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5)
늦은 밤.
오성 ENP의 상무이사이자 CTO 부문 기술센터 그룹장인 고영훈은 자주 가는 바에 앉아 혼자서 연거푸 독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형욱의 라인에 서서 권력을 누리던 고영훈은 이제 퇴직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전태영이 사장이 되자마자 전형욱 라인의 최고기술책임자가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더니, 어제는 그의 직속 상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불명예퇴직을 당했다.
이제 다음 차례가 누구인지는 보나 마나 뻔했다.
"젠장. 새파랗게 어린놈이 사장이 되다 보니 회사가 이게 무슨 꼴이야."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고민을 할 줄은 몰랐었다. 오성 ENP는 한국의 배터리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으며, 그는 사장 라인을 잘 잡고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CTO (최고기술경영자)까지 승진하고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다가 편안하게 회사 생활을 마무리 하는 것이 그의 최고의 꿈이자 목표였다.
하지만 파워온의 등장으로 전형욱이 퇴임한 후,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이제 CTO는커녕 며칠 내로 잘리게 된 상황.
그래도 능력을 인정받아서 파워온과 기술제휴 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전형욱 라인을 쳐내는 데 혈안이 돼 있는 신임 사장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놔둘까?
오성 ENP는 파워온 덕분에 기사회생했다지만 고영훈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그때였다.
"고영훈 그룹장님?"
그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봤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누구시지요?"
"CTL에서 왔습니다."
"CTL이요?"
고영훈은 의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CTL이면 한때 오성 ENP의 경쟁회사이자, 지금은 파워온 덕분에 신나게 내리막길을 달리는 회사 중 하나였다.
중국의 인사를 한국의 술집에서 만난다는 게 영 수상쩍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방은 거리낌 없이 명함을 건넸다.
"CTL 소속 상하이 미래 에너지 연구소 소장 왕센주입니다. 잠깐 합석해도 될까요?"
"예?"
그리곤 고영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았다.
"요즘 오성 ENP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고영훈은 코웃음을 쳤다.
"어렵다고 해도 CTL만 할까요. 그래도 우리는 기술제휴를 해서 심폐소생기는 달았다고 볼 수 있지요."
"아, 제가 말을 잘못 했군요.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왕센주는 말을 고쳤다.
"오성 ENP가 아니라, 센터장님이 요즘 많이 힘들지 않습니까. 라인을 잘못 탄 덕분에 잘릴 위기에 놓여있잖아요. 아, 물론 당장 잘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위태로운 건 사실이잖아요?"
그렇다. 당장은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를 대체할 인재는 차고 넘친다. 회사의 안정화 때문에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 신임 사장은 언제라도 그의 입맛에 맞는 인재로 갈아치울 수 있다.
물론 신임 사장에게 항복하고 충성맹세를 할 수도 있지만···.
"라인을 갈아타려고 해도 신임 사장 곁에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함께한 사람들이 포진해있어서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지요."
"······."
고영훈은 할 말을 잃었다. 왕센주의 지적은 아주 정확했다. 덕분에 그는 지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쳐있었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방문한 술집에서, 암담한 현실 이야기를 꺼내자 기분이 팍 상해버린 고영훈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요."
왕센주는 주위를 보다가 아무도 보는 눈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속삭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CTL에 오십시오."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영훈은 조금 놀랐지만, 이미 이쪽 업계에서 중국의 방식은 유명했다.
"맨입으로 하는 소리는 아닐 테고 원하는 게 있소?"
"짐작하실 텐데요."
왕센주는 미소를 짓더니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썼다.
파워온.
"으음"
"사례금 50억과 함께 우리 쪽 센터장으로 모시겠습니다."
50억과 센터장이라는 직책. 지금의 자리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몸담고 있던 회사를 한순간에 배신한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
고영훈이 고민하자 왕센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민하실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저 말고 다른 동료는 그룹장님이 아니라 다른 타겟을 점찍어뒀거든요."
“다른 타겟?”
고영훈은 되물었지만, 왕센주는 그저 미소만 짓더니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고영훈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에 빠졌다. 왕센주의 말을 듣자 술이 확 깨는 기분이다. 특히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다른 타겟을 점찍어뒀다라. 그러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접촉했다는 건데. 누구일까?’
대충 예상가는 사람이 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두어 명 더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오성 ENP와의 의리를 지킬까,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찾아서 떠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했다.
“제가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겠습니까?”
*
오성 ENP의 내부 상황은 백번 양보해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전형욱은 자신이 남겨놓은 세력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고, 전태영은 그들을 하나같이 다 찍어내고 자신의 사람들로 채웠다.
그런 의미에서 전태영은 썩 좋은 경영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기존에 있던 인원들을 어떻게든 포용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건만, 전태영은 그저 전형욱의 사람이었다면 무자비하게 찍어내 버렸다.
덕분에 전형욱 라인에 있던 임원들은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중국은 그 점을 영악하게 이용한 것이고.
하지만 중국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던, 모두 내 손바닥 안이었다.
나는 캐리온에게 오성 ENP의 주요 인사를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고, 캐리온은 고영훈이 중국에 연락하자마자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후 한서진에게 고영훈의 동선에 CCTV와 도청장치를 설치하라고 시키고, 캐리온에게는 고영훈 주변을 비롯하여 그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를 감시하라는 주문을 해두었다.
그렇게 고영훈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자기까지 모든 행동은 나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메인 컴퓨터를 해킹해서 기술을 빼돌리려고 한다는 거지. 언제쯤 결행할 것 같나?"
[열흘 뒤에 고영훈의 팀에 있던 사람이 당직을 섭니다. 그때 결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미리 준비해야겠군."
감히 내 기술을 해킹하려고 하다니. 그러면 그대로 갚아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예의를 잘 아는 나는 메인 컴퓨터에 있는 기술에 락을 걸어놓은 다음, 해킹하려고 할 때 오히려 해킹 프로그램이 역으로 깔리게 시켰다.
그러면 USB에 담긴 해킹 프로그램은 중국의 깊숙한 곳까지 안전하게 배달되겠지.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중국의 기밀을 털어먹을 수 있겠는가?
중국이 자신들의 심장부에 무엇을 숨겨놓았을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었다.
*
고영훈은 중국 편에 서기로 결심한 뒤부터 차근차근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다 같이 중국에 가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내는 반대했다. 중국에 포비드가 횡행하고 있으므로 안전한 한국에서 아이를 기르고 싶다는 것이다.
고영훈도 포비드가 마음에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중에 들어올 50억과 수억 원의 연봉, 그리고 센터장이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포비드의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어차피 평생 중국에 있을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센터장을 하면서 돈과 명예를 누리다가, 커리어를 좀 쌓고 한국에 돌아와서 유명한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는 것이다.
무려 파워온을 가져왔으니 중국에서도 그 정도 대우는 해주지 않겠는가?
행복한 상상을 펼치던 고영훈은 빠르게 재산을 처분했다. 그리고 나서 계획을 세웠다.
마침 며칠 뒤가 예전에 그의 팀에 있었던 팀원이 연구소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잠깐 담배 좀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뒤 작업을 하면 될 터였다.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냥 왕센주가 준비해준 USB를 메인 PC에 꽂기만 하면 끝이다. 그러면 USB에 있는 해킹 프로그램이 알아서 필요한 정보를 복사해온다고 하였다.
"잘 될 거야."
눈앞에 부와 명예가 어른거렸다. 그저 간단히 USB를 한번 꽂았다가 빼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실패할 경우 상당한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지만, 그래도 중국에서는 CTL에 센터장 자리는 보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안 돼도 센터장, 잘 되면 50억까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지."
그리고 후보가 여럿이 있다는 점도 그의 결정을 앞당기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어차피 회사도 자신을 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자기라고 회사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
고영훈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도둑질을 정당화하였고, 어느새 작전의 결행일이 다가왔다.
*
나는 한서진, 그리고 윤단아와 함께 사장실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옆에는 아들 지우도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KW의 원년 멤버들과 함께 하다 보니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마 싯 써!"
지우도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짜장범벅을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어이구. 우리 지우 짜장면도 잘 먹네."
젓가락질을 못 해서 포크로 푹푹 쑤셔 먹는데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물론 한서진은 옆에서 지우가 흘리는 짜장면을 치워주랴, 입을 닦아주랴 정신이 없어 본인의 몫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지우야. 이러면 옷에 다 묻잖아."
"히잉"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은 지우는 잠깐 시무룩해졌다가, 내가 손에 만두를 쥐여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는다.
아, 힐링 된다. 이러려고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걸까?
"어이구 형아가 하나 더 줄까?"
"아 조 씨!"
"하하. 건우 형 해봐."
"아 저 씨!"
이놈이?
윤단아가 그 모습을 보고 얼음 같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이번에 탕수육을 한입 크기로 잘라서 지우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지우는 기름기가 묻은 손을 모으고 배꼽 인사를 했다.
"누 나 고 마 습 니 다."
···왜 윤단아는 누나고 나는 아저씨인데?
한서진이 그 모습을 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자식 교육은 잘 했죠."
"···제가 그래도 동안 소리는 듣고 다닙니다만."
"원래 군대 갔다 오면 다 아저씨 되는 거예요."
젠장.
그때 지우가 티비 화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시 커 먼 아 조 씨!"
우리의 회식 장소 벽 한쪽에서는 연구소의 CCTV가 재생되고 있었다. 지우의 손가락이 가르치는 곳에는 모두 퇴근하고 당직만 남은 지금, 한 인물이 등장했다.
시커먼 고영훈 아저씨였다.
그는 돈을 쥐여주고 당직을 서고 있던 직원을 내보내더니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는 컴퓨터에 USB를 꽂아 넣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결국 이런 선택을 하는군."
캐리온이 말했다.
[저장장치에 있는 해킹 프로그램을 무효화합니다.]
[미리 설치해 둔 해킹 프로그램을 저장장치로 옮깁니다.]
시간이 흐르고 작업이 무사히 끝난 것을 확인한 고영훈은 USB를 뽑고 허둥지둥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그는 그 USB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저게 보물이기는 하지.
이제 캐리온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해킹 프로그램은 중국으로 가서 나에게 모든 비밀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제 저희도 가지요."
고영훈이 작전을 짜는 동안, 당연히 나도 재미있는 작전을 세웠다.
해킹 프로그램은 무사히 중국으로 빠져나가되, 배신자는 우리 손으로 잡는 작전.
나와 한서진은 저 배신자를 잡아 족치기 위해 일어섰다. 윤단아는 지우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여기서 제가 상황을 전달해 드릴게요."
한서진이 생긋 웃었다.
"우리 지우 잘 부탁해요."
"걱정마세요."
이제 경찰 놀이를 시작해볼까?
*
선착장 주위로 높고 낮은 건물이 늘어서 있고, 나와 한서진은 주변 지형이 잘 보이는 건물 옥상에 자리잡았다.
나는 시선 끝에는 고영훈이 타고 있는 차가 걸려있었다. 망원경을 통해 상황을 보고 있던 한서진이 말했다.
“저기 왕센주가 오네요.”
그녀 말대로 한 남자가 고영훈의 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고영훈은 USB를 건넸고, 왕센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단단히 챙겨 넣었다.
임무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넘친 두 사람.
그들과 함께 나도 웃었다.
왕센주가 내가 준비한 선물을 무사히 국가안전부에 전달해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