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마다의 사정 (1) (19/250)

저마다의 사정 (1)2021.12.20.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데빌도그에 올라탄 고블린은 하나같이 매서운 기세를 뿜어 대고 있었으니까. “키에엑!” “크룩!” 수백의 고블린 라이더는 크룩스에게 모종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뭐지?” 크룩스의 손짓 한 번에 고블린 라이더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호기심이 생긴 주민성은 한 고블린 라이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쪽은 안 가 본 곳인데.” 고블린이 무겁지 않은지 데빌도그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고블린 라이더는 한 폐건물로 향했다. “쌍안경을 받아 두길 잘했네.” 최선아의 짐은 전부 챙겨 둔 상태였다. 그녀의 배낭 역시 마석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주민성은 곧장 쌍안경을 꺼내 고블린 라이더가 있던 방향으로 초점을 맞췄다. “어디 보자…….” 건물 안에는 다른 고블린이 숨어 있었다. 흔한 장면이었지만, 내용이 다르다. “갑자기 공격한다고?” 고블린 라이더가 건물에 숨어 있는 고블린을 죽인 것이다. “한 방에?”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석까지?” 고블린이 같은 고블린을 상대로 마석을 뜯어내는 진귀한 장면이 펼쳐졌다. “같은 몬스터끼리 싸운다라…….” 콩이도 그렇고 주민성을 따르는 몬스터는 게이트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했다. “설마 마석까지 먹나?” 주민성은 긴장하며 고블린 라이더를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블린 라이더는 마석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 안 돼. 고블린까지 내 밥줄을…….” 고블린 라이더의 기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굳은 표정으로 마석을 품속에 챙긴 것이다. “오오!” 마석을 챙긴 고블린 라이더는 그대로 학원 건물로 귀환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학원 건물은 콩이가 지키고 있었다. “컹! 컹!” “크룩!” “컹?” 콩이는 크룩스와 모종의 소통을 했고, 고블린 라이더는 무사히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마석은 무사한가?” 걱정 어린 마음에 1층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주민성은 빈손으로 나오는 고블린 라이더를 보고 감탄했다. “설마 보수 재료로 썼나? 진짜로?” 결과적으로 마석은 사라졌지만, 먹지 않고 건물에 양보했다는 과정 자체가 놀라웠다. 고블린 라이더의 작은 행보는 주민성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고블린들한테 잘해 줘야겠군. 다른 녀석도 구경해 볼까?” 구경에 재미가 들린 주민성은 다른 고블린 무리가 있는 장소로 시선을 옮겼다. “어라? 이번엔 멀쩡한 고블린이네?” 이번 고블린 라이더는 다른 고블린을 호위하듯 건물로 데려오고 있었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무슨 차이지?” 신입 고블린은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크룩스를 보며 감격스럽게 소리쳤다. “키에엑!” “크룩!” “키에에엑!” 학원 건물에 귀속되는 건 데빌도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장시간의 구경 결과, 주민성은 작은 차이를 발견했다. “데빌도그는 보이는 족족 우리 편이고, 고블린은 적이랑 아군이 반반이네.” 고블린 파벌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점점 유력해지는 상황. 이상적인 비율이라면 데빌도그와 고블린이 반반이어야만 했다. “고블린들, 교배는 못 시키나?” 데빌도그가 많아질수록 마석 수입이 줄어든다는 생각은, 몬스터간의 번식을 시도해 볼까 하는 기괴한 고민까지 만들어냈다. “분양도 안 되겠지. 내가 철창에 분양되는 게 더 빨라.” 물론 몬스터 분양과 관련해 아무런 법도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몬스터는 인간의 적이었다. “그나저나……. 고블린들이 이렇게 퍼지는데, 아무 소란도 일어나지 않는군.” 주민성이 가장 경계하던, 크룩스를 세뇌시켰던 능력자는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상대가 주변에 없다는 게 확실한 수준. “슬슬 경계나 빡세게 시키고 자야겠네.” 주민성은 하루를 마무리 짓기 위해 1층으로 돌아갔다. * * * 같은 시각. F급 게이트 경비실에 한 남자가 피를 토하며 입장했다. “쿨럭! 크윽…….” “헉! 누, 누구십니까!” 남자가 통과한 출입문은 게이트 방향.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비켜라……. 극비 임무 수행 중이다.” “……예?” 남자가 내민 것은 협회 간부를 상징하는 극상급 마석으로 가공된 배지였다. “허억!” 그리고 배지엔 남자의 등급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SS급 능력자 임진석] “더, 더, 더블 에스!” “내가…… 이곳에 왔다는……. 크윽! 기록은! 전부 지우도록……!” “예?” F급 게이트의 경비원이 살면서 SS급 능력자와 마주칠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수준. 괜히 캐물었다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보통의 능력자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질 정도의. “히익!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크으……. 제기랄!” 임진석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제기랄! 이딴 게이트에서 탈진까지 올 줄이야!’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하면 오는 탈진 증상. 이 현상은 능력의 출력량 자체가 떨어지는 B급 이하의 능력자들이나 겪는 증상이었다. 황당하게도 임진석은 그 탈진 증상을 체험 중이었다. “쿨럭!” 임진석은 경비실에 다시 한번 피를 토한 후,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일주일은 쉬어야겠군……. 제기랄. 주민성 그놈, 대체 뭐지?’ 주민성은 회장이 이상하리만큼 눈여겨보고 있는 능력자였다. 심지어 실험체 몬스터의 투입까지 허가될 정도. ‘결과적으론, 회장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놈이었다.’ 대외적으로는 SS급 절단계 능력자, 그리고 협회 간부급 이상만 알고 있는 최면 능력자 임진석은 방송 출연 스케줄을 끝마침과 동시에 회장의 명령으로 주민성을 미행했다. ‘왜 나에게 많은 임무를 지시했나 의문스러웠지만, 지금은 납득된다.’ 미행 과정은 게이트에 입장하면서 극도로 까다롭게 바뀌었다.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데빌도그…….’ 이상하리만큼 윤기가 흐르던 데빌도그는 임진석에게 묘한 태도를 보였다. 공격해 오지도 않고 끊임없이 눈을 마주쳐 온 것이다. 마석을 줄 때까지. 그 덕분에 임진석은 최상급 마석을 전부 탕진했다. 이것들은 혹시라도 최면이 통하지 않는 능력자를 회유하기 위해 지참한 마석들이었다. ‘나름 마석 먹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 틈만 나면 나한테 찾아오고.’ 덕분에 데빌도그와 교감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번 임무만 처리하면 직접 게이트에서 키우고 싶을 정도. 하지만 문제는 주민성에게 있었다. 특히, 건물을 폭파시킨 이후의 주민성은 미친놈 그 자체였다. ‘미친개처럼 소란이나 일으키고! 개자식!’ 임진석의 고생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틈만 나면 건물 잔해로 몬스터를 찍어 대는 덕분에, 판자촌의 능력자며 경비원들이 쉴 틈 없이 주민성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감시 임무만 아니었어도!’ 뒤처리는 전부 임진석의 몫이었다. 찾아오는 모든 능력자에게 최면을 걸어 돌려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임진석에게도 큰 피해를 끼친 사건이 발생했다. ‘실험체도……. 제기랄!’ 실험체의 단거리 공간 이동 능력은 감시 임무에 안성맞춤이라 임진석으로서도 만족스러운 지원이었다. 문제는 이 실험체가 비밀리에 포획했던, 이 게이트의 보스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 결과를 누가 예상하냐는 말이다!’ 실험체를 잃게 된 과정만큼은 임진석도 이해했다. 주민성이 무더기로 죽인 고블린들은 한때 실험체의 수하들이었으니까. 덕분에 실험체의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그때까진 뒤처리할 수 있었는데!’ 주민성은 실험체에 의한 사고사로 처리하고 실험체에겐 다시 최면을 걸면 그만이었다. FFF급 능력자가 F급 게이트에서 죽는 걸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건 대체…….’ 임진석이 문제 삼고 있는 건, 주민성이 모종의 능력으로 실험체의 최면을 완벽하게 풀어 버린 것에 있었다. ‘대체 무슨 능력이었지? 그놈, 절대 FFF급이 아닌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험체에게 다시 최면을 걸기 위해 접근할 때마다 데빌도그에 올라탄 고블린들이 미친 듯이 임진석을 쫓아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이때 발생했다. “쿨럭!” 최대한 조용히 고블린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최면을 사용한 게 패착이었다. ‘최면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라니!’ 그때부터 최면 실패의 반동으로 탈진 증상이 나타났다. 상황이 역전된 것도 이 순간부터였다. 본질이 F급 게이트의 몬스터라 당장의 처리는 가능했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추적해 오는 고블린들의 포위망은 좀처럼 풀리지 않은 것이다. ‘특히 그 다섯 마리!’ 임진석을 가장 끔찍하게 만든 건, 데빌도그에 올라탄 고블린 다섯 마리였다. ‘가속 능력을 쓰는 몬스터라니! 이것만큼은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 가속 능력을 쓰는 건 고블린만이 아니었다. 고블린들이 타고 있는 데빌도그까지 가속 능력을 써 대는 것이었다. 그놈들만큼은 임진석조차 처리하지 못할 정도. 결국, 최종 선택은 후퇴였다. ‘제기랄. 온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 임진석이 이를 갈며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던 사이,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덜컥! “야, 저 피들 다 뭐냐?” “헉!” “이거 다 뭐냐고. 저 새끼는 왜 피 토하고 가만히 누워 있어?” “아, 안 됩니다! 저분은! 제가 닦겠습니다!” 새로 들어온 경비원이 임진석에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 왔다. ‘미친놈인가?’ 임진석으로선 황당할 따름이었다. F급 게이트의 경비는 C급 이하 능력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즉, C급 이하 하위 능력자가 SS급 능력자를 상대로 시비를 거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 상황, 죽여도 정당방위인 걸 알고 있나? 극비 임무 집행 방해다.” “히익!” “…….” 임진석 나름의 너그러운 경고였다. “죽여 보든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보다, 못 보던 차림인데 출입 신고는 했어? 얼굴 좀 볼까?” 당돌하기 짝이 없는 경비의 태도에 임진석은 황당함에 헛웃음까지 나왔다. “하하…….” “쪼개지 말고.” “원한다면…… 죽여 주지.” 임진석이 일어날 낌새를 보이자, 경비들이 필사적으로 둘을 말려대기 시작했다. “제, 제발 두 분 다 그만해 주십시오!” “……두 분? 너희들, 같은 경비가 아닌가?” 그제야 눈을 뜬 임진석은 자신에게 시비를 걸던 경비의 명찰을 확인했다. “F급……. 미친 건가?” “미친놈 처음 봐?” 상대를 탐색한 건 임진석만이 아니었다. F급 경비 역시 임진석의 배지를 확인했다. “아, 니가 임진석이구나? 최면 걸고 다닌다는 협회 소속 유해 능력자?” “……!” 임진석은 기겁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최면 능력에 관한 정보는 특급 기밀이었으니까. “그 정보를…… 어떻게?” 임진석은 F급 경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시, 신우빈!” 눈앞의 F급 경비는 임진석에게 시비를 걸고도 멀쩡히 살아남을 만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불이익은 임진석에게 생길 수준! “내가 누군지 알면서 꼬나봐?” 신우빈은 국내 최고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재벌그룹 ‘신성’의 정식 후계자였다. ‘제기랄!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무마해야!’ SSS급 능력자인 협회장조차 신성이 지배하고 있는 재계를 장악하지 못했다. 상대는 임진석이 건드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쿨럭!” 임진석이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왜. 최면이라도 걸어 보시게? 걸어 보든가.” “…….” 신우빈은 자신이 차고 있는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임진석을 도발했다. “착란 저항 목걸이?” “아는구나? 안목은 있네.” 신우빈이 착용한 목걸이는 전 세계에 몇 없는 순도 100%의 극상 마석을 수십의 S급 장인들이 정밀 가공해 만든 목걸이였다. 즉, 억지로 능력을 끌어올린들 신우빈이 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한, 최면은 통하지 않는다. “이야. 후계자 수업은 역시 배울 게 많단 말이지?” “크윽.” 신우빈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임진석도 알지 못했다. 그나마 예측할 수 있는 건, 회장과 신성 사이에서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 “죄송합니다…….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하면 능력자 생활 끝나냐? 응? 전화 때려?” “아닙니다…….” FFF급 능력자에게 크게 한 방 먹은 SS급 능력자는, F급 능력자에게 또 한 번 농락당했다. 그리고 동시에 배낭이며 캐리어며 짐을 잔뜩 챙겨 온 여자가 경비실을 방문했다. “실례합니다. 다시 입장하려고 하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챈 여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정지.” 경비실에 방문한 여자는 최선아였다.

1654884796419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