깽판치기 (1)
캐리온의 뉴클리온 프로젝트는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먼저 새로 지어질 핵융합로에 사용될 부품들을 만들 200개가 넘는 공장들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의뢰할 설계도를 완성했다.
또한, 이번 공정 역시 디지털화를 통해, 인원들의 동선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편성하고 업무를 분업화 및 체계화하였다.
이제 로날드가 관련 법안을 개정해주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핵융합로 설치를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캐리온에게 뉴클리온 프로젝트에 대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으며 웃음 지었다. 뉴클리온 프로젝트만 시작된다면 재수 없던 에드먼드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데.'
뉴클리온 프로젝트로 엿을 먹이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았다. 내 성격상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로 되돌려줘야 하는데, 아직 한 대 덜 때린 것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 사자성어 하나가 떠올랐다.
역지사지.
역으로 지랄해야 사람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 안다.
아무래도 에드먼드에게 직접 방문을 해야겠군. 어차피 오일로드 소재지와 에드먼드의 일정쯤이야 캐리온이 일찌감치 파악해놓았다.
나는 즉시 한서진을 불렀다.
"서진 씨. 지난번에 온 외국놈 말이에요. 좀 싸가지가 없었죠?"
한서진은 에드먼드의 얼굴을 떠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자기가 무슨 귀족이나 되는 줄 아는 꼴 하고는. 그런데 왜요?"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가서 갚아주죠. 미국으로 갈 준비하세요."
"···지금 그거 하려고 미국까지 가겠다는 거예요?"
한서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지만, 에드워드에게 지랄할 생각에 설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즉시 미국으로 향했고, 한서진은 한숨을 쉬며 내 뒤를 따라왔다.
*
석유회사 오일로드의 최상층.
비서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에드먼드를 보며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에드먼드가 큰 사고를 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도 없이 이렇게 사라진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아, 잠시 한국에 바람 쐬러 다녀왔다."
"한국이요?"
비서는 고개를 기우뚱하다가 일주일 전 한국에서 KW가 컨퍼런스를 개최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후원하는 조 베일리 후보가 거기에 갔다 왔다는 것도.
당시 KW와 오일로드는 큰 접점이 없었기에 비서는 당연히 에드먼드가 베일리를 만나고 왔다고 생각했다.
"아, 후보님을 만나고 오신 모양이군요."
"아니. 이건우 사장을 만나고 왔다. 그나저나 자리 하나 준비해. 그 사람이 내 밑으로 들어올 테니까."
하지만 에드먼드의 입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네?"
조금 전에 느꼈던 불안함이 깊어졌다.
이건우 사장에 대해서라면 그가 일전에 조사해서 바친 적이 있었다. 가문에서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인지라, 여섯 명의 후계자들도 따로 이건우에 대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던 것이었다.
조사를 담당하였던 비서는 이건우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불안감을 삼키며 물었다.
"그런데···그 사람이 에드먼드 님 밑으로 들어온다고 했나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지. 내가 직접 한국에 찾아가서 명함까지 주고 왔는데 당연히 들어오겠지."
"······."
비서는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지각했다.
에드먼드는 확실히 유능하기는 하다.
젊은 나이에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오일로드라는 회사를 굴리고 있었다.
특히나 메이저 정유사들과 OPEC의 산유국들 사이를 조율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이전의 CEO보다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일은···. 글쎄?
그는 워낙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이며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아래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박혀있다.
마치 중세의 귀족 같은 남자. 수직적인 관리에는 능하지만,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약점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일단 비서인 그가 실수하지 않도록 조언을 해왔고, 기본적으로 그의 능력과 배경이 워낙 뛰어난 덕에 그러한 행동들이 이해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건우도 만만치않아 보이는데.'
그가 직접 조사해본 이건우는, 능력 좋은 또라이였다.
망나니로 살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아버지를 쳐내고 미디어를 장악한 것부터.
포비드 사태를 예견하고 대비한 다음, 단숨에 회사를 확장했으며.
자원빈국으로 유명한 한국을 미스리늄과 희토류라는 자원 강국으로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그 성질머리다.
'아니, 또라이보다는 미친놈이라는 표현이 제일 잘 어울리겠군.'
일본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상대로 지랄을 한 일들은 워낙 유명하다.
이건우의 심기를 건드린 일본은 그래도 배상금과 독도를 토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중국은 지금 나라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소식통에 의하면 장웨이 주석은 파탄 난 경제를 살리느라, 정적을 견제하고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느라 피똥 싸고 있다고 들었다.
이건우 한 명을 잘못 건드렸다는 이유로, 미국과 대등하게 겨루던 패권 국가 하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한테 가서 그런 식으로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고?'
에드먼드는 '내가 부르는데 감히 안 오고 배기겠어?'라는 생각이었지만···. 글쎄올시다.
비서는 이건우가 느꼈을 황당함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접을 받은 이건우가 에드먼드에게 절대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끄응. 에드먼드를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비서인 자신이 보필했다면 적어도 최악으로 치닫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언젠가 이럴 줄 알았지. 에드먼드도 저 성질머리로 고생 좀 해봐야 해.’
하지만 비서의 걱정은 거기서 끝이었다. 단지 에드먼드가 조금 고생을 할 거라는 것, 딱 거기까지.
비서의 머릿속에도 에드먼드가 이건우를 손에 넣지 못할 거라는 계산은 없었다.
에드먼드는 유능했으며, 그는 로스차일드였다.
지금까지 로스차일드의 이름 앞에서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었다.
비서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구상하는 와중, 에드먼드는 스웨덴의 왕립 한림의원에서 입수한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 김상현 교수가 화학상 최종 후보로 선정됐습니다. 그런데 이번 핵융합 논문 발표로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 위원 중 한 명인 맷 존슨 교수는 ‘할 수만 있다면 물리학상 후보로 올리고 싶다’라고 했다더군요.
원래 노벨상 심사 과정은 극비리로 진행되며, 그 과정은 50년 후에야 공개된다.
또한, 노벨상 수상자는 발표 당일 몇 시간 전까지도 공표되지 않는다.
심사위원회에서 후보를 선정해서 올리더라도, 왕립 한림의원에서 최종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수상자가 언제고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매년 이렇게 심어둔 사람을 통해 심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동향을 전해 받고 있었다.
그는 산업의 근간은 바로 기초과학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벨상 후보자들을 미리 알아내고 그들을 후원함으로써 과학과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이 작전 덕분에 로스차일드와 에드먼드는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누구보다 앞서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왕립 한림의원에서 최종 권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웬만하면 위원회가 올린 후보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존슨 교수가 물리학상 후보를 바꾸고 싶다고 할 정도라면, 이번에 이건우가 발표한 뉴클리온 프로젝트가 상당히 가능성 있다고 본 것이로군.'
굉장히 흥미로운 정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진짜 후보가 바뀔 일은 없겠지만.
아무리 파격적인 논문이라고 해도 그저 이론일 뿐, 그것을 실증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융합 연구는 설비를 갖추는 데에 있어서도 최고 수준의 정밀 공정이 필요하다.
수백 개의 기업이 부품을 만들고, 그 부품을 현장에서 조립해 설비를 만드는데, 오차는 2mm에 불과하도록 제작하는 정밀 공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론이 완벽하다고 해도 현실화하는 데 생기는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입증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게 상식이다.
"뉴클리온 프로젝트라···."
에드먼드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비서가 물었다.
"뉴클리온 프로젝트라면 이건우가 지난주에 발표한 프로젝트 아닙니까?"
"그래. 거기에 관심이 생기는군."
올해에 후보가 될 수는 없겠지만, 존슨 교수가 이름을 거론했다는 것은 앞으로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의 이름으로 후원한 프로젝트로 노벨상을 수상한다면 '에드먼드'라는 이름값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후계자 경합에서도 도움이 될 테고.
그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아봤는데 꽤 떠들썩하더군요. 석유업도 이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때가 됐지요. 그런 점에서 저도 뉴클리온 프로젝트가 매력적이라고 느낍니다."
당신이 이건우를 만나서 초 치고 오는 바람에 당장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서는 마지막 말은 삼키고 적당히 의견을 피력했다.
친환경 바람이 불면서 석유업계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탄소 중립'에 참여하는 만큼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에너지 산업도 화석연료에서 신재생에너지로 대체되고 있고, 석유 기반 연료를 사용하는 항공 해운 업계도 바이오 연료로 넘어가고 있다.
그런다고 석유업계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파이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시장이 줄어드는 만큼 경쟁이 치열해지고,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체에너지 산업에 투자해야 한다.
에드먼드 또한 최근 석유 산업을 확장하는 것을 멈추고, 친환경 에너지나 재생에너지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드먼드의 눈에 이건우가 진행하는 뉴클리온 프로젝트는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
심지어 뉴클리온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건우.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이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이건우를 끌어들여서 나의 울타리 안에서 핵융합 연구를 완성한다면 로스차일드는 새로운 동력원을 차지할 수 있겠군."
아니, 그것을 넘어서 에너지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에드먼드의 머릿속에서 이미 그가 에너지 시장을 장악하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비서는 자신만만한 에드먼드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글쎄. 이건우가 과연 순순하게 끌려올까?’
그리고 그의 짐작은 금세 확신이 되었다.
쾅!
"음?"
오일로드의 최상층에서 별안간 굉음이 들렸다. 에드먼드와 비서가 흠칫 놀라서 밖을 쳐다보았다.
콰앙!
그 굉음은 점점 사장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비서가 황급히 일어났다.
“제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그 순간,
콰아앙!
사장실의 문이 박살나는 것과 동시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나동그라졌다.
이 황당한 사태에 에드먼드와 비서는 박살 난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문이 박살나면서 일은 먼지가 가라앉으며 킬힐을 신고 있는 늘씬한 다리가 등장했다.
"어휴,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네."
에드먼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 여자는?’
한국에서 본 적이 있는 이건우의 비서.
한서진이었다.
한서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에드먼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얼굴이 붉어진 에드먼드가 한서진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문 너머에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서진 씨. 아까는 툴툴거리면서 따라와 놓고서, 지금은 제일 신난 것 같은데요?"
싸가지 없어 보이는 얼굴. 능글맞은 목소리.
에드먼드가 바로 며칠 전 만났던 천재 사업가였다.
그가 반반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잘 지냈어?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갑네."
이건우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