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끝을 향해 (1)
기자가 말했다.
“괜찮겠어요? 그,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이건우 사장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건우 사장님에게 도움을···?”
기자는 이 어린 학생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얘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인터뷰하면 수사과정에 도움이 되고, 그러면 범인을 더 빨리 잡을 수 있을 거란다.
사실 인터뷰와 수사과정은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어쨌든 기자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어린애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는 해도 굴러온 특종을 제 발로 차버릴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녹음기를 켜며 준비해온 질문을 던졌다.
「기자: 납치 과정은 기억나나요?
A씨 (27세): 노원구 광운대역 근처 골목을 걷다가 납치됐어요.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과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에 바로 데이터센터가 있는 곳에 떨어졌어요.
기자: 무서우셨겠어요.
A씨 (27세): 네. 그래도 이건우 사장님이 계속 옆에서 말을 걸어줘서 안심됐어요.」
정연화는 이건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건우가 마련해준 특실은 그녀의 집보다도 더 좋았다. 여기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위기에 처한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한편 정연화의 말을 듣던 기자는 의아했다.
‘이건우가 말을 걸었다고?’
「기자: 이건우 씨가 옆에 있었나요?
A씨 (27세): 아니, 바로 옆에 있는 건 아니고 어떤 로봇이 있었는데 그 로봇을 통해서 말해줬어요. 그 로봇이 저를 치료해줬는데···.
기자: ···로봇이 치료를 해줬다고요?
A씨 (27세): 로봇이 치료해줬나? 눈을 떴을 때는 제일 의료원이긴 했는데요.」
기자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엉망이군. 말이 횡설수설해.’
큰 사건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납치한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폭탄을 심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이건우가 구해줬다.
문제는 그게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대략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건우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잘 편집해서 절절한 기사를 발표했다. 당연히 특종이었다. 납치당한 사람의 인터뷰는 처음 나왔던지라 파급력은 굉장했다.
<테러를 막아낸 이건우!>
<이건우의 나노로봇···의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가져>
<신기술로 테러를 막아낼 수 있을까? 방위업계에 혁신이 될 것>
이건우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 사건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에도 일어났다. 덕분에 윌리엄의 개짓거리는 전세계적인 공분을 사게 되었다.
- 인체폭탄이라고? ㅅㅂ 미친새끼 아니냐?
- 이건우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음
- 진범 꼭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ㅠㅠㅠㅠㅠㅠ
- 제가 아는 분이 경찰인데 진범은 이미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거물이라서 발표를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ㄴ 네 다음 음모론
ㄴ 근데 진짜일수도? 전세계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으면 보통 조직은 아닐텐데···.
전세계가 진범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사실 인터넷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수사기관은 이미 진범이 윌리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방위 산업체, 곡물 업체, 언론 기관을 비롯한 전세계의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
윌리엄이 진범으로 밝혀진다면 시장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제 겨우 포비드 사태로 악화된 경제를 회복하려는데, 여기에 또 ‘윌리엄 게이트’가 터지면서 불안정성이 심화된다?
이런 리스크를 피하고 싶은 각국의 수장들은 수사기관에 압박을 넣었다.
그리고 사법부 윗대가리 중에는 윌리엄의 돈을 꾸준히 받아먹은 사람도 다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게 윌리엄의 돈인 줄 모르고 받아먹었지만, 어쨌든 돈을 받아먹었다는 장부는 윌리엄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윌리엄만큼 남의 약점을 잘 사용하는 사람도 없다.
윌리엄은 자신이 가진 증거들로 그들을 압박했다.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혼자 죽지만은 않을 거라고. 때문에 사법부도 진범에 관한 정보를 필사적으로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던 나는 코웃음을 쳤다.
“병신들인가? 애초에 미네르바가 진범이라는 자료를 준 게 나인데. 이걸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차피 저쪽에서 막아봤자 소용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작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과열되자 나는 슬슬 떡밥을 풀기 시작했다.
<인체폭탄을 지시한 사람···초거대 기업의 회장이다?>
기사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 초거대 기업의 회장?
- 구글? 에플? 마이크로소프트?
- 그중에서 이건우랑 척을 진 사람이 누가 있지?
ㄴ 너무 많은데···.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어디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볼 만한 기업이 하나둘씩 언급되었고, 이름이 언급된 기업은 화들짝 놀라며 절대 자신은 아니라며 입장을 표명했다.
잘못하면 테러범과 엮여서 주가가 나락갈 판이니 기업들은 오히려 수사기관에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며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필사적으로 진범을 밝히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어쩔 수 없지.”
윌리엄이 준 돈을 끌어안고 같이 나락으로 가는 수밖에.
나는 친절하게 진범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수사기관이 그를 싸고도는 이유까지 함께 첨부했다.
<윌리엄 미네르바, 인체폭탄 테러범으로 밝혀져!>
<세계적인 기업을 거느린 회장의 민낯이 드러나?>
<개인을 위한 수사기관, 어디까지 추락했나>
몇 주 전부터 세계적인 기업들의 실질적인 소유주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한차례 조명을 받았던 윌리엄 미네르바.
워낙 이슈가 되었던 인물인 만큼 반향도 엄청났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그의 실체를 하나둘씩 까발렸다. 윌리엄이 소외계층을 이용해서 반인륜적인 일을 자행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로렌제약에 넘겨준 생체실험 데이터도 윌리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 일도 끄집어냈다.
<로렌제약에 생체실험 데이터를 전해준 게 그였다!>
<로렌제약의 전 CEO, ‘윌리엄이 자료를 건네줬다’···인정해>
<윌리엄 미네르바, 오래 전부터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내가 소스를 뿌리기 시작하자 기자들의 눈이 돌아갔다. 나는 멈추지 않고 미네르바 가문에서 털어온 수많은 악행을 계속해서 밝혀냈다.
<독일 총리 암살, 사실은 미네르바 가문에서 행해져?>
<윌리엄 미네르바, 포비드 사태의 배후로 지목돼>
심지어 인체실험을 통해 포비드를 만들어내고 그걸로 전세계에 고통을 준 의혹까지 받고 있었다.
양지로 나온 윌리엄은 먹음직스러운 뼈다귀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붙은 살코기는 평생 먹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기자들과 사람들은 윌리엄에게 미친듯이 달려들었고, 그 연합에 속한 기업들은 하나씩 둘씩 박살나고 있었다.
윌리엄의 팔다리를 끊어냈고, 마침내 드러난 몸통도 이제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목숨줄을 끊어낼 차례가 왔다.
*
윌리엄은 이를 갈았다. 그는 이건우가 하고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감히 나를 가지고 몰이 사냥을 해?”
그가 양지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뜯다니.
특히 가문이 털린다는 것은 윌리엄이 예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타격이 컸다.
덕분에 가문 사람을 비롯한 관련 기업까지 모두 수사에 들어갔다.
그의 영향력은 사법부와 수사기관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전세계의 이목이 쏠린 사안이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쉽게 여론이 가라앉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여론을 무시하고 뻗대다가는 사법부의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다.
게다가 이건우는 본보기로 윌리엄을 감싸는 법조인의 실명과 지금까지 저지른 비리를 기사로 내보내버렸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쓰레기가 되어 두들겨 맞고 있었고.
이건우의 경고 때문에라도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윌리엄에게 수사에 협조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덕분에 윌리엄은 세계 각국 법무부의 인장이 찍힌 공문을 받아볼 수 있었다.
윌리엄은 이를 갈며 판사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신임 판사에게 맡겨도 이것보다는 잘하겠군.”
“죄송합니다.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사는 받으셔야 합니다. 제가 재판까지 못 가게 막을 테니 그냥 나오셔서 질문 몇 가지에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잘 좀 처리하게.”
지금 통화하는 판사에게 들어간 돈만 해도 수백만 달러이다. 윌리엄은 지금까지 처먹은 돈은 값을 못한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한 줌 남은 이성이 꾹 눌렀다.
그건 하수이다. 지금 상황에서 판사를 들쑤셔서 좋지 않은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
대신 경고를 남기는 건 잊지 않았다.
“혼자 가지는 않을 테니 당신도 최선을 다해야 할거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윌리엄은 분노를 삭이며 현 상황을 되짚었다.
숨어있던 가문은 이건우의 공격에 초토화되었다. 가문에 숨겨놓은 비밀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기반이 되어주던 기업은 모두 수사를 받고 있다. 이제는 듀퐁 가문이 움직이던 여론조차 그의 편이 아니었다.
케네디 가문은 미국 정계를 부추기면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청문회를 열어서 엄중히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유럽에서는 발렌베리 가문이 펄쩍펄쩍 날뛰면서 어떻게든 미네르바 가문을 끌어내려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리 가문과는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며, 록펠러 가문도 슬금슬금 이건우와 손을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과 돈을 이용한다고 해서 뒤집을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몸을 숨겨야 해.”
지금 저 여파를 모두 맞으면 아무리 윌리엄이라도 무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숨으면서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몸을 숨겨야 하는 가문은 이건우에 의해 풍비박산이 났다. 휘하에 있는 기업들 또한 모두 조사를 받고 있어서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럴 때 가문연합이 있어야 하는데···.”
그 가문연합은 이건우가 자신이 심어놓은 스파이를 공개하면서 그의 편에 붙은 지 오래다.
“아니, 아니지.”
순간 윌리엄의 머릿속으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문연합을 이용할 건더기가 떠오른 것이다.
미국 쪽은 이미 이건우에게 넘어갔고, 발렌베리 가문도 라울이 꽉 잡고 있다.
프랑스의 듀퐁 가문은 조사를 받고 있으며, 중국의 리 가문은 홍콩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의 가주인 아이작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지만, 그 후계자들은 건드려볼 여지가 있었다.
과거 아이작을 도운 경험이 있는 윌리엄은 로스차일드의 후계자 경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 후계자들을 이용하여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장녀인 벨라를 건드린 전적이 있는 만큼 후계자들도 자신을 경계하겠지만, 윌리엄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 바로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니까.
*
로스차일드 가문.
아이작과 그의 후계자들이 모여 만찬을 함께하고 있었다.
장남인 리처드는 일을 처리하느라 늦게 집에 도착했다. 그는 다이닝룸에 들어가다가 반갑지 않은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에드먼드?’
분명 지난번만 해도 에드먼드는 만찬에 자리하지 않았다.
원래 석유업 부문을 맡고있던 에드먼드는 사업을 쫄딱 말아먹고 쫓겨나다시피 했다.
가주 자리를 놓고 장남인 리처드와 에드먼드가 경쟁하는 체제였는데, 에드먼드가 쫓겨났으니 자연스럽게 리처드가 후계자로 낙점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에드먼드는 이건우의 밑으로 들어가서 대체에너지 시장에 뛰어들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이건우를 싫어하니, 에드먼드가 가문에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시 에드먼드를 불렀다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에드먼드를 찾더니, 이후부터 에드먼드는 조금씩 다시 가문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가족은 자신이 온 것도 모른 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잠시 문가에 멈춰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