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로 갑질하는 양아치 재벌-148화 (148/183)

드러나는 윤곽 (1)

윌리엄의 위험한 제안.

윌리엄이 요구하는 게 기밀 중의 기밀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정보가 윌리엄에게 들어가는 순간, 가문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리라는 것 또한.

하지만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을 피하는 게 더 중요했다.

벨라는 타인의 관심을 기대하면서 이게 충족되는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로렌 제약의 모든 자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어나가는 순간 쏟아질 사람들의 비난과 아버지의 실망 어린 눈초리.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움츠러든 자아에 대한 방어본능, 그리고 자기부터 살고 봐야한다는 극도의 이기심이 발휘됐다.

결정을 내린 벨라는 로스차일드 저택에 방문했다.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벨라 아가씨?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별거 아니야. 잠깐 가지고 갈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벨라는 어딘가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그 모습에 집사는 의아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넘어갔다.

벨라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늘 로스차일드 그룹 회의가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연락 드릴까요?”

그 말에 벨라는 안도했다. 일부러 회의가 있는 날을 맞춰서 오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아버지가 안에 계실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는 내가 따로 연락드릴게. 일 봐.”

“그럼.”

집사는 짧게 목례했고, 벨라는 그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부부침실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어머니의 방이, 오른쪽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연결돼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은 계속 잠겨 있었다. 그녀는 열쇠로 어머니의 방을 따고 들어가, 침실을 통과한 후, 다시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서재 책상에는 개인 컴퓨터가 놓여있었다.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컴퓨터인 만큼 보안은 철저했다.

이 컴퓨터는 공용 네트워크에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 오직 아이작이 사용할 때만 가문의 보안팀이 관리하는 비밀 네트워크에 연결된다.

그러나 그걸 뚫을 준비는 되어있었다. 바로 윌리엄이 준 칩.

이 칩을 연결하는 순간,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해커와 원격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해커가 직접 보안망을 뚫고 컴퓨터에 접속할 것이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며칠 전, 윌리엄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가진 산업의 정확한 지배구조, 그걸 가져온다면 생각해보지요.”

로스차일드 가문이 가진 산업은 전세계에 퍼져있다.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막대한 자산은 아버지와 헤드 매니저만이 알고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벨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윌리엄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졌다.

“당신···. 이러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였어?”

윌리엄은 그 말이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말씀을. 그렇지 않다면 내가 볼 것도 없는 당신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볼 것도 없는.

그 말이 벨라의 심장을 찔렀다.

가문에서 동떨어져 어떻게든 인정을 받으려 아등바등하는 자신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는 말이었다.

벨라는 생각했다. 어쩌면 장현태의 비밀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도 다 저 자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윌리엄은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릴 겁니까? 당신을 망친 건 당신의 욕심입니다. 당신이 파이저 제약을 이기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결과에 승복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윌리엄의 태도는 가증스러웠다.

벨라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윌리엄은 천진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변한 건 없어요, 벨라. 당신은 내가 가진 자료가 필요하잖아요. 서로에게 필요한 걸 얻어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벨라의 뺨을 쓸었다. 마치 뱀의 혀가 쓸고 지나가는 감촉이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벨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저 남자와 절대로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딱 한 번만이야.

벨라는 그렇게 위안하며 칩을 꽂아 넣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른 후, 해커가 자료를 빼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녀는 그대로 칩을 빼고 저택을 나왔다.

그녀는 이 비밀스러운 계획이 완벽할 거라고 믿었다.

*

캐리온이 말했다.

[로스차일드의 보안망이 해제되었습니다.]

윌리엄이 벨라를 이용해서 로스차일드를 장악할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당황한 벨라는 윌리엄에게 쪼르르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도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윌리엄이 간도 크게 로스차일드 산업의 지배구조를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금 보유, 국제금융시스템, 조세회피지역 등을 이용해 자산을 분산시키는 데다, 패밀리펀드를 운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자산가치를 파악하기 힘들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비상장회사를 통해서 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서 지배구조와 연결망을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그러면 손쉽게 로스차일드의 지배 산업을 공략할 수 있는 맵핵을 확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윌리엄의 명령을 받은 벨라는 가주의 개인 컴퓨터에 접속했고, 그 잠깐 사이 보안망이 해제되었다.

지금껏 캐리온도 접속에 실패했던 컴퓨터가, 멍청한 여자 하나 때문에 털리게 된 것이다.

캐리온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문이 열린 틈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작의 컴퓨터 안에 있는 정보를 모조리 긁어왔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해커의 컴퓨터에 접속해서 자료를 조작해.”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해커가 복사하고 있는 지배구조 자료를 조작하라고 시켰다.

지금 캐리온과 아이작, 그리고 해커의 컴퓨터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다.

때문에 캐리온이 두 사람의 자료를 모두 털어먹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작에게는 귀중한 자료가 많이 있었지만, 해커의 컴퓨터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아쉽게도 윌리엄을 추적할만한 단서는 전무한 상황.

윌리엄은 결벽증이 걸린 사람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우면서 활동하고 있엏다.

하지만 이 기회를 마련해준 덕분에 나는 윌리엄의 정체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윌리엄이 빼낸 자료는 조작됐다.

몇 개는 실제로 있는 회사지만, 나머지는 캐리온이 꾸며낸 유령회사이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접근해서 공격한다?

그럴 사람은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윌리엄밖에 없다.

이를 역추적하면 윌리엄의 정체에 대한 윤곽을 알아낼 수 있다.

마침내 꼬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나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한서진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문서영 기자님이 왔어요.”

문서영은 윤단아가 소개해준 기자로, USA Today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예전 다이아몬드 엠페러 호 사건 때 로날드를 움직이기 위해서 그를 저격하는 기사를 내도록 시킨 적도 있었다.

덕분에 문서영은 특종 기자라는 커리어를 얻었고, 나는 미국에서 쓸만한 스피커를 얻었다.

슬랙스에 정장 블라우스를 입은 문서영은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머리가 많이 길어졌다. 문서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활약은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단독으로 만난다고 하니까 회사에서 완전 밀어주던데요?”

하긴 지난번에 미국에서 만났을 때와 내 위치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

그때는 미디어 하나와 이제 막 치료제 개발을 시작한 제약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업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세계 유일한 치료제에 대한 사용승인이 떨어지면 떼돈을 쓸어담을 수 있다.

문서영은 눈을 반짝였다.

“역시 이번에 긴급승인절차 때문에 쓰는 건가요?”

그녀는 긴급승인절차를 위해서 여론전을 펼치는 거로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로날드 대통령은 내 덕분에 베일리를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최대한 빨리 승인을 내주겠다고 했을뿐더러, 직접 나서서 파이저 제약의 치료제를 홍보도 해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포비드 사태의 안정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 자화자찬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한국 쪽도 마찬가지였다.

핵융합 발전으로 한번 뽕 맛을 본 차민태 대통령은 이제 내가 하는 말이면 껌벅 죽었다.

임기 말이란 게 무색하게 최고의 지지율을 찍고 있는 그는, 매일같이 관련 부처에 빨리 일을 진행하라고 닦달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긴급승인절차에서는 내가 걱정할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긴급승인 같은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거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임상데이터 조작 및 생체실험에 대해 고발을 하려고 합니다.”

문서영은 눈을 깜박거렸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질문을 쏟아냈다.

“···생체실험이요? 아니, 그리고 임상데이터 조작이라니. 어떻게 알아내신 건가요? 내부 고발이 있었나요? 대체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거죠?”

“저 어디 안 갑니다. 하나씩만 질문하세요.”

갑자기 들어온 특종에 문서영은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는 걸 깨닫고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이런 특종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이해합니다. 일단 로렌제약에서 데이터 조작을 했습니다.”

로렌제약!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이자 파이저 제약의 최대 라이벌.

그 훌륭한 소스에 문서영의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갔다. 이거 잘 짜면 꽤 좋은 구도가 나올 수 있겠는데?

그럼 다음 질문.

“데이터 조작은 몇 건 정도 일어났나요?”

“전부 다 조작됐습니다.”

“···네?”

임상데이터 조작은 없지는 않다. 보통은 실패한 데이터를 성공했다고 조작하거나, 아니면 실험하지도 않았는데 실험했다고 조작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로렌제약의 자료는 내가 싹 날려버렸고, 복구도 못 하게 막아뒀다.

그 대신 윌리엄에게 받은 자료로 갈아치웠다.

당연히 실험할 시간은 없다.

“못 믿겠으면 자료도 보여드리죠.”

내가 준비한 서류를 보는 문서영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

해커는 윌리엄에게 자료를 정리하여 넘겨주었다. 윌리엄은 수천 장에 달하는 문서를 일일이 프린트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벨라가 윌리엄에게 찾아갔을 때는 방안에 프린터기 돌아가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그냥 파일로 받아가면 편할 텐데요.”

“내가 아날로그를 좋아하는지라. 당신처럼 USB를 사용했다가 이건우한테 자료를 털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윌리엄은 피식 웃으며 말했고 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흥, 약속은 지켰으니 당신 자료나 주시죠.”

윌리엄은 USB를 넘겼다.

“장현태가 준 것처럼 이상한 프로그램은 깔려있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우가 서버망에 침투한 전적이 있으니 웬만하면 다른 내부망을 쓰고 보안이 철저한 곳에서 파일을 열어보라고 하고 싶군.”

벨라는 USB를 확 낚아채며 말했다.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까칠한 태도였지만 윌리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나름대로 이번 거래에 만족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아이작의 태도는 무관심하다 못해 비협조적이었다.

제 놈을 가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형을 치워주기까지 한 게 누군데. 이제는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린 듯 모든 게 제 발아래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었다.

‘아이작도 슬슬 내려올 때가 됐지.’

그도 이제 알아야 한다. 누가, 그 자리를 만들어준 것인지.

그 패로 벨라가 딱 적당했다. 멍청하기는 하지만 잠시 쓰다 버릴 패로는 안성맞춤이다. 벨라는 그새를 못 참고 USB에 있는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미리 보안화된 노트북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멍청한 여자라니까.'

자기가 무슨 짓을 한지도 모르고 저까짓 자료 하나에 희희낙락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자료를 모두 확인한 벨라는 신나게 자리를 떴고, 윌리엄은 혼자 방안에 남아 벨라가 물어다 준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자료는 틀림없는 진짜로 보였다.

윌리엄의 입에는 짙은 미소가 번졌다.

'이제 조만간 로스차일드도 내 밑에 둘 수 있겠군.'

하지만 윌리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그 자료가, 자신을 낚을 미끼라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