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러브콜 (2)
로스차일드.
그들은 한때 미국과 함께 패권을 다투었던 중국의 몰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주이자 로스차일드 그룹의 회장인 아이작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결국 장웨이 주석이 사과문을 발표했더구나.”
그러자 중년의 남성이 오만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돈만 많을 뿐, 천박하고 상식이라곤 없는 놈들이니까요.”
그 말에 주변이 있는 인물들도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잠시, 가장 상석에 있는 앉아있던 아이작 로스차일드가 입을 열자 회의장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미리 중국 시장에서 발을 빼서 손실은 최소화했다만, 중국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로스차일드는 안정보다 갈등을 원한다. 갈등 상황만큼 돈이 되는 것은 없으니까.
그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분쟁 상황들을 조장하며 각종 이득을 얻었다.
비슷한 이유로 로스차일드는 특정 국가나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 시장이 폐쇄적이라 개입하는 게 어렵기는 했지만, 그들은 공들여서 배후를 조종하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여러 가지 갈등을 만들었다.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시장은 요동쳤고, 그 사이에서 로스차일드는 막대한 이익을 챙겨서 유유히 떠나곤 했다.
그러나 한 달 전. 그들은 중국과 이건우와의 싸움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챘다.
자금의 흐름에 누구보다 예민하던 그들이기에, 이건우가 무언가를 꾸민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당시 아무도 이건우가 중국을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 로스차일드는 다른 결단을 내렸다.
파생상품 시장에 크게 투자를 했던 그는 빨리 손을 털어버리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중국 시장이 무너진 것이다.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아이작 로스차일드는 생각에 잠겼다.
‘이건우’
최근 그의 머리 한구석에는 그 젊은 기업인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았다. 비록 이건우 때문에 계획이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감을 갖지는 않았다. 이건우가 아무리 커져봤자, 본인과 가문을 건드리기에는 한참 모자랐으니 말이다.
다만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근에 저렇게 빠르게 성장한 사람이 있었던가.’
일 년도 되지 않는 사이, 그 혼자서 중국과 일본을 무릎 꿇린 것이다. 한국, 대만, 일본, 중국. 네 개의 용이 싸우던 동아시아 시장은 단 하나의 패자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오는진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기술을 가지고있단 말이지.’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세계 곳곳에 깊숙이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건우가 활약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이건우는 영리하게도, 현대 사회의 꼭 필요한 분야를 골라서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우를 주의해서 지켜볼 필요가 있겠구나.”
아이작의 말을 들은 후계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말은 후계자들에게 내리는 과제나 다름이 없었다.
후계자들은 각자 이건우에 대한 평가하기 시작했다.
‘흥.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겨우 동양인 따위일 뿐.’
깔보는 사람도 있었고,
‘이건우라···. 확실히 그의 기술은 쓸만하지.’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도 있었으며,
‘흐응. 아버지가 관심을 보일 정도면 꽤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이건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로스차일드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
캐리온은 생각했다. 캐리 교수는 아직 전산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연구를 진행하려면 대타가 필요하다.
그리고 예전에 이건우가 구해다 준 대타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죽어버린 닥터 온의 대타이긴 했지만, 꽤 똑똑한 게 쓸모는 있었다.
캐리 교수는 KW 에너지 소속 연구소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이건우가 캐리 교수를 영입한 것으로 꾸몄다.
KW 에너지에서는 김상현 교수의 주도 아래, 미스리늄과 이차전지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생긴 지 반년밖에 안 된 연구소다 보니 아직 규모 자체는 작았다. 또 마침, 소장인 김상현 교수는 그 반년 동안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강연했기 때문에 고질적인 인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캐리 교수가 들어온 것이다.
김상현 교수는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가 KW 에너지로 왔다는 말에 동질감을 느꼈고,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인력 부족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김상현 교수는 부푼 마음으로 캐리 교수에게 바로 전화를 날렸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같은 KW 에너지 연구소에서 일하는 김상현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김상현 교수는 묘하게 딱딱한 여자 목소리에 뭔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같은 식구가 됐는데,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까칠하고 예민한 김상현 교수가 모처럼 친근하게 다가갔지만,
[싫습니다.]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
“네?”
[싫다고 했습니다. 제가 대인기피증이 있습니다.]
대인기피증이 있다는 사람이 뭐 이렇게 말을 잘해?
“···아, 예. 대인기피증. 그러시군요.”
그런데 이 상황,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김상현 교수는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그가 존경하지 마지않는 닥터 온과 온캐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김상현 교수가 대충 전화를 마무리하고 끊으려는 찰나, 캐리 교수가 제안했다.
[제가 미스리늄을 이용한 핵융합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합동으로 연구해 보겠습니까?]
“···대인기피증이 있다면서요?”
[요즘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직접 만나서 연구합니까. 서면이나 통화로 진행합시다.]
[교수님의 메일로 제가 연구한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한 번 까여서 빈정이 상한 김상현 교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시지요.”
그리고 몇 시간 뒤, 논문을 읽은 김상현 교수는 새벽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캐리 교수에게 전화했다.
“이건 혁명입니다! 일본의 미스리늄 폭파 사건에 착안해서 핵융합으로 끌고 들어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플라스마 상태를 유지하면서 초고온을 유지하려면 안전성을 포기해야 하죠. 반면에 안정성을 유지하려면 초고온을 포기하거나. 하지만 교수님이 제안한 대로 실험이 성공한다면···. 두 장점의 교집합만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무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제대로 이해하신 것 같네요. 그럼 업무 분담을 하죠.]
[플라스마 가열과 비유도성 전류 구동을 담당하게 될 중성 입자빔 입사형 가열 장치와 RF파를 이용하는 ICRH와 마이크로파를 이용하는 LHCD까지. 각각의 전류 구동 방식에 대한 예측 모델을 정리해 보내주세요.]
“···네?”
[이 정도는 내일까지 하실 수 있죠?]
김상현 교수는 끼기긱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두 시.
“어, 교수님? 그게···.”
[김 교수님이라면 할 수 있을거라 믿어요. 그럼 이만.]
“······.”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연구감에 김상현 교수는 왠지 모르게 대학원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
그렇게 캐리-김상현 교수의 합동 연구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사실 캐리온의 연구가 끝난 상황에서 대타를 통해 논문을 쓰는 과정만 남았지만, 발표를 해야하는 김상현 교수가 캐리온의 기술을 이해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캐리온은 하루빨리 논문을 올리고 싶은 마음에 어마어마한 수준의 연구자료를 김상현 교수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아마 몇 주 안으로 마무리 짓고 논문을 실을 것이다.
그사이 나는 컨퍼런스를 기획했다. 각국의 기업을 초대해서 사업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지려는 것인데, 정확히는 회의보다는 파티 형식을 빌린 사교 모임이다.
목적은 전세계에 파워온 배터리와 나노온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는 것.
거기에 더해서 캐리온과 김상현 박사가 연구하고 있는 '뉴클리온'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나는 홍보를 위해 전세계를 상대로 매력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이번에 최대규모의 파워온과 나노온 공장 설립지를 정하려고 하는데 관심 있으신 분? 참고로 새로운 기술도 발표하려고 합니다."
내 말이 나가자마자 각국에서는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파워온이랑 나노온 공장을 또 증설한다고?"
"이번에는 최대규모라잖아. 강원도에 들어간 돈이 10조가 넘어."
"그럼 최소 10조는 투자한다는 거네?"
"KW에서 또 새로운 기술을 발표해? 나노온 기술을 발표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당연히 엄청난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로라하는 기업과 정부에서는 당장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이 소식에 누구보다도 열렬히 반응하는 것은 미국에 있는 두 사람이다.
바로 로날드 클린턴과 조 베일리.
미국 대선을 3개월 앞둔 두 대선후보는, 이건우가 공장을 증설하겠다고 말하자마자 즉시 참모진을 불러모았다.
*
미국은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다. 대선의 주요 쟁점은 크게 포비드에 대한 대응과 포비드로 인해 침체한 경제를 어떻게 살리는지로 좁혀지고 있었다.
먼저, 포비드 대응에서는 로날드 클린턴이 우세했다. 다이아몬드 엠페러 호 사건 때문에 북미 지역이 작살나기는 했지만, 확산 초기에 어느나라보다도 앞서서 중국발 항공편을 막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니온-트래킹이라는 선진적인 시스템을 도입해서 빠르게 행정을 안정화한 것도 주효했다.
반면, 야당에서는 포비드 사태 때문에 미국 경제가 위험에 처했다며 로날드 클린턴을 공격했다.
방역에서 선방한 것과는 별개로, 미국 경제는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포비드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찍었고, 공장 가동이 올스탑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국의 주요 기업, 특히 제조업을 중심으로 주가는 연일 하향세를 갱신했다.
그래서 양당은 외쳤다.
"미국의 제조업을 부흥시키자!"
‘경제 부흥’, 특히 제조업의 부흥은 양측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안이었다.
제조업이 살아나는 것은 일자리 증가로 직결된다.
일례로 로날드 클린턴은 재임 동안 제조업에 신경을 썼고, 제조업 일자리 증가로 인해 유색인종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봤다. 실제로 흑인과 히스패닉의 클린턴 지지율은 4년 전보다 꽤 많이 올랐다.
또한 세계 모든 선진국에서 제조업 공장과 서플라이 체인을 국내로 가져오는 ‘리쇼어링’이 중요해지면서 더더욱 그랬다.
어쨌든 양당의 대결 구도는 치열해졌으며, 그 누구도 어떻게 흐를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팽팽했다.
절묘하게 균형이 맞아떨어진 시소.
그렇기에 아주 약간의 무게만으로도 시소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등장한 이건우라는 거대한 무게추.
“세계에 최대 배터리와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후보의 참모진들이 입을 모았다.
“배터리 공장을 지으려면 미시간주를 비롯한 러스트 벨트가 유력 후보지이고,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면 캘리포니아를 위시한 선 벨트가 유력합니다.”
러스트 벨트와 선 벨트는 주요한 경합주이다.
“만약 이건우가 한 후보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러스트 벨트와 선 벨트 지역이 손에 떨어질 겁니다.”
“거기에 덤으로 네바다주까지 가져올 수 있겠군요.”
이건우가 네바다주에 희토류 공장을 지으면서 주의 경제가 살아났다는 건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에 따라 네바다주에서 이건우의 지지도는 올라간 셈. 이건우가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순간, 네바다주의 표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러스트 벨트에 선 벨트, 그리고 네바다주까지.
모두 이건우의 손에 달린 것이다.
계산이 서자마자 두 후보는 당장 트윗을 날렸다.
- 이건우가 나와 손을 잡고 미국에 공장을 지을 거라고 믿는다!
시작은 클린턴이었다. 평소 트윗을 자주 하는 클린턴답게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베일리도 만만치 않았다.
- 말만 하는 클린턴과 달리, 나는 직접 이건우를 만나러 한국에 가겠다.
조 베일리의 트위트를 본 로날드 클린턴은 눈이 뒤집혀서 지지 않고 트윗을 날렷다.
- 뭐? 나도 가겠다!
그러고는 비서에게 명령했다.
“당장 전세기 띄워! 한국으로 간다.”
이건우의 한마디에, KW는 다시 한번 세계 외교의 장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