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건 나눠봐야지 (1)
야심한 밤. 검은 인영 하나가 허둥지둥 KW의 연구소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고영훈이었다.
‘내가 해냈어! 해냈다고!’
손에 USB를 꼭 쥔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중국에서 약속한 50억이, 대기업의 센터장이 된다는 명예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가 꿈꿔왔던 목표가 이렇게 쉽게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니!
고영훈은 재빠르게 준비한 차에 올라탔다. 액셀을 꾹 밟았다. 흥분한 그의 눈에 신호가 보일 리가 없었다.
어차피 곧 한국을 뜰 몸, 신호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인천으로 향했다. 컨테이너들이 잔뜩 쌓여있는 항구에 도착하자 저 멀리 왕센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그가 거칠게 차를 세우자 왕센주가 창문을 두드렸다. 왕센주는 고영훈의 흥분 어린 얼굴을 보며 일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USB는?”
“여기에 있소.”
왕센주는 USB를 파우치에 담아 품에 챙겨 넣었다. 그의 얼굴 역시 흥분으로 가득 찼다. 전 세계가 노리는 파워온을, 마침내 그가 손에 넣은 것이다.
심지어 국가안전부의 수많은 요원이 계속해서 실패를 해오던 작전이었다. 덕분에 왕센주의 성공은 더욱더 돋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 있으면 공로를 인정받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 어디 지부장 정도는 충분히 승진할 수 있을 것이다.
“배는 준비됐습니다. 바로 출발하지요.”
그 말에 고영훈은 당황해했다.
“지금 바로 말이요?”
“문제가 있습니까? 신변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히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줄은 몰랐다. 왕센주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이끌었다.
“당신은 우리 중국의 영웅이오. 준비가 안 된들 뭐가 문제겠습니까? 모든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몸만 있으면 됩니다. 가족이 걱정이라면 중국에 들어간 후 바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해드리지요.”
고작 기업의 그룹장이던 그를 영웅이라고 추켜세워주니 고영훈의 마음은 들떴다. 가족에게 말도 없이 떠나는 게 걸리기는 했지만,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왕센주의 말마따나 도착한 후에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면 된다.
그리고 고영훈이 받은 50억 원이라면 가족들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지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위용 위용 위용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항구에 가득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찰?”
“아니, 어떻게.”
저 멀리서 경찰차의 파랗고 붉은 경광등이 열심히 돌아가며 그 둘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고영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어떻게 벌써?’
고영훈이 작전을 시행한 지 채 몇 시간 되지도 않았다. 지금 연구소에는 그의 팀원이었던 사람 혼자서 당직을 서고 있을 터였고, 고영훈이 연구소를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그의 작전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경찰이 나타난 시기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고영훈이 저지른 짓은 명백히 산업스파이 짓이다. 여기에서 잡히는 순간 50억이고 나발이고 그냥 시궁창에 처박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영훈과 왕센주가 당황하는 사이, 경찰차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중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
“고영훈 씨,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고영훈은 머리가 핑 돌았다.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차에서 내린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두 명이다. 잡아!”
“2팀은 배편을 확인해라!”
고영훈이 왕센주에게 물었다.
“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빨리 갑시다.”
그 순간, 왕센주는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고영훈을 달려오는 경찰 쪽으로 밀어버렸다.
“어, 어어?”
그대로 왕센주는 뒤돌아 달렸고, 고영훈은 경찰들 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잽싸게 뛰어온 경찰 두 명이 고영훈을 체포했다.
고영훈은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까지 멍하니 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와 명예가 눈앞에 있었는데.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저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으아아아! 비켜! 야이, 왕센주 개새끼야!”
정신을 차린 고영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경찰은 고영훈을 손쉽게 제압하며 싸늘하게 미란다 원칙을 읊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질문을 받을 때 변호인에게 대신 발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할 경우, 국선변호인이 선임될 것입니다. 이 권리가 있음을 인지했습니까?”
고영훈이 뭐라 대꾸하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손이 그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대답은 필요없어. 매국노 새끼야.”
*
나는 한서진과 함께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고영훈을 제물로 바친 왕센주는 결국 무사히 탈출해서 배에 올라탔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도망가네요. 일부러 놓아줬다는 것도 모르고.”
한서진이 피식 웃었다.
“역시 중국답네요. 한순간에 고영훈을 배신하고 도망치다니.”
“잘된 일이지요. 그래야 해킹 프로그램이 무사히 중국으로 배달될 테니까.”
그때 한 경찰이 다가왔다. 경찰은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금세 사복으로 돌아왔다.
경찰 역할을 맡은 KW 미디어 소속 배우, 장원준이 씩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나는 장원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오랜만이다. 연기 실력이 많이 늘었네? 누가 봐도 경찰인 줄 알겠어.”
이번 작전에서 나는 진짜 경찰이 아니라 KW 미디어 소속 배우와 연기 지망생을 썼다.
진짜 경찰을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경찰이 왔다면 도망친 요원까지 잡아버렸을 테니까.
내 목표는 배신자를 잡는 것뿐만 아니라, 경찰까지 왔다는 급박한 상황을 조성해 요원으로 하여금 USB가 진짜 파워온이 담겨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그 요원이 성한 몸으로 중국에 입성해서 냉큼 USB를 바칠 수 있다.
그리고 그 USB를 컴퓨터에 연결하는 순간,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저 멀리 떠나가고 있는 요원이 중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
이건우의 기도 덕분일까? 왕센주 소장으로 위장했던 요원은 무사히 중국에 도착했다. 쓰촨성 지부 소속 요원인 그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지부장에게 찾아가 자신의 성과를 자랑했다. 지부장은 요원의 보고를 듣더니 말했다.
“고생했다. 탈출에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용케 잡히질 않았군.”
무려 경찰까지 나타나 요원을 추격했었다. 그 말은 한국에서 가져온 파워온 기술이 진짜라는 것이다.
요원은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고영훈이 잡혔습니다. 아마 한국에서는 이 일을 가지고 저희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흥. 그래 봤자지. 감히 소국이 하는 말 따위는 무시하면 그만이야.”
지부장은 코웃음을 치고는 USB를 가지고 국가안전부 부장에게 갔다. 부장은 큰 웃음을 터뜨리며 치하했다.
“하하하. 그래, 이게 그 파워온이란 말이지?”
이놈 때문에 근 한 달 동안 얼마나 속이 탔던가. 매일 같이 불려가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문책을 들었는데, 드디어 그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요원에게는 확실한 포상을 해주게. 주석께서도 이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시니, 자네에게도 분명 큰 보상이 있을 거야.”
지부장은 입이 찢어질 듯이 미소지으면서 겸손을 떨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흐흐. 그러면 이제 뚜껑을 한번 열어볼까?”
먼저 국가안전부에서 자료를 점검하고, 주석에게 보고한 뒤, 과학기술부에 넘겨주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난다.
그렇게 부장이 국가안전부의 PC에 USB를 꽂아 넣는 순간이었다.
파앗!
국가안전부에 있던 모든 화면이 꺼지더니 블루스크린이 떴다. 그리고 화면을 꽉 채운 하얀 글자.
[CARRY ON]
캐리온이 심어둔 해킹 프로그램이 중국 국가안전부 서버망을 완전히 장악했다.
“?”
“?
예상치 못한 사태에 두 사람의 반응이 늦어졌다. 지부장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 이, 이게 무, 무슨···.”
부장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부장을 다그쳤다.
“너, 너! 지금 도대체 뭘 가져온 거야!”
“아니,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분명히 이것 때문에 경찰에게서 겨우 도망쳐 중국으로 들어왔단 말입니다. 이게 진짜 기술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지부장이 횡설수설하다가 말을 뚝 그쳤다.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생각해보니 경찰이 등장한 타이밍도 너무 공교로웠다. 마치 일부러 그 순간에 나타난 것 같았다.
만약 이게 다 이건우가 꾸민 일이라면?
그렇다면 이건 진짜 기술이 아니라···.
“이 멍청한 새끼야! 네가 속은 거잖아!”
부장이 화를 버럭 내며 지부장을 걷어찼다.
“컥!”
모욕적인 일이지만 지부장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해킹 프로그램이 서버에 깔린 거라면 국가안전부의 모든 기밀이 한국의 민간기업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는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일은 이미 터지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직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장님! 관리자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컴퓨터가 통제되지 않습니다.”
“기밀문서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당장 멈춰야 합니다!”
“코드! 코드를 뽑아버려!”
“여기만 셧다운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서버 전체로 퍼졌어요.”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우왕좌왕하는 꼴에 부장이 소리를 꽥 질렀다.
“당장 전력실에 연락해서 전원을 차단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심지어 기밀문서의 태반이 이건우에게 넘어갔다. 그냥 복사해서 넘어가는 것도 문제인데, 캐리온은 기존에 있는 문서를 모두 삭제해버리고 복구할 수 없게 해버렸다.
국가안전부의 모든 자료가 사라졌으니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는 건 당연한 수순.
이 일을 주석이 알게 된다면?
끔찍한 재앙에 부장이 소리를 질렀다.
“이건우!!!!!!!!”
*
캐리온이 만든 해킹 프로그램은 중국의 보안 시스템을 손쉽게 무력화시키고, 웜 바이러스를 뿌렸다.
그 성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역대 최고 수준으로 대량 감염을 일으켰습니다.]
뭐, 그렇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복제해 빠른 속도로 네트워크에 흘려보내 시스템을 파괴하고, 나에게 기밀문서를 전송했다.
심지어 국가안전부에서 쓰는 서버망은 이미 바이러스로 오염되어서, 서버망 자체를 폐기해야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나는 컴퓨터로 차곡차곡 쌓이는 자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중국 측 국가보안부의 내부망에 접근할 방법이 없어 답답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 작전으로 인해 그 답답함이 모두 해소되었다.
“그러게 사람을 잘 봐가면서 건드렸어야지.”
목차만 훑어봤는데도 예민한 사안들이 많다.
어후, 도대체 뭐부터 터뜨려야하는 거야?
즐거운 마음으로 문서를 둘러보던 중, 좋은 생각이 났다.
이 깜찍한 정보들을 나 혼자만 보기는 너무 아까운데?
재밌는 게 있으면 또 나눠 보는 게 인지상정.
나는 세계 각 국가의 정보기관을 대상으로 경매를 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