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시상식 (3)
노벨상 시상식이 끝난 후.
영국에 있는 로렌 제약 본사로 돌아온 벨라는 책상 위에 놓아둔 USB를 노려보았다.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남자가 주고 간 USB.
평소라면 코웃음 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USB를 받아 온 것이다.
따로 USB를 검사해서 특이사항이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했지만 돌아온 말은 특별히 발견된 게 없다는 말뿐이었다.
해킹툴을 비롯한 어떠한 프로그램도 달리지 않은 순수한 자료 그 자체.
벨라는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왜 나를 도와주려는 걸까?
과연 이 안에 든 것이 무엇일까?
기억나는 것은, 자신만만하게 도움이 될거라는 남자의 말.
‘엘렌 홉스와 나눈 이야기를 운운하며 찾아왔으니 어떤 식으로든 치료제의 완성과 관련이 있는 자료겠지.’
벨라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USB에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들어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걸 여는 순간, 분명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는 걸.
독이 든 성배와도 같았지만 그녀는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파이저의 임상 2상이 끝나고 치료제의 생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순간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거고, 로스차일드에서 벨라의 자리는 작아질 것이다.
그 와중에 이 USB의 자료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치료제를 완성할 수만 있다면 마케팅에서는 파이저보다 우위에 설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로렌 제약에서 만든 포비드 치료제가 전세계에서 최고가 된다면,
그 공로로 래스커상이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아버지도 나를 한번 돌아봐 주지 않을까?
사실 이미 그 뱀 같은 남자에게서 USB를 받아온 순간 이미 결정은 끝난 건지도 모른다.
벨라는 남아있는 망설임을 걷어낸 후 로렌 제약 연구소 소장을 불렀다.
"자료를 확인하고 어떻게 임상에 활용할 수 있는지 연구해봐."
*
연구소에서의 답변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받을 수 있었다.
벨라가 급한 사안이라고 강조한 것도 있었지만, 윌리엄이 건넨 자료는 연구소장을 혹하게 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 내용을 대략 파악한 그는 퀭한 얼굴로 벨라를 찾아갔다.
"이 자료는 미쳤습니다."
벨라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하자 소장은 덧붙였다.
"어디서 이 자료를 얻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료를 이용하면 지금 겪고있는 핵심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벨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이 썩 좋게 들리지 않았다.
10,000개가 넘는 후보 물질 중에서 이미 5개만을 채택하여 시험한 결과, 지금은 거의 하나의 후보 물질로 압축해왔다.
"설마 임상을 처음부터 해야한다는 건가?"
"후보 물질을 완전히 바꿔야 하니 일반적으로는 그렇긴 하지만···. 이게 보통 문건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소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라도 있나?”
“혹시 자료를 한번 읽어보셨습니까?”
벨라는 고개를 저었고 연구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읽어보셨다면 저에게 이걸 주시지 않으셨겠지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대표님이 가지고 오신 건 임상실험까지 다 끝마치고 최종승인 전 단계의 문건입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후보 물질을 테스트한 모든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벨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도대체 그 사람은 뭐야?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진즉 자기가 써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 소장이 벨라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그렇지만 비윤리적인 행위···. 그러니까 인체실험을 한 결과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함부로 열었다가는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문건.
자료에 담긴 비밀을 알게 된 벨라의 표정이 굳었다.
소장은 그런 벨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저 말고는 자료를 알고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담긴 자료는 지극히 단편적일 뿐입니다. 자료가 더 있다면 치료제를 완성하는데 마지막 열쇠가 될 수 있겠지요.”
벨라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남자의 메마른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만도 같았다.
“일단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으로는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나?”
“적어도 신경세포를 괴사시키는 그 부작용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장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 자료를 전해준 사람이 우리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있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고민하던 핵심 부작용에 대한 해결방안만 쏙 골라서 줄 수는 없겠지요. 아마 추가자료가 더 있을 겁니다.”
신경세포의 괴사. 로렌 제약의 치료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덕분에 얼마 전 이건우와 엘렌에게 대머리를 만드는 치료제라는 놀림을 받지 않았던가.
노벨상 시상식의 일만 생각하면 벨라는 지금도 이가 갈렸다.
이걸 해결할 수만 있다면, 치료제는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낄낄거리며 자신을 놀리던 두 연놈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부작용이 없는 치료제란 없다. 아직 두통, 발열 등의 사소한 부작용이 더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만 이용하고 묻어둔다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게다가 그 회색 남자의 저의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더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료에 관한 건 비밀로 해두고 그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벨라는 판도라의 상자에 있는 자그마한 희망을 생각하며,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의 뚜껑을 열었다.
*
나는 노벨상 시상식 때 얼핏 보았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달린 호루스의 눈.
그 독특한 브로치가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다.
어디에서 본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서 캐리온에게 노벨상 시상식장에 있었던 모든 CCTV를 조사하게 시켰는데, 재미있는 장면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벨라 로스차일드와 접촉하는 장면이었다.
[CCTV를 확인한 결과, 연회가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이 밀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밀실 안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이후 남자가 먼저 나오고, 잠시 뒤에 벨라가 나왔습니다.]
의문의 남성과 밀회. 수상한 냄새가 팍팍 풍겨왔다.
게다가 앞으로 포비드 치료제로 경쟁할 로렌 제약의 CEO가 접촉하는 인물인 만큼 주의해둘 필요가 있었다.
"저 남자에 관한 모든 자료를 추적해 봐."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남자에 대해서 추적한 결과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조사의 주체가 무려 캐리온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니?"
[이름은 윌리엄 미네르바. 그 외에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독자적인 위성망을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인공위성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센서 정보를 위조하거나, 지시나 제어를 위한 재 또는 스푸핑, 악성코드 삽입 등 네트워크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공격은 인공위성에도 통한다.
네트워크를 통해 지상국과 위성이 연결돼 있어 위성에 접속하는 단말을 해킹하면 위성을 해킹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에 IT 인프라를 공격하던 방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의 위성 단말기를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지상국의 단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사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흔적이 뚝 끊겨버린다.
아직 진행 중인 '스페이스 온 (민간우주사업)' 프로젝트가 완성된다면 상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벨라에게 관심이 갔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윌리엄 미네르바.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훨씬 더 위험한 건 바로 놈이라고.
나는 고민에 잠겼다.
상대가 어떤 놈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알고있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바로 그놈이 벨라와 손을 잡았다는 것.
‘그러면 상대적으로 허술한 벨라를 공격해 놈을 끌어내야겠지.’
그렇다면 전체적인 윤곽쯤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캐리온은 로렌 제약 쪽을 파보았고, 이번에는 유의미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최근에 연구소장의 컴퓨터에 들어온 자료입니다.]
나는 대충 자료를 훑어봤다.
"그냥 임상실험 보고서잖아?"
[그런데 특이점이 있습니다. 제가 노트북을 사용하던 시기에 미확인 바이러스에 대한 영상을 보내드렸습니다.]
"···언제적 이야기야"
무려 일 년 전, 내가 이건우의 몸에 처음 빙의했을 때.
그리고 캐리온이 노트북이라는 구린 장치에 박혀있을 때의 이야기다.
빙의하기 전, 나는 생물학 연합 연구소와 합작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했었다.
바로 전세계의 생물학 무기를 감시하는 감시망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가 딸려오면서 나는 포비드에 대해서 처음 알게되었다.
어쨌든.
그때 당시 캐리온이 '미확인 바이러스 영상'이라며 보내준 것이 있다. 나는 그 내용을 즉시 검색해서 일 년 전 보내준 영상을 꺼내왔다.
영상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병상에 누워서 가쁜 호흡을 내뱉는 사람들.
온몸에 붉게 올라온 발진.
지금은 너무 흔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했던, 포비드 환자였다.
"그런데 이게 왜?"
[이때 포비드에 걸린 사람들은 실종되거나 죽었습니다.]
실종된 이유는 중국 당국에서 입막음하려고 했다고 알고있다. 아니면 격리조치를 당한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거나.
그런데 진실 이면에는 더한 사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 이름이 보고서에 적혀있었습니다.]
···!
나는 말문이 막혔다.
중국에서 병에 걸려서 실종됐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로렌 제약의 임상실험 보고서에 적혀있다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지금 인체실험을 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윌리엄 미네르바가 중국에서 인체실험을 주도했고, 이 자료를 벨라 로스차일드에게 넘겨줬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직 완전한 자료를 넘겨준 건 아닙니다. 자료를 검토한 결과 넘어간 건 극히 일부분일 뿐. 완전한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자료가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했다.
첫째, 윌리엄 미네르바는 이름 외에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다.
둘째, 그가 벨라를 이용해서 포비드 치료제를 만들려고 한다.
셋째, 예전부터 중국에서 포비드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나도 생물학 무기 감시 프로젝트 때문에 포비드에 대해서 겨우 알아냈는데, 윌리엄은 그 전부터 포비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어떻게?'
폐쇄적인 중국은 로스차일드 가문조차 들어가기 꺼려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인체실험을 강행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데, 추적조차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끊임없이 맴도는 기이한 문양의 브로치.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며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벨라에게 접근했다면, 다른 로스차일드의 후계자에게도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즉시 클로이를 찾아갔다. 하지만 클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성만 로스차일드이지, 저는 가문 외부에서 사업을 이어왔거든요.”
“하지만 로스차일드 내부에서 십 년 넘게 사업을 해온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어요. 당신도 한 번 만나본 사람이지요.”
내 머릿속에 한 재수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네. 에드먼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