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시상식 (1)
KW 본사 앞.
클로이는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이건우를 찾아갔다. 꼭 팬 사인회에 덕질하러 가는 팬의 마음이었다. 오늘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을 했다.
특별히 이탈리아에서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원피스를 입었고, 생일날 아버지에게서 받은 보석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우아한 청자빛 원피스를 입고 한껏 멋을 낸 그녀는 마치 싱싱한 푸른 장미 같았다.
그녀는 수행비서와 함께 KW 본사에 찾아갔다.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가려는데,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
“어?”
마침내 마주한 이건우.
코앞에까지 닥친 이건우의 얼굴을 보자 클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우와···.’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선이 굵은 남자였다. 무심하게 내려보는 듯하지만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려있어서, 상반된 느낌이 묘하게 그녀를 자극했다.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뚫어져라 쳐다보자, 이건우가 먼저 말했다.
“로스차일드 양?”
그가 이름을 부르자 클로이는 그제야 참고있던 숨을 내쉬었다. 속은 떨렸지만 그녀는 우아하게 연습한 미소를 내보였다.
“반가워요. 클로이라고 불러주세요.”
‘저 남자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얼마나 짜릿할까?’
이건우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클로이. 안으로 들어오시죠. 먼저 찾아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클로이는 용건을 꺼냈다.
“아크 리액터. 제가 그쪽에 관심이 많거든요.”
물론 아크리액터에만 관심이 많은 건 아니겠지만.
*
클로이의 방문은 나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다.
먼저, 에드먼드와 꽤 관계가 좋다고 알려진 클로이가 나에게 찾아왔다는 점.
그 다음에는 에드먼드와 달리 꽤 예의바르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아크 리액터에 대해서 알고있다는 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한서진은 눈치껏 다과를 내오면서 나에게 속살거렸다.
“생긴 건 오빠랑 판박이인데 성격은 완전히 다르네요.”
그건 그렇다. 에드먼드만 보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싸가지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그녀의 점잖은 태도는 꽤 감명 깊었다.
클로이는 중세의 공주같이 기품이 넘쳐 보였지만, 에드먼드처럼 이질감을 주기보다는 함께 있으면 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예전에 캐리온에게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서 정리해오라고 한 내용이 떠올랐다.
클로이 로스차일드.
가장 어린 나이지만 물류계의 여왕으로 통한다.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아크 리액터를 운운하며 찾아왔다는 것은···.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에드먼드와 다른 길을 선택하다니 재미있는데.’
에드먼드가 패배한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에 후계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분명 나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을 것일 터인데. 어째서 이 여자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나는 궁금해졌다.
“여기엔 로스차일드로 온 건가요, 클로이로 온 건가요?”
클로이는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미소지었다.
“지금은 클로이로 왔어요. 물론 아버지는 제가 로스차일드로 있기를 원하지만, 아시잖아요? 저희 집안이 워낙 답답한 구석이 많거든요.”
클로이는 다른 후계자들과 다르게 가문 밖에서 제 손으로 사업을 일궈낸 것으로 유명했다.
당장 이 여자의 말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일단 호의적이라는 건 인지했다.
“아크 리액터까지 알고 왔다면, 제 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물론이죠. 당신은 이미 배터리와 반도체로 시장을 바꾼 적이 있지요. 이번에 만든 아크 리액터가 있으면 물류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올 거예요. 저는 퍼스트 무버가 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군요.”
“흠···.”
클로이와 손을 잡는다면 나로서는 떙큐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든 시장을 한 번에 삼킬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과연 로스차일드를 끊어낼 수 있냐 하는 것이다.
내가 고민에 빠지는데 클로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도 그러더니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때 캐리온이 말했다.
[클로이가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유욕?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크리액터가 그렇게 갖고싶은 건가?
마주보고 있는 우리의 오해는 그렇게 깊어져만 갔다.
*
어떤 오해가 있었던, 클로이와 이건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다.
나는 클로이에게 사업을 확장하다 보면 로스차일드와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을 확실하게 전달했고, 클로이도 그 점에 대해서 쿨하게 넘어갔다.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고, 저는 저에요. 가문에 매달리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시원시원해서 좋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캐리온이 특별히 작성해준 계약서로 이중, 삼중으로 대비도 해놓았다.
제일 중공업에서는 소형 핵융합로를 장착한 선박을 만들었다고 발표했고, 뒤이어서 클로이 또한 해당 선박을 이용해서 운송 부문을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물류업계는 출렁거렸고 ‘아크 리액터’가 앞으로 줄 영향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연료가 필요없는 자가발전을 하는 선박과 항공이라니?
운송료는 엄청나게 절감되고, 이는 운송업뿐만 아니라 고객 전반에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이제 이건우와 클로이가 앞으로의 운송업을 꽉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황당하군.”
아이작은 서재에서 중얼거렸다.
원가 절감은 산업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기업과 정부들은 그것을 위해 수십 년간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는 썩 대단치 않았다.
그런데, 이건우 혼자서 그걸 떨어뜨린 것이다.
희토류 가격하락.
전기료 인하.
유가 폭락.
운송료 인하.
이제 해당 시장들은 이건우가 완전 독점을 하겠지.
앞으로 더 뭘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더 어이없게 하는 건,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이 이건우에게 홀랑 넘어갔다는 것이다.
클로이의 사업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것이 아니라 개인 사업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그가 감 내놔라 배 내놔라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해서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식 두 놈이 이렇게 되자 아이작은 이건우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 아니, 이제는 경계심을 넘어선 적개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위험하군.”
반도체와 배터리, 에너지에 이어 이제는 물류까지. 이건우가 잠식한 사업이 너무나도 많아져 버렸다.
얼마 전 윌리엄과 대화한 대로, 이제는 이건우를 제거하는 게 최선으로 보였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아이작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이대로라면 이건우와 충돌할 것은 뻔한 상황. 과연 이건우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돈으로 압박할 수는 없다. 그가 이룬 건 금융자산이 아니라 실물자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까.’
그러다 한 가지 소식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회의를 하면서 들은 내용.
파이저 제약이 곧 있으면 2차 임상을 끝내고 자료를 취합하여 긴급승인절차에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다음 전장은 제약 부문이 되겠군.'
그리고 그에게는 제약 사업을 맡은 자식이 하나 있었다.
“벨라를 불러오게”
장녀이자 영국에서 가장 큰 제약회사를 가진 벨라.
밖으로 나돈 클로이와는 다르게 그녀는 로스차일드 내부에서 착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파이저 제약이 포비드 치료제를 개발한다고 뛰어든 이후, 수많은 제약회사도 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파이저 제약과 함께 2차 임상에 들어간 곳은 단 세 곳.
미국의 파이저 제약
중국의 원하오 제약
그리고 영국의 로렌 제약
로렌 제약은 정확히 말하자면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과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합작하여 세운 제약회사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제약 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화학 부문이 합쳐서 만들어진 회사로, 벨라가 지금 로렌 제약의 CEO를 맡고 있었다.
아이작의 부름에 벨라가 서재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벨라는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클로이와는 다르게 까칠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사나워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조금은 의존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궁금했다.
얼마 전 에드먼드의 실패 이후 후계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당연히 아들들을 먼저 찾을 줄 알았건만, 벨라가 가장 먼저 아이작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아이작이 물은 것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2차 임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아이작이 제약에 관심을 보일 줄 몰랐던지라 벨라는 의아해했다.
사실 제약업이 지금 포비드 사태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지, 가문의 주력 산업에 비해서는 한참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가 왜 관심을 보이···아! 오늘 아침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지.’
파이저 제약이 2차 임상을 끝내간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파이저 제약에는 이건우가 있다. 아버지가 부쩍 관심을 두는 이건우가.
그러면 적어도 파이저 제약에 밀린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2a상과 2b상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요. 충분히 많은 환자군에서 의미 있는 효력을 확인했고, 자체적으로 통계적 검증에 들어갔습니다.”
말은 자신있게 했지만 사실 이정도로 확실하지는 않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파이저 제약과 다르게 부작용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행을 해야하는 일. 하지만 이어지는 아이작의 말은 벨라의 마음을 흔들었다.
“2상만 통과되면 최종 승인이 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힘을 써주겠다.”
벨라는 눈을 번쩍 떴다. 이건 아버지가 자신을 밀어준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곧 결과로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인정받을 기회.
자신감 있게 대답한 벨라는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섰다.
어차피 아이작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새로운 백신을 만든다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벨라가 성과를 내는 순간, 이건우를 견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아이작이 직접 움직임에 나설 것이다.
벨라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생각을 마친 아이작은 이건우를 잡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위해 다시 한번 고민에 빠져들었다.
*
한국은 요즘 국뽕에 취해있었다. 하나만 있어도 대서특필할 사건이 무려 3가지나 연달아 일어난 것이다.
첫째, 한국은 처음으로 에너지 수출국이 되었다.
둘째, KW-파이저 제약에서 공동으로 개발하는 치료제가 곧 임상을 마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하고 핫한데, 무려 한국인이 노벨상 2관왕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은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전부 이건우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이건우의 주가는 끝도 모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들 이 세 가지 소식에 환호하면서 시끌벅적한 가운데, 나는 김상현 교수와 함께 있었다.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면서 나는 그를 위해 수제 정장을 주문했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핏을 확인해보러 갔다.
나도 같이 스웨덴에 가기 때문에 이번에 정장 몇 벌을 같이 주문했다. 김상현 교수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세상에. 말도 안 됩니다. 제가 노벨상 2관왕을 수상한다니···.”
“미스리늄을 발견하고 핵융합까지 실증했으면 충분히 받을만하죠.”
김상현 교수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제가 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미스리늄은 전적으로 닥터 온이 한 건데···.”
“아쉽게도 닥터 온은 죽었네요.”
“게다가 핵융합은 캐리 교수가 했고···.”
“캐리 교수는 대인기피증이 있고요.”
김상현 교수는 속이 터진다는 얼굴을 하고는 다시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남들은 받고 싶어하는 노벨상을 두 개나 수상받는데 왜 저러나 몰라.
나는 다시 한번 대타를 잘 골랐다는 생각을 했다.
수상식 당일. 긴장한 김상현 교수는 결국 청심환을 복용했고, 나는 각계각층의 인사에게 불려 다녔다.
그중 한 명이 파이저 제약의 CEO, 엘렌 홉스였다. 그녀는 스웨덴 국왕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나를 스웨덴 국왕에게 소개해줬다.
“제 동업자이자 친구인 이건우 사장님입니다. 사실 포비드 치료제를 만드는 데에는 이건우 사장의 연구팀이 뛰어난 공헌을 했지요.”
스웨덴 국왕은 반색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반갑네. 마침 오늘이 공식적으로 포비드가 나타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지. 파이저 제약에서 좋은 소식이 들릴 거라는 소문이 돌던데.”
파이저의 임상 2상이 끝나는 것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분명 포비드는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겁니다.”
“하하. 젊은 친구가 패기가 좋구만. 그렇지 않아도 과학원에서 자네 얘기가 한바탕 돌았다네. 도대체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배출해낸 연구소의 설립자라는 이건우라는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말이야.”
이 아저씨 얼굴에 금칠해주는데 재능이 있으시구만.
내가 대충 겸양을 떠는데, 엘렌 홉스가 불쑥 말했다.
“치료제가 좀 더 빨리 개발되면 좋았을 텐데 아쉽겠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아쉽다니?
내가 물어보자 엘렌 홉스가 말했다.
“치료제가 개발됐다면 공로로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탔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KW에서 후원한 사람이 3관왕을 쓸어가는 걸 텐데.”
“······.”
3관왕? 이건 거의 도둑놈 심보인데.
어이가 없어서 입만 뻐끔거릴 때였다. 엘렌 홉스의 뒤편으로 회색 머리칼을 빗어넘긴 중년 남자가 지나갔다.
특히 양복 깃에 달린 저 브로치.
낯설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순간 불쾌한 감정이 몸을 휩싸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자, 엘렌 홉스가 ‘괜찮아요?’하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이 느낌은 뭐지?
그 순간이었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