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드러난 파편 (1)
영국 런던시티의 고급주택가.
에드먼드는 후계 경합에서 완전히 배제된 후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다. 요즘은 회사에 출근도 하지않고 매일 집에 처박혀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에드먼드는 여전히 오일로드의 CEO였다. 그에게는 아직 아버지가 내준 업무가 남아 있었다.
바로 석유 사업을 축소 및 정리하는 일.
자기가 직접 키워낸 사업들을 잘라내고 있는 에드먼드이건만,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기계처럼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그때 비서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을 텐데, 한참이 지나도록 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결국 비서는 한숨을 쉬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드먼드는 무료한 눈빛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는 비서가 몇 시간 전 봤던 곳 그대로였다.
“자회사 우르사의 지분을 모두 매각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놔두고 가.”
관심이 한 톨도 묻어나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 에드먼드는 서류에 박힌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말하였다.
비서는 걱정되는 마음에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했다.
“지금 몇 주째 나가지도 않으시고 안에만 있는 겁니까. 나오셔서 회사를 돌봐야지요.”
에드먼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텅 빈 시선에 비서는 흠칫 놀랐다.
“내가 여기서 뭘 더 해야하지?”
“······.”
보통 사람들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에 취해 방탕하게 생활하거나 환락에 몸을 담근다.
에드먼드는 그러지 않았다. 거의 본성처럼 세뇌된 절제가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대신 고통을 안으로, 안으로 삭였다. 그는 어떻게 감정을 분출해야할지 몰랐다.
에드먼드는 지금까지 가주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다.
놀고 싶어도 가주가 되기 위해 참았고,
하고 싶은 것도 가주가 되기 위해 참았으며,
사랑하는 여자도 있었지만 가주가 되기 위해 헤어졌다.
모든 삶의 목표가 가주가 되는 것에 맞춰져 있었건만, 그것이 사라져버린 지금은 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비서는 입을 뻐끔거렸지만, 공허한 눈동자에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되돌아 나오는 길.
정문에서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어서 보이는 반가운 얼굴.
“아가씨!”
클로이였다.
비서는 반색했다. 평소 에드먼드와는 친하게 지내던 클로이였다. 혹시 그런 클로이라면 그를 꺼내줄 수 있지 않을까?
클로이는 비서의 그런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방긋 웃었다.
“에디는 안에 있지? 마침 손님을 모시고 와서 말이야.”
“손님이요?”
비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이어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반반하지만 재수없게 생긴 얼굴.
단단한 체격에 딱 떨어지는 슈트 핏을 가진 남자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야, 좋은 데서 사네. 이런 데서 살려면 얼마나 들려나.”
클로이는 빙긋 웃었다.
“이런 저택은 돈보다는 인맥이 중요해요. 보통 매물로 나오지 않아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 거래되거든요.”
“아하.”
알겠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보다 못한 비서가 빽 고함을 질렀다.
“이건우!”
에드먼드를 나락으로 빠뜨린 장본인이 찾아왔다.
*
비서는 필사적으로 내가 들어오는 걸 막고싶어 했지만 클로이가 똑부러지게 말했다.
"동생이 오빠의 집에 찾아오는 걸 막을 건가요?"
"당연히 아가씨가 오시는 건 환영입니다. 하지만 저놈은···."
비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손님한테 저놈이라니, 로스차일드 비서는 입이 거칠군요."
클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건우 씨는 제 손님이니 이만 비켜줬으면 좋겠군요."
둘은 말이라도 맞춰온 것처럼 짝짜꿍이 잘 맞았다. 덕분에 비서는 복장이 터진다는 얼굴을 했지만 클로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긴 복도를 지나 2층에 있는 에드먼드의 서재로 향했다.
"헤이, 에디"
"클로이!"
클로이의 목소리를 들은 에드먼드의 눈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에드먼드는 바라보던 책을 내려놓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로이는 도도도도 달려가 그를 얼싸안고는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나빴어. 그날 이후로 연락도 안 받고."
"미안."
"사람 이렇게 걱정하게 만들거야?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야겠어?"
에드먼드는 쓰게 웃으면서 동생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퍽 정겨운 모습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고, 옆에는 작은 메모가 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자벨 로스차일드’
에드먼드의 어머니가 그린 건가? 엄청 잘 그렸네.
다른 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책장에는 책이 진열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도 서류와 책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마치 중세시대 어느 학자의 방 같았다.
여유롭게 주위를 구경하던 중, 나는 에드먼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드먼드는 내가 있는 줄 몰랐는지 흠칫 놀라며 클로이를 떼냈다.
배려심이 깊은 나는 손을 내저었다.
"하던 거 마저 해. 부담스러우면 나가 있을까?"
에드먼드는 표정을 싹 굳히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너를 초대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대번에 싸늘해진 분위기.
클로이는 우리 사이에 껴서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말이야. 건우 씨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프린트해온 문양을 보여주었다.
"이런 브로치, 본 적이 있나?"
에드먼드는 무심한 눈길로 문양을 바라보았다.
그가 후계자 경합에서 배제된 후 도망치듯 가문을 나오던 날.
이 브로치를 단 남자를 만났다.
당시에는 바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색이 잠긴 시간이 많아진 요즘, 에드먼드는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어릴 적, 그 남자를 만났던 일을.
"글쎄. 설령 안다고 해도 내가 왜 너한테 말해줘야 하지?"
에드먼드는 힐끗 보더니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도 같은 표정이었지만, 캐리온이 귀신같이 그의 동요를 알아챘다.
[동공이 40% 확장되었고, 입가 근육이 미세하게 비틀렸습니다.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습니다.]
역시 알고 있구나.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오일로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지 않나?”
에드먼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클로이도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야. 저번에 내가 했던 제안 기억하고 있지?”
몇들 전. 오일로드에 한서진을 앞세우고 쳐들어가서 말했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에드먼드에게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던지라 그는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그렇게 온갖 요란법석을 다 떨었는데 잊었을 리가.”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에드먼드는 그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버림받았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사정이 어떤지 알고 있다.
핵융합의 개발로 이제 석유 산업은 화학 부문만을 남겨두고, 조만간 사장될 예정이다.
이제 새로운 대체에너지 시장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걸 이건우가 꽉 잡고 있다. 지금 이건우는 그 시장에 참가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많이 쭈그러들긴 해도 그는 여전히 오일로드의 CEO였다.
오일로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이건우의 도움만 있다면 오일로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십 대부터 함께했던 회사에 대한 애정은 그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반대쪽에는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났다. 아직까지 잔재처럼 남은 가문에 대한 미련.
그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이건우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지.’
이건우는 손을 잡기에는 너무 예측할 수 없는 놈이다. 당연히 통제광인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상대일 터.
‘이건우와 손을 잡는 순간 가주 자리는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다.’
아니, 가문에서 에드먼드의 남은 자리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가문에서 자신은 끝났다. 가주?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가문에 대한 미련과 오일로드를 일으키고 싶은 욕망.
그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클로이를 쳐다보았다.
일찍이 가문을 나가서 자신의 사업을 일궈낸 그녀.
얼마 전 이건우와 손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명 아버지가 이건우를 배척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녀는 딱히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아직도 망령에 사로잡힌 그와는 달리 그녀는 항상 자유로웠다.
그 역시 본의 아니게 가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오일로드에서 로스차일드의 지분은 다 빠져나갔고, 가지고 있던 자회사도 상당 부분 매각되었다.
오일로드에 남은 건 그의 개인 재산뿐.
메이저 정유사들을 배후에서 쥐고 흔들던 오일로드는 이제 없다.
‘하지만 이건우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시장으로 들어간다면?”
Beyond-Oil Road
석유를 넘어서, 새로운 길을 찾아낼 것이다.
자신을 버린 가문에 대한 반발심.
자유롭게 제 뜻대로 살아가는 동생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다시 불붙은 성공에 대한 열망.
세 가지가 어우러져 에드먼드는 결정을 내렸다. 이건우가 내민 손을 잡이보기로.
“내가 그 문장을 본 건 열 살 때쯤이다. 아버지가 지금의 가주가 되기 전의 일이지.”
*
클로이,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이 태어났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계시던 침실에 들락날락하면서 갓 태어난 동생을 보러 가곤 했다.
에드먼드는 손이 많이 안 가는 조용한 아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특유의 장난기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부 침실에 붙어있는 아버지의 서재에 몰래 들어갔다.
딱히 별생각은 없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신기한 게 많아서 안 계시는 틈을 타서 구경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가끔 서재 의자에 앉아서 아버지 흉내를 내보는 것도 그의 비밀스러운 놀이 중 하나였다.
그 날도 그랬다. 커다란 책상에 폼을 잡고 앉아서 괜히 근엄하게 서류를 만지는 척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어왔다.
에드먼드는 후다닥 내려와서 커튼 뒤에 숨었다.
아버지와 한 남자가 들어왔다. 커튼 너머로 그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회색 머리칼을 빗어넘기고 중절모를 쓴 신사였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달린 독특한 브로치는 에드먼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이작이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에 와서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이보게. 아이작. 도움을 주는 건 나인데 그렇게 까칠하게 굴 필요가 있는가? 물론 그런 모습도 귀엽기는 하지만 말일세.”
에드먼드는 풉 웃을 뻔했다. 아버지한테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저 남자가 처음이었다.
아이작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남자는 한결같이 여유가 넘쳤다. 미네르바가 말했다.
“연합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 어때, 나와 손을 잡고 로스차일드의 가주가 되지 않겠는가?”
“당신 따위의 도움이 없어도 할 수 있어.”
“과연 그럴까? 자네 형은 인베스터 RC에서 역대 최고의 실적을 거두었지.”
로스차일드의 후계자 평가는 10년 이상에 걸쳐 이루어지며, 견제와 균형을 위해 최종 후보는 2명으로 정한다.
아이작과 그의 형이 최종적으로 선출됐으며, 그 둘은 차례대로 경영 수업을 받으며 인베스터 RC의 CEO와 영란은행의 CEO를 교대로 수행한다.
그리고 더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아이작도 무난하게 해냈지만, 그의 형은 인베스터 RC라는 투자회사에서 최고의 실적을 거둬버렸다.
아시아의 유동성 위기와 맞물려 시기가 공교롭게 맞아떨어져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성과를 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작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형님을 대신 죽여주기라도 할 건가?”
미네르바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형을 죽여주겠다는 제안.
에드먼드는 숨을 헙 들이마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