 두뇌파가 아니었다. 그의 본질은 행동파. 뭐든지 갈라 버리는 절단 능력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능력자 협회장밖에 없었다. 임진석의 기이할 정도의 충성심은 회장의 압도적인 힘에서 기인했다. ‘회장님은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터.’ 임진석은 고민을 그만뒀다. “……그만하시죠.” “왜? 싫은데?” “……요구사항은 저와 관련된 정보의 소거.” “싫다니까?” “요구 거절 시 제가 직접 소거하겠습니다.” “…….” 임진석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회장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 심산이었다. ‘한 번 정도는 가능하겠지. 내 심장도 멈추겠지만.’ 임진석의 과감한 도박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눈치 빠른 신우빈 조차 임진석이 탈진 상태인 걸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알고 있는 탈진 증상은 내부가 진탕되어 피를 토하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신우빈은 임진석이 기밀 임무 중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역공을 당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제법이네.” 철컥! “도련님!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임진석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신우빈의 부하로 보이는 능력자가 난입해 왔다. 신성 후계자의 직속 호위라면 최소 S급 이상. 그런데도 임진석의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절단 능력은 SSS급 능력자조차 쉽게 막지 못하는 능력이었다. “……물러나 주시죠. 이건 상호 관계에 어긋납니다.” “정보의 소거를 요구합니다.” “그건 도련님께서 정할 일입니다. 그쪽이 정하는 게 아니고요.”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최선아는 실제로 숨이 막히고 있었다. 지금 같은 끔찍한 살기는 처음 겪는 수준이었다. 털썩! 어쩔 줄 몰라 하던 다른 경비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뭐지? 분명 의뢰는 F급 가속계로 명령했을 텐데?’ 임진석은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최선아가 신기했다. 이 역시 주민성과 관련이 있으리라. “아, 됐어. 그만하지.” 상황을 마무리 지은 사람은 신우빈이었다. 그는 목걸이 덕분에 아무런 압박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정보는 소거. 증인은 어쩔까. 다 죽일까?” “…….” 유약해 보이는 경비야 협회 소속이니 문제 될 일 없었고, 최선아는 나중을 위해 살려 보내는 쪽이 임진석에게도 이득이었다. “저와 관련된 정보만 소거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지. 대충 기운도 차린 것 같은데 이제 좀 꺼져.” “……예. 수고하십시오…….” 임진석이 나중을 기약하며 물러가고,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경비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구둣발로 기절한 경비병을 치워낸 신우빈은 임진석이 기대던 소파에 앉아 미소 지었다. “국내 협회가 괜히 최강이 아니었구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위험하셨습니다.” “술이나 갖다 줘. 오늘은 한 병만 먹어야겠네.” “여기 있습니다.” “땡큐.” 신우빈은 모처럼 겪은 짜릿한 자극에 입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내일은 더 재미있겠군. 아버지 말씀대로야.” “무엇을…… 말입니까?” “몰라도 돼. 점심까지 능력자들이나 모아 줘. 계열사도 상관없으니까 A급들로.” “예.” 경비실 구석엔 최선아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뭘 봐?” “네? 아…….” “일지도 내가 적으리?” “아뇨! 제가 적을게요!” 경비원의 업무인 출입 일지 작성은 최선아의 몫이었다. “그, 그럼 수고하세요!” “야. 잠깐만.” “네?” “술안주 괜찮은 거 없냐?” “네? 아, 네! 많아요! 여기요!” 신우빈은 최선아의 배낭에서 눈에 띄는 과자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 “오. 우리 회사 신제품이네?” 신우빈의 선택은 참치맛 과자였다. “보는 눈은 있군. 이제 가 봐.”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다시 붙잡힐세라, 최선아는 가속 능력까지 사용해 최대한의 속도로 경비실을 빠져나갔다. “그냥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응. 임진석이 쟤 일부러 살리던데? 뭔가 있겠지.” “쫓을까요?” “가속 능력자던데?” “상관없습니다. 제가 더 빠릅니다.” 신우빈은 과자를 입에 넣고 잠시 고민했다. “아니야. 임진석이 저렇게 피 토할 정도면 개고생할 게 분명해. 능력자들 준비만 확실히 해.” “예.” 신우빈은 후계자를 위한 특별한 교육들을 섭렵했다. 타고난 재능 또한 탁월했다. 재벌가 회장의 유전자 덕분에 사람 보는 안목은 당연했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줄타기에도 유독 강했다. 인류의 천적 같은 남자였다. “사람이 목숨을 걸면 눈빛이 바뀐다더라?” “예.” “최근 일주일간 그 눈빛을 네 번이나 봤어. 여태껏 한 번도 못 본 그 눈빛을.” “그렇습니까?” 신우빈은 미소 지으며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처음에는 주민성이었지.” “FFF급 능력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버지가 말했거든. 그런 눈빛을 보거든 빚부터 안겨 주래. 이유는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그렇겠지요.” “그래서 나름 빚을 지워 줬지. 그런데 임진석도 그런 눈빛을 하더라.” “그래서 무례를 용서하셨군요. 그런데……. 임진석이면 두 번째 아닙니까?” “맞아. 세 번째는 방금 나간 여자고.” “아…….” 신우빈은 잠시 눈을 감으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네 번째는 너다. 다시 봤어.” “가, 감사합니다…….” “하여튼, 내일은 바쁠 거다. 제대로 자 둬.” “예…….” 신우빈은 과자 네 조각을 탁자에 올려 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 * 한편, 최선아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블링아! 블랑아!” 주민성이 텐트를 설치해 둔 지점까지 도착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블롱아! 블룽아! 블렁아!” “키에?” “찾았다!” 최선아가 애타게 찾고 있던 건 고블린 라이더 다섯 마리였다. “키에엑! 키엑!” “많이 기다렸지? 어디 있다가 이제 왔어! 한참 찾았네!” “키엑! 키에에엑!” 고블린들은 텐트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 거기 뭐 있어?” “키엑!” 최선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주민성의 텐트를 살폈다. “헉! 이게 다 뭐야?” “키에엑!” 놀랍게도 텐트 내부는 마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석? 나 주는 거야?” “키엑!” “아니야! 너희들이 모은 거잖아! 민성 씨 주거나, 너희들 가져.” 최선아는 진심으로 마석을 양보하고 있었다. 이번 정산으로 장비까지 최상급으로 맞춘 데다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동생의 한 달분 병원비까지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엑!” “안 돼! 횡령은 나쁜 거야. 떽!” “키엑…….” “아이, 귀여워!” “키에엑…….” “그보다, 텐트는 아예 조립해서 가져가는 게 좋겠네.” 최선아는 경비실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걸 직접 목격했다. “SS급 능력자라고 했었지? 민성 씨를 노리던 사람이 분명해. 협회 간부였고 말이지.” 최선아는 자신의 역할인 정찰을 확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은……. 신성 그룹과 관련된 사람 같은데……. 경비를 왜 하는 거지?” 신성 그룹. 능력자들에겐 꿈의 직장이었다. 게이트 활동을 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연봉을 안겨 주는 세계 최고의 대기업이기도 했다. 특히,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도 전투를 선호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민성 씨와 관련된 일이니까. 헉, 민성 씨가 SSS급인 걸 눈치 챈 걸까? 어쩌지?” “키엑?” 최선아의 호들갑은 고블린들조차 움찔할 정도. “민성 씨라면 당연히 신성에서도 한자리할 텐데. 어…… 그러면 나는 다시 백수인가?” “키엑!” 최선아가 이런 거금을 만진 건 절대적으로 주민성 덕분이었다. “재, 재벌 그룹은 암투도 엄청 심하다던데? 그러면 위험해지는 거 아냐?” “키엑!” “아니면 민성 씨가 처음부터 재벌가 사람이었던가?” “키엑…….”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고블린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키엑!” “키키엑!” 오도독! “응? 너희들 뭐 해?” “키엑!” 지루함을 참지 못하던 고블린들이 마석을 입에 넣은 것이다. “어라? 너희도 마석 먹어? 콩이만 먹는 줄 알았는데.” “키엑!” 고블린들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블링이. 내 눈 똑바로 봐.” “키익?” “너희들, 뭐 잘못한 거 있어?” “키이익!” 최선아가 이름을 지어준 고블린, 블링이의 마석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응? 마석 때문에 그래?” “키익!” “괜찮아. 민성 씨였으면 모를까, 나는 너희들한테 뭐라고 안 해.” “키익!” “진짜라니까? 대신, 너희들이 직접 얻은 것만 먹어야 한다?” “키이익!” “그래. 착하다.” 최선아는 자신을 호위하던 고블린 라이더들에게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아, 민성 씨한테 이것도 알려드려야 하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었다. 데빌도그에 올라타 쫄래쫄래 따라오는 고블린들이 귀여웠다. 이는 고블린들에게 공격받을 일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속계 능력자에게 고블린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다 포기하는 몬스터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고블린들이 자신을 지켜주는 행동은 최선아에게도 큰 반전으로 다가왔고, 가족이라곤 동생밖에 없었던 최선아에게 위안이 되었다. “이번엔 내용도 확실히 기억해서 적어서 다행이야, 뺏기지도 않았고.” 최선아는 소중하게 보관하던 작은 수첩을 꺼냈다. “이것까지 가져가려고 했으면 위험했지…….” 이상하게 카리스마 넘치던 F급 경비원은 과자 한 봉지만을 가져갔었다. 하마터면 목숨까지 걸고 도망쳐야 할 상황이었다. 특히, 경비원 곁에 있던 여자는 누가 봐도 고위 능력자로 보였으니까. 오도독! 오독! “그래.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먹어.” “키엑…….” “아마 이 수첩만 보여 주면 민성 씨도 좋아할 거야.” “키엑!” “그러니까 많이 먹어. 알았지?” “키에엑!” 최선아는 수첩을 펼쳐 빠진 내용이 없는지 살펴봤다. [장기 이용자는 추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호위 서비스의 이용이 가능합니다.] [건물주 휘하 직원에게만 신청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이 메시지를 볼 땐 넘어질 뻔했었지.” “키에엑!” [호위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이용료는 한 개체당 200만 원입니다.] [호위 개체는 장기 이용자의 능력을 공유합니다.] “처, 천만 원은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이젠 장비빨도 있고……. 하하하…….” “키엑!” “너희들도 도와줄 거지?” “키엑! 키에엑!” 고블린들은 텐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알았어. 잘 설명할게.” “키엑!” “마석 다 먹었으면 슬슬 가자. 빨리 가야 해.” 최선아는 수첩을 조심스레 품속에 넣고 능력을 전력으로 전개했다. “출발!” “키에에엑!”

1654884802592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