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끝을 향해 (2)
“에드먼드.”
아버지가 에드먼드를 불렀다. 리처드는 귀를 쫑긋 세우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요즘 이건우는 어떻게 지내지?”
“한국에서 일이 바쁜 것 같더군요. 덕분에 핵융합 쪽은 제가 완전히 맡아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난데없이 묻는 이건우의 근황. 리처드는 조금 당황했다.
'아버지가 이건우는 왜 신경 쓰시지? 이건우와 사이가 안 좋은 것 아니었나?'
그는 그간 있었던 일을 되짚어봤다. 로스차일드는 이건우에게 석유와 제약 부문을 뺏겼다. 상식적으로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가문연합에서 이건우와 아이작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모르는 리처드는, 아버지가 왜 이건우를 신경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아이작은 막내딸인 클로이에게도 이건우와의 사업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클로이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크리액터와 자율운항기술로 비용의 60% 가까이 줄였어요. 인건비와 연료비를 절감하는데 화물을 적재할 공간은 늘어났죠. 이건우 님은 어떻게 이런 기술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걸까요?"
아이작은 클로이를 보며 냉막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었다.
"이건우가 마음에 드느냐?"
클로이의 싱싱한 뺨이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클로이의 물음에 리처드는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과연 아버지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지금 이건우 하나 때문에, 쫓겨났던 에드먼드가 가문으로 돌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리처드는 자신의 후계자위가 다시 위협받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아이작이 말했다.
“이건우와 반대 길을 가는 건 멍청한 짓이다. 지금도 이건우가 윌리엄을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있다. 윌리엄도 조만간일 거다.”
미네르바 가문은 이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가주인 윌리엄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에드먼드가 보는 눈이 있었지. 이건우 밑에 들어갔을 때는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어. 클로이, 너도 이건우와 친하게 지내거라.”
에드먼드에 대한 칭찬이 리처드의 심기를 건드렸다.
리처드는 도망치듯이 되돌아 나왔다.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오는 순간 윌리엄을 만났다.
*
리처드가 저택을 나오는 순간, 윌리엄 역시 마침 로스차일드 저택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다소 화가 난 발걸음으로 나오던 리처드는 거기에 있는 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윌리엄?”
리처드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윌리엄은 그마저도 반가웠다. 중절모에 가려진 깊숙한 눈빛이 음험하게 물들었다.
“반갑소. 인베스터 RC의 CEO를 이제야 뵙는구려.”
"가문에는 무슨 일이지?"
"글쎄. 내 오랜 친구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더군."
"뻔뻔하기는. 네놈이 우리 가문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걸 모를 줄 알고?"
리처드는 그를 경계했다. 벨라가 당한 이후 아이작이 그토록 신신당부했던 게 윌리엄의 존재였다.
벨라를 이용해서 가문 산업의 지배구조를 손에 넣으려고 했고, 스파이를 심어서 주요 사업을 강탈하려고 했다.
그뿐만 아니다. 놈은 사람을 납치해서 몸에 폭탄을 심어 이건우에게 보냈다. 리처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윌리엄은 미친놈이었다. 놈에게는 선이라는 게 없는 듯했다. 사고구조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르다는 느낌에, 리처드는 경멸어린 표정으로 내뱉었다.
“썩 꺼져.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우리 가문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 거다.”
까칠한 리처드의 반응에도 윌리엄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 이건우를 상대해서 그런 걸까. 리처드가 땍땍거리는 것조차 그저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귀여울 뿐이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알고 있었다. 리처드가 이렇게 신경질이 난 이유를.
'상처받은 어린 사자라···. 쉽게 갈 수 있겠군.'
이건우가 궤를 달리하는 놈이라 그렇지, 윌리엄의 주특기는 사람의 욕망을 건드려서 제 뜻대로 휘두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리처드는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리처드를 공략할 방법이 세워졌다.
리처드를 보니, 그는 이건우에게 당하면서 무너진 자신감이 조금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리처드는 이미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윌리엄은 시간 끌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주가 되고 싶지 않은가?”
역시나 리처드는 코웃음을 쳤다.
“하! 벨라에게도 그렇게 접근했겠지. 나는 이미 유력한 후계자이다. 아버지께서도 나를 총애하시고 지금까지 가문의 중추 사업을 내게 맡기셨지. 당신과 손을 잡지 않아도 가주가 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말이 불필요하게 길어진다. 마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듯한 긴 변명 속에서 윌리엄은 밑바닥에 깔린 불안감을 읽었다. 그는 속으로 조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유력한 후계자라고? 그런데 아이작은 왜 그렇게 에드먼드를 찾는 거지?”
“······.”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그 이름이 나오자 리처드의 표정이 한층 나빠졌다.
윌리엄은 리처드가 불안해하는 부분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갔다. 그는 교활한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아이작은 이미 이건우와 한편이라고 볼 수 있지.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이건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에드먼드와 클로이고.”
보수적인 로스차일드의 가법상 클로이는 어차피 가주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다르다.
원래도 에드먼드는 강력한 후보였다. 이건우 때문에 석유업을 말아먹었다고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대처도 잘 했다.
무엇보다 에드먼드에게는 이건우가 있다.
자존심 높은 놈이 어째서 이건우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핵융합이라는 거대한 산업을 받아서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과거 석유 산업을 할 때보다도 에드먼드의 명성은 더욱 대단해져 있었다.
나락에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때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의 밑에라도 들어가는 남자. 에드먼드에게는 확실한 스토리가 있었다. 최근 가문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에드먼드를 인정하며 추켜세우는 목소리가 많았다.
물류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클로이도 이건우와 손을 잡고 그 지배력을 확고하게 다졌다. 그리고 클로이는 분명 에드먼드의 편에 서겠지.
만약 에드먼드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이건우의 신기술을 끊임없이 받아서 더 성장한다면?
에드먼드는 분명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리처드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뒤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에드먼드를 신경 쓰느라 리처드는 최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애써 그런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계자를 정하는 건 이건우가 아니다.”
하지만 리처드가 윌리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부터, 이미 그에게 말려들었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입질이 왔다. 윌리엄은 먹잇감을 살살 낚았다.
“그래. 하지만 불확실한 것보다 확실한 게 좋지 않나. 예를 들어, 아이작에게 직접 가주 자리를 뺏어오는 것 말이야.”
그 말에 리처드가 흠칫 놀라서 윌리엄을 쳐다봤다. 그 과격한 말에, 조금 옅어질 뻔했던 경계심이 다시 진해졌다.
“지금 나더러 아버지를 몰아내라고? 어차피 기다리면 내 자리가 될 건데, 내가 무엇하러 그런 짓을 해야하는 거지?”
하지만 윌리엄의 유혹은 이제 시작이었다.
“글쎄. 가주가 네 것이 될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에드먼드와 달리 당신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나는 이미 안정적으로 인베스터 RC를 굴리고 있어.”
“안정적이면 안 돼. 로스차일드의 후계자는 특별해야 하니까. 그리고 네 아버지가 에드먼드에게도 금융사업 부문을 넘겨주려고 하는 것, 모르지 않을텐데?”
로스차일드 가주를 뽑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최종적으로 두 명의 후보를 선출한 후, 차례대로 경영수업을 받으며 인베스터 RC와 영란은행의 CEO를 교대로 수행한다.
그중 인베스터 RC를 리처드가 맡아서 운용하고 있었고, 영란은행은 아이작이 직접 관리해왔다. 그런데 이제 슬슬 아이작이 영란은행의 사업을 하나둘씩 에드먼드에게 넘겨주려고 하는 낌새가 보였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모를 리가 없지. 나만큼 로스차일드의 후계구도를 잘 알고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너를 보니 아이작의 옛 모습이 떠오르는군."
윌리엄은 속살거렸다.
"아이작이 어떻게 로스차일드의 가주가 되었는지 아나?"
"그건 큰삼촌이 사고를 당해 후보가 없어서···."
"이런 순진하기는. 그 사고가 과연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그 사고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군지 내 입으로 말해야 해?"
리처드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아버지를 모함하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 같은 냉혈한은 형제를 죽이고도 남을 사람인 걸, 그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처드가 침묵하자 윌리엄이 그것 보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이작이 나에게 말했지. 형을 몰아내 달라고. 가주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특별히 전용기에 약간 장난을 쳐놨지."
아버지의 치부를 본 리처드.
그렇지 않아도 갈등하던 시소 추가 한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
‘아버지도 윌리엄과 손을 잡았잖아? 왜 나라고 못 해?’
윌리엄은 리처드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말했다.
"네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주가 되게 해주지. 당장 아이작이 사라진다면 리처드 자네가 가주가 되는 건 어렵지 않을거야. 하지만 여기서 더 시간이 흐른다면?”
리처드는 생략된 뒷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에드먼드에게 모든 걸 빼앗길지도.’
그리고 윌리엄의 마지막 말이 쐐기를 박았다.
"아 참, 내가 자네에게만 이 제안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나에게 후보는 자네 말고도 여럿이 있거든."
윌리엄의 협박 아닌 협박.
리처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
리처드는 의심하면서도 결국 윌리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우를 뒷배로 둔 에드먼드의 위협은 정말로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다가 윌리엄에게 알게 된 아버지의 비밀까지.
그는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윌리엄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가 결정을 내리자 윌리엄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로스차일드 정도면 내가 방패막이로 삼기에 딱 좋지.'
적당히 은밀하고, 또 그 규모만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가문.
리처드가 아직은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번 자신의 도움을 받고 나면 다음번에도 찾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윌리엄은 리처드쯤은 다룰 방법이 수십 가지나 있다. 그를 살살 꼬드겨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려면 얼른 아이작을 치워버려야겠군.'
마침 적당한 이벤트도 있었다. 다가오는 주말에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연회가 열린다. 이제는 파벌이 갈린 가문연합에 속한 발렌베리, 케네디 가문뿐만 아니라 이건우까지 모두 모이는 곳이다.
윌리엄은 모든 사람이 모인 그때야말로 화려한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음에 걸리는 건 이건우의 존재.
'분명히 리처드와 손을 잡은 게 새어나갔겠지.'
윌리엄은 캐리온의 정보망을 얕보지 않았다. 자신은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한다고 자신하기는 했지만, 리처드는 정보를 그만큼 통제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분명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건우와 캐리온은 작전을 알아채고 방해하겠지.
그렇다고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다.
차라리 어느 정도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감안하고, 그 점을 이용해 함정을 파기로 했다.
상대가 정보를 잘 다룬다?
'그러면 차라리 그럴듯한 거짓 정보를 흘려서 정보에 혼선을 주는 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