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각성2021.12.02.
“저기……. 이거 고장 같은데요.” 현장 노가다 6년 차.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 온 길이었다. 오로지 능력 각성을 하기 위해서. 물론 수많은 대출의 유혹도 있었다. 재능이 있다며 지원해 주려는 조직도 많았다. 하지만 주민성은 이 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그리고 자력으로 각성비 5000만 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극한의 안전주의.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주민성에겐 당연하다시피 정착한 신념이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확인해 주세요. 네?” 지금은 몬스터가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한 세상이다. 30년 전, 게이트가 처음으로 발생했을 때는 더욱 심했고. 인생의 목표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SSS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가 날뛰어도 안전한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선 유능한 능력자가 되어 큰돈을 벌어야만 했다. “F급은 말이 안 돼요. 진짜로.” * * * 편한 일 놔두고 노가다를 택한 것도 유능한 능력자가 되기 위한 준비 중 하나였다. 빵빵하게 지급되는 당일 급여에 단련까지 시켜 주는 직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주민성은 준비된 남자였다. “저 이대로 가면 안 된단 말이에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력소에 출근하는 태도가 남들에겐 대단해 보였는지, 주민성은 제법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능력자 협회는 당연하거니와 꽤 상위권에 속하는 길드, 주변 친구들까지 주민성의 능력자 각성을 기대했다. 무슨 등급을 받든, 그 이상은 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돈을 내주겠다는 권유는 전부 거절했고. 이런 단호함 덕분에 몸값은 더욱 상승했다. ‘그냥 돈 받을걸! 냅다 감사하다고 할걸!’ 주민성은 그동안의 판단을 후회했다. SSS, SS, S, A, B, C, D, E, F. 이 많은 등급 중에 하필 F급이 유력해 보이기 때문에. “고객님. 지금 고객님은 F급이세요.” “그래도 뭔가 이상해요! 스캐너 색깔 보세요! 색깔!” 인류를 구원해 낸 1등 공신, 각성 스캐너는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원래라면 각성 스캐너에선 빛이 나야 했다. 강한 능력, 높은 등급을 받을수록 스캐너는 환하게 빛나니까. “이상하기야 하죠. F급은 어두운 회색이니까요. 하지만 고객님. 능력이 미약할수록 스캐너는 어두워집니다.” 혹시나 해서 이런 경우도 대비하긴 했었다. 그래서 기억해 둔 말이 있었기도 하고. “스캐너의 오류 또는 변수 발생 시 관련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재검사를 시행할 수 있다.” “하아…….” “부탁드립니다. 제 인생이 걸린 문제예요.” 절실했던 표정 덕분이었을까. 효과는 상당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담당 직원이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주민성은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재능은 차고 넘친댔어. 오류일 거야. 다음 결과는 받아들여야겠지만…….’ 수정된 목표 등급은 D급 이상. 그동안 받던 기대에 비해 상당히 낮은 등급이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최악의 경우엔 혼자서 파티를 구해야 할 텐데, 인맥 없는 게이트 원정 파티 가입의 최소 조건은 D급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라도 1인분을 해 내면 주급 100만 원 이상. 충분해.’ 주민성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곧 찾아올 협회 간부의 실력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지잉.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담당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역시 각성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걸까. 한 줄기 희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직원을 따라가면서도 한껏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가질 않았다. ‘진짜 오류였나 본데? 역시!’ 담당 직원을 따라 도착한 장소는 인테리어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 같은 개인실이었다. 누가 봐도 VIP를 접대할 것 같은 장소! ‘대박!’ 개인실에서 자신을 협회 간부라 간단히 소개한 남자는 주민성에게 두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상하리만큼 눈을 마주치며. “각성 결과. 검정이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후후. 축하드립니다. 정말 흔치 않은 사례인데.” 주민성은 주먹을 힘껏 쥐고 남자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검정은 매우 특별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저, 정말이요?” “예. 미리 축하드립니다. 재검사 결과는 언론에 알려야 하는데. 괜찮죠? 여기, 계좌번호랑 서명해 주시고요. 출연료는 바로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죠! 등급은요?” “서프라이즈. 어떻습니까?” 질문에 대해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 특별한 능력을 각성할 테니까. 등급만 높으면 뭐든지 가능한 세상이니까. 여기선 상대의 권유를 수락함으로써 협회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득이었다. 고양된 지금의 기분이 주민성을 계속해서 재촉했다. ‘이제 나도 고등급 능력자. 셀럽인가.’ 찬란한 미래에 좋은 인맥은 필수였다. “좋습니다. 사인하죠.” “탁월한 선택입니다.” 주민성은 ‘언론 보도 동의서’라고 쓰인 종이에 이름과 계좌번호, 서명을 써 넣었다. “이거 받으시고요.” 계약서는 순식간에 복사되고, 원본은 주민성이 받았다. 동시에 협회 간부의 품에서 한 장의 봉투가 꺼내져 주민성에게 전달됐다. “이제 재검사를…….” 왜인지 급격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재검사 같은 소리 하네.” “……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주민성은 의식을 잃었다. * * * “……꿈?” 낯선 천장은 없었다. 이곳은 주민성의 자취방이었다. “꿈이라기엔…….” 툭. 자리에서 일어나자 낯선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한국 능력자 협회라고 적혀 있는 고급스러운 종이였다.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꿈이라면 지금의 봉투는 없었어야 했으니까. 주민성은 찜찜한 기분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FFF급 능력자 주민성] -능력: 건물주 -상세 내용: 불명 “FFF급?” 건물주라는 알쏭달쏭한 능력보다 주민성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FFF급이라는 등급이었다. “…….” 종이를 내려놓은 주민성은 곧장 방에서 나와 문과 창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선인장 화분, 화장지 걸이, 시계 등 잡다한 물건들까지 살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방으로 다시 돌아온 주민성은 종이를 넘겨 뒷장을 확인했다. 다음 내용은 FFF급보다 충격적이었다. -‘을’ 주민성은 계약에 동의한 이후 ‘갑’ 능력자 협회를 상대로 어떠한 항의도 할 수 없습니다. -‘을’ 주민성은 계약에 동의한 시점부터 ‘갑’ 능력자 협회 계약자의 이름과 얼굴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을’ 주민성은 ‘갑’ 능력자 협회 계약자와의 계약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기억을 잃습니다. -‘을’ 주민성은……. 내용이 상당히 길었지만, 단 한 줄도 빠짐없이 주민성이 손해 보는 내용이었다. 계약서를 파기하면 온몸에서 피를 쏟고 죽는다는 기분 나쁜 내용도 적혀 있었다. 게다가 주민성의 계약서는 원본. 사본은 ‘갑’이라는 능력자 협회에 있다는 소리였다. “전부 독소 조항이잖아…….” 계약서엔 주민성의 서명이 있었다. “안 돼…….” 주민성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항 중 하나였던 협회의 남자를 떠올렸다. “…….”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주민성은 그제야 현실을 파악했다. 자신이 극악 범죄에 연루되었음을. “이건 사기야…….” 계약의 효력은 절대적이었다. 차라리 악몽이면 좋았겠지만, 이성은 지금이 현실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기라고…….” 능력자가 생겨난 이후부터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특히, 당장 도움을 요청해야 할 대상인 경찰. 그들의 자리는 능력자 협회로 대체되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그 외에도 대한민국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부의 역할도, 언론의 역할도 협회가 대신했다. 군대도 마찬가지. 그 결과, 황당하게도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국이 됐다. 한국 능력자 협회장이 세계 최강의 SSS급 능력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서 남북 통일까지 시켰는데 최강국쯤이야. 세계 모든 나라가 협회장에게 수많은 권리를 양도했던 시기도 같은 해였다. “왜 나야……. 세금도 잘 내고, 죄도 안 짓고. 경제 활동은……. 돈을 모으기만 한 게 죄야? 아끼는 게 죄는 아니잖아!” 협회의 이미지는 엄청나게 좋았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협회에 항의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하…….” 띠링! 휴대폰이 울렸다. 능력자 각성이 끝나면, 같이 술 한잔하기로 했던 성호였다. -너 때문에 길드 짤렸다. XXX야. 내 눈에 띄지 마라. 죽여 버릴 테니까. XX. “갑자기 뭔 헛소리…….” 띠링! 이번엔 주말에 능력 연습 도와주겠다던 B급 능력자 진우형이었다. -어쩌지? 당분간 장거리 원정 때문에 바쁠 것 같네. 나중에 밥이라도 먹자. 띠링! 나름 썸이라고 생각했던……. -나 결혼해. 잘 지내. 일정을 메우고 있던 사람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 잘 추스르고. 나중에 밥이나 한 끼 하자. -길드 가입 건은 말 안 해도 알 걸세. 어쩔 수가 없는 일이야. 나중에 기회 된다면 식사나 하지. -예정되었던 일정은 취소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이 정도는 약과였다. 다음은 너무 속보여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던 사람들의 연락이었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ㅎㅎ -아ㅡㅡ 노가다는 역시 노가다네. 클라쓰 어디 안 가쥬? -야 ㅋㅋ 이제 나 만나면 90도 인사부터 해라 ㅋㅋ으딜 FFF급이! -FFF급잌ㅋ 뉴스엨ㅋㅋ 왜나왘ㅋㅋㅋㅋ XXXㅋㅋ -야zzzz F급 게이트에서 방송 안 하쉴? 대박각 나왔다. 슬라임 헌터 주민성. 어때? ㅋㅋㅋㅋㅋ 그중 신경 쓰이는 문자 하나. “뉴스……!” 서럽게도 주민성의 기억엔 언론 보도 동의서에 서명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악의인지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었다. 주민성은 착잡한 심정으로 TV를 켰다. “…….” 방송은 주민성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저도 아직 잘 믿기지는 않지만, FFF급이 맞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또 한 번의 세계 최초 기록을 세우는 거군요. 자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름은 주민성. 나이 26세. 평범한 남성입니다. 이건 사진이고요. 협회 소속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진을 내밀었다. 곧이어 화면이 전환되며 선명한 사진이 펼쳐진다. 사진 속엔 주민성과 얼굴이 보이지 않는 협회 간부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름과 등급이 표기된 자막은 덤. [FFF급 능력자 주민성 (26)] “맙소사…….” 사진 속에는 주민성과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초점 없는 환한 미소에 화가 절로 일어났다. “끄으으……. 난 저렇게 사진 찍은 기억이 없다고…….” -노인도 아닌 26살의 젊은 청년이 FFF급이라. 능력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건물주라는 능력입니다. -건물주요? 제가 아는 건물주가 맞나요? 그게 능력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이야! 30년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꿈꾸는 0순위 직업은 건물주였는데 말이죠. 왜 하필! 방송 진행자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건물주는 많은 이들이 꿈꾸는 직업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30년 전, 게이트의 등장에 수많은 도시가 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졸지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목숨만 부지하며 게이트가 없는 도시로 도망쳤고, 노숙자가 되었다. 그 결과 나온 대책이 건물주 금지법. 모든 건물은 협회가 관리한다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불만은 게이트가 늘어 갈수록 줄었다. -자세한 능력이 궁금해지는데요? -아쉽게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건물과 연관된 능력이기야 하겠지만, FFF급이면 출력이 낮아 실전용은 못 될 겁니다. -아아, 안타깝네요. -아시다시피 능력을 각성하면 신체도 그것에 맞게 변하니까요. FFF급이면 근력이며 지구력이며 전부 감소하겠죠. 지능 감퇴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해설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세계 최초의 FFF급 능력자 등장에 관한 해외 반응 보겠습니다. 삐익. 주민성은 잔뜩 분노한 얼굴로 TV를 껐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개인실에 도착할 때부터 느꼈던 고양감의 정체. 그것은 누군가가 극도로 은밀하게 내보인 능력이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띠링! 띠링! 주민성은 주소록에 있는 번호를 전부 차단했다. 보나마나 FFF급이니 손절 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일 테니까. “이렇게 사람을 놀림거리로 만들어서 보는 이득이 뭔데…….” 주민성은 읽다가 팽개쳤던 계약서를 다시 살폈다. 분명 언론 보도 동의서가 있을 터였다. 팔랑. 계약서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종이가 떨어졌다. [언론 보도 동의서] 대충 자신의 신상을 언론에 내보내는 것에 동의했다는 내용과 대가로 300만 원을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끄으으……. 으아아……. 이 미친놈드을……! 고작 300만 원……! 사람 하나 매장해 놓고 300만 원!” 그 지독한 몰탈 곰방, 타일 곰방 작업도 이렇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폼 나르기도, 아시바 파이프 정리조차 주민성을 극한으로 몰진 않았었다. 한참을 바닥에서 구르며 고통받던 주민성은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계약서엔 주민성의 서명이 있었고, 이젠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는 세상이 됐으니까. 어디에 가든 FFF급이라 수군댈 거고, 어떤 직장에 가든 FFF급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예정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 주민성은 특유의 악바리 기질을 다시금 불태웠다.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있으면 씹으며 버티고 살아남는 사람이 바로 주민성이었다. “기회는 있으니까.” 계약은 주민성의 의지가 아니었다. 분명 다른 능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어.” 이 계약은 주민성을 속박하려는 노예 계약까진 아니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었으니까. 그저 경고차 항의만 차단하고, 서로 갈 길 가자는 소리였다. “이 정도로 풀어 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FFF급 능력자 주민성] -능력: 건물주 -상세 내용: 불명 “무슨 능력인지부터 알아야 해.” 상세 내용 불명은 주민성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등급 능력자에겐 흔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럴 땐, 몬스터를 사냥하며 본능에 맡긴 채 능력을 깨닫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도 건물주다.” 주민성의 생존 본능은 건물주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트리플이잖아.” 그저 남들과 다를 뿐.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건물이라면 게이트에도 얼마든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