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드러난 파편 (2)
에드먼드는 바로 그 주에 비행기 폭파 사고로 인해서 첫째 삼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넘을 수 없는 커다란 거인 같은 첫째 삼촌의 갑작스러운 죽음.
형을 살해하는 계획에 가담한 아버지.
가문의 후계자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의문의 남자.
이 사건은 어린 에드먼드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시의 상황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일을 처음 듣는 클로이는 놀라면서도 당혹스러워했고, 에드먼드는 왜 이런 걸 묻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두 남매가 회포를 푸는 동안 먼저 호텔로 돌아와서 생각을 정리했다.
‘연합이라···.’
에드먼드는 분명히 ‘연합’에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아이작에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에드먼드는 연합이 뭘 말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유럽연합?
세계연합?
대륙연합?
뭐가 됐든 로스차일드 같은 유서 깊은 가문이 속해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일 테다.
그리고 아이작을 회유하는 과정을 통해 미루어볼 때, 그는 연합이라는 곳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최소 간부 혹은 수장급에 위치하는 사람일 터.
정확한 정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어떤 놈인지 대략적인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윌리엄이 어째서 벨라에게 접근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은 가주 승계작업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면서 세력을 키워왔던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나머지 의문이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면 에드먼드에게는 왜 접근하지 않았던 걸까?
어째서 벨라를 선택했던 걸까?
아니, 접촉을 했던 건 벨라뿐만이 아니겠지. 분명 다른 후계자들에게도 접근했지만 내가 파악하지 못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사실 벨라가 너무 허접해서 간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CEO로 있는 로렌 제약은 의약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 기업이다. 단지 로스차일드 가문 내에서는 큰 입지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게다가 로렌 제약은 로스차일드만의 기업이 아니다. 바로 발렌베리 가문과의 합작회사이다. 벨라를 통해 로렌 제약을 차지할 수 있다면 로스차일드와 발렌베리 가문 두 곳에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윌리엄 입장에서 벨라를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저 가지고 있던 자료 몇 개를 던져주면 되니까. 하지만 그럼으로써 얻는 이득은 크다.
물론 안 된다고 해도 손해 보는 건 없다.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르니 홀연히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 사라지면 그만.
여러모로 남는 장사인 것이다.
윌리엄이 가진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로스차일드보다 위에 있어. 로스차일드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가문 몇 군데에도 영향력을 뻗치고 있을지도.’
세계에는 로스차일드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쟁쟁한 경쟁력을 가진 가문들이 몇 있다. 그런 곳에 손길을 뻗는 놈이라면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놈은 에드먼드의 우연한 과거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정체를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꽁꽁 숨어있었다.
‘놈에 대해 당장 파헤치는 건 무리다. 그렇지만 그가 벨라를 통해서 뭔가 일을 꾸민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러면 벨라 쪽을 자극하는 게 낫다.
나는 시상식에서 본 벨라 로스차일드를 떠올렸다. 아득바득 자신이 잘났다고 우기려드는 모습이 마치 아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손쉬운 상대가 될 게 분명했다.
나는 엘렌 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상 2상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해주세요. 적어도 다음 주에는 터뜨리도록 하지요.”
윌리엄을 낚을 미끼를 던질 차례이다.
*
시간이 흘렀다.
로렌 제약에서는 기밀자료를 바탕으로 데이터 조작 및 추가 실험에 들어갔다.
효과를 입증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윌리엄이 건네준 자료에는 이미 실험의 결과가 모두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실험은 자료에 나와있는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됐다. 로렌 제약에서 그토록 고민하던 부작용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벨라는 찜찜한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생체실험이라니.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인 걸까?’
아버지라면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에 대해서 말하려면, 자신이 그 남자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까지 털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치료제 개발은 온전히 그녀의 공이여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공로에 그런 흠집이 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추가적인 자료를 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큰 문제인 신경세포의 괴사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데다, 어차피 부작용이 없는 완전무결한 치료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 남자가 준 자료를 적용해서 데이터를 조작하면 된다.
이정도로 부작용을 최소화했으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KW 제약의 이건우와 파이저 제약의 엘렌 홉스가 동시에 발표했다.
“포비드는 이제 종식되었습니다.”
“임상시험 결과 부작용은 0.01% 미만으로 발생하였고, 임상 2상에서 주로 생식능력 저하에 대한 부작용이 있었지만 해당 부분은 완전하게 해결하였습니다.”
벨라는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부작용이 0.01% 미만이라니 그게 말이 돼?”
부작용이 0.01%라는 말은 그냥 없다는 말을 표현한 것이다. 세상에 지금까지 저 정도로 부작용을 줄인 약은 거의 없었다.
벨라는 믿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임상시험 데이터를 자신만만하게 공개했다.
수많은 제약회사와 연구진들이 달려들어서 그들의 자료에 허점이 없는지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개월 전부터 전세계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치료제를 접종받은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완치되었으며, 사망자 1명뿐이었다.
심지어 이 고령의 사망자도 이미 증세가 많이 진행된 상황에서 각종 합병증이 발생하며 사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해결하긴 했다지만, 사람들 사이에 생식능력 저하에 대한 우려가 남아있어서 이에 대한 대책도 같이 발표되었다.
바로 개쩌는 정력제를 발명해내는 것으로 말이다.
엘렌의 파이저 제약이 워낙에 정력제로 유명했던 회사이니만큼, 반응은 뜨거웠다.
벨라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우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핵융합과 아크리액터를 만들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녀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분야이기도 했고, 덕분에 고상한 척하던 에드먼드가 나락으로 갔으니 좀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이제 자기 일이 되니까 황당했다.
아니, 부작용이 없는 완전한 치료제라니. 하다못해 그 흔한 독감 백신도 부작용이 있는데, 부작용이 없는 포비드 치료제를 일 년도 안 돼서 뚝딱 만들어 냈다고?
심지어 이건우는 예전부터 위탁생산을 위해서 모든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초도 물량을 풀어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로렌 제약에서 지금 개발 중인 모든 치료제는 모조리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개발도상국에나 풀어버리는 이류로 밀려난다.
‘안돼. 그러면 아버지가···.’
아버지의 실망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가자 벨라는 머리가 굳는 것 같았다.
그녀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소장을 불러서 물었다.
“어떻게 해야겠어?”
소장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작용의 최소화는 저희 역량 밖···.”
“그런데 이건우는 해냈잖아!”
벨라는 소리를 빽 질렀다. 연구소장도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이건우 같은 상식 밖의 놈과 비교하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이다.
‘이건우 그 새끼는 왜 제약에 발을 들여놓아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우가 가장 먼저 치료제 개발에 나섰고 나머지는 후발주자였지만 그런 건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부작용 0% 치료제 개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업적에 감탄하고 당황할 뿐.
사실 완전히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남자’에게 연락해서 나머지 자료를 받아오는 것. 하지만 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제 스스로 목줄을 채워서 건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비서가 들어오더니 노란 봉투를 전해주었다.
“대표님 앞으로 등기가 왔습니다. 검사해봤지만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벨라는 무심코 받다가 흠칫 놀랐다.
봉투가 호루스의 눈 문양의 밀랍으로 봉인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벨라는 시상식 때 보았던 남자의 가슴에 똑같은 브로치가 달려있던 걸 기억했다. 그녀는 서둘러 나이프로 봉투를 뜯어내고 내용물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서류가 수십 장 들어있었다.
그리고 겉면에는
- 파이저 코리아 대표 장현태
파이저 제약의 한국 대표 이름이 쓰여있었다.
*
장현태는 파이저 제약의 한국 지사 대표였다.
이번 포비드 치료제는 KW 제약의 이건우가 주도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제약 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굉장히 높아졌다.
그래서 장현태도 덩달아 지위가 높아졌다. 예전 같으면 파이저 제약의 지사 1 정도의 위치했을 그가, 이번에는 한국과 미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중요한 안건을 조율했다.
특히 글로벌 임상으로 진행된 임상 2상 같은 경우, 장현태가 한국에서 시행되는 임상시험을 직접 관리하면서 주도했다.
이번에 임상 2상을 완료했다는 발표와 함께 긴급승인절차에 들어간 이후 그는 더욱 바빠졌다.
일 년 전부터 생산설비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이제 양산에 들어가면서 시험 생산도 해보고 이런저런 사전 테스트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테스트가 끝나는 즉시 바로 양산에 들어가며, 그 후 긴급승인이 떨어지면 바로 미국과 한국에 동시에 물량을 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미국과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서 파이저 제약 본사로 왔다.
그리고 회장이 직접 보자는 연락을 받고 프라이빗 룸에 초대받았다. 그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업무적으로 몇 번 만나보기는 했지만, 보통 일은 실무자랑 얘기하지 이렇게 회장과 단둘이서 얘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렌 홉스는 확실히 미인이었고 그보다 어렸으니까. 뭘 어쩌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런 미인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를 들뜨게 했다.
그렇게 얌전히 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문이 달칵 열렸다.
장현태는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들어오는 사람은 엘렌 홉스가 아니었다. 붉은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왔다.
장현태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경쟁사의 CEO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벨라 로스차일드? 당신이 왜 여기에···.”
벨라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장현태 대표님. 엘렌을 사칭한 건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이 여기까지 순순히 올 것 같지 않았거든요.”
장현태는 자신이 경쟁사 CEO랑 밥을 같이 먹는 게 주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 알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벨라가 그를 잡았다.
“이렇게 가시면 후회하실 텐데요. 제가 깜짝 놀랄 것들을 준비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