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4)
김상현 교수는 지금의 직장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학교와는 분위기가 달랐지만, 생동감 있는 실험실의 분위기도 좋았다.
"예. 아무래도 교육을 우선시하는 학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더군요. 하지만 저는 제 연구결과를 상품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연구결과를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기업은 실적 위주가 아닙니까. 장기적인 연구에는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김상현 교수는 이건우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실적 위주라. KW 제약을 처음 인재를 영입할 때 각 사람에게 천억씩 연구비를 배정해주면서 하고 싶은 연구를 다 하라고 했던 일화는 유명했다.
이런 사람이 실적 위주로만 투자한다고?
아니, 누구보다 연구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김상현 교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 그런가요?"
티엔이는 당황했다. 실리만을 따지는 기업 문화를 비판하며 김상현 교수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도 만약 기업에서 상품화가 어려워서 연구를 중단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글쎄요. 그런 일이 있을까요? 일단 기초과학을 하는 사람에게 경제효과까지 연구하라는 건, 아기를 낳을 때 변호사가 될지 의사가 될지 판단해서 낳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의 경제적 용도만 바라보기보다 장기적 안목을 가진 사장을 만나는 게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저는 투자자를 잘 만났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닥터 온의 논문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최고의 환경이나 다름없다.
김상현 교수도 수십 개의 논문을 쓴 저명한 연구가지만, 닥터 온의 논문은 매번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지 매번 감탄하며 닥터 온의 논문을 보았다.
결론적으로 김상현 교수의 근무 환경은 최고였다.
닥터 온의 논문을 볼 때마다 얻는 창의적인 영감.
마르지 않는 연구비.
최고의 시설을 가진 연구시설.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최신식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워주었다.
김상현 교수의 말에 티엔이는 할 말을 잃었다. 도무지 파고들 틈이 안 보인다. 아니, 자신도 연구자로서 이런 환경에 근무하는 사람은 빼낼 자신이 없었다.
티엔이가 판단하기에 김상현 교수를 회유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면 파워온 기술을 빼낼 수밖에.
티엔이가 플랜비로 넘어갈 때였다.
지이잉
김상현 교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건우였다.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김상현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예.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다름이 아니라 최근에 티엔이 교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김상현 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만, 사장님께서도 티엔이 교수를 알고 있습니까?"
"네. 그 사람은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산업 스파이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김상현 교수는 할 말을 잃었다.
"···네?"
"방금 확인한 사실입니다. 저에게도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 간부가 접근하더군요. 혹시나 해서 교수님께도 연락드린 건데 큰일 날 뻔했네요.”
김상현 교수는 티엔이가 있는 방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제게서 파워온 기술을 빼내려고 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역으로 그들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그 사람과 대화할 때 모든 대화를 녹음해주십시오. 혹시라도 증거가 발견되면 바로 신고할 수 있게 말입니다.”
스파이를 역으로 이용하자는 이건우의 제안에 김상현 교수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증거를 잡아내겠습니다.”
“예? 아니, 그렇게까지 각오를 하실 필요는···.”
이건우의 당황한 말이 이어졌지만, 김상현 교수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핸드폰에는 어느새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차게 식었다.
감히 닥터 온의 기술을 빼돌리려고 해?
*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밍메이는 저번에 일이 틀어진 이후, 맥 오스턴에게도 버림받았다. 맥 오스턴은 그녀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며 화를 내고 떠나버렸다.
'겨우 기업 사장 주제에 나에게 대들어?'
하지만 맥 오스턴이 홧김에 그녀가 국가안전부 소속이라는 걸 말할 수도 있으니, 그녀는 끓는 속만 다독이며 화를 가라앉혔다.
대신 맥 오스턴에게서 미리 받아놓은 이건우의 번호를 알아내서 연락했다.
이건우가 전화를 받았다.
"네. 이건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메이린이에요."
뚝
하지만 이건우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곤 곧바로 밍메이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밍메이에게는 더는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티엔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끈질기게 김상현 교수에게 들러붙었지만, 김상현 교수는 넘어올 것 같으면서도 넘어오지 않았다. 파워온 기술을 캐내려고 대화를 유도했지만, 김상현 교수는 핵심이 나오기 전 교묘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렸다.
'밀당의 고수야 뭐야. 연애하면 존나 잘 하겠네.'
그렇게 밍메이와 티엔이는 한 달의 시간 동안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지부장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지부장의 보고는 곧바로 부장에게 올라갔고, 부장의 시름은 깊어졌다.
"한 달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다고?"
"죄송합니다. 그래도 친분을 쌓고 나면 이후에는 일사천리입니다. 시간을 요하는 일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하의 밍메이도 이건우에게 바람맞았다면서?"
밍메이의 미인계는 국가안전부 내부에서도 유명했다. 국가안전부 내에서도 밍메이가 찍어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
그런데 그런 여자가 이건우에게 바람맞다니. 지금 중국 국가안전부 내에서는 이건우가 고자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소문과 달리 이건우는 여자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끄응···."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한 달 사이에 파워온은 배터리 시장을 점점 더 잠식해나갔다. 그리고 중국의 배터리를 구매하려는 기업들은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에 파워온과 관련된 핵심 인물인 이건우와 김상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KW 산하 공장장들의 회유도 영 시원치 않았다.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중국의 '중'자만 들어가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간다고 한다.
이제 KW 코퍼레이션 소속의 모든 인사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었다.
부장의 미간 주름이 점점 더 깊어지는 순간, 지부장이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이 남은 게 있습니다만."
"무엇인가?"
"얼마 전 오성 ENP가 이번에 KW 에너지와 기술제휴를 맺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기술을 빼내오는 건 어떨까요?"
부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성 그룹? 그곳은 이건우의 외가가 아닌가. 그쪽에서 우리를 도와줄까?"
"그게 요즘 사정을 알아보니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오성 ENP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중심에 이건우가 있습니다."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부장은 흥미가 돋았는지 관심을 표했고, 지부장은 부장의 반응에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었다.
"이건우가 처음 파워온을 만들 때, 전 오성 ENP 사장인 전형욱이 그렇게 방해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건우는 전형욱을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고, 그 아들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흠. 이건우도 보통 작자는 아니구만."
"그러니까 혼자서 그 정도의 기업을 일궈낸 거 아니겠습니까. 고작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말입니다."
국가안전부 부장은 아까워서 혀를 찼다. 그런 인재가 중국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포비드 터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략 8개월이 되는 기간 동안, 이건우가 이룬 업적은 남들이 평생 해도 이루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내부에서 분란이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전형욱은 자신이 남겨둔 라인을 가지고 회사를 뒤에서 장악하려고 하고 있고, 아들인 전태영이 그들을 쳐내고 있습니다."
"호오"
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전 사장의 라인은 지금쯤 불안에 떨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 점을 이용하면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요원이 오성 ENP 쪽 사람과 접촉 중입니다."
"좋아. 그럼 계속 진행해보도록."
지부장과 국가안전부의 부장은 야심차게 새로운 계획을 실행했다. 그 모든 계획이 캐리온에게 실시간으로 들통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나는 생각했다.
‘이들이 과연 나와 김상현 교수에게만 접근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파워온과 관련된 모든 주요 인물에 대한 감시가 필요했다.
나는 캐리온에게 지시했다.
"최근 중국에서 해킹을 시도했던 날부터 오늘까지 한국에 입국한 중국인을 모두 조사한 후, 국가안전부와 관련된 인물을 파악해."
[알겠습니다.]
캐리온의 조사는 빠르고 정확했다. 캐리온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중국이 일곱 명의 요원을 한국으로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김상현 교수에게 두 명을 보냈고, 세 명은 미스리늄 제련 공장에, 나머지 두 명은 기술제휴를 맺은 오성 ENP에 보냈다.
나는 김상현 교수에게 연락한 다음, 미스리늄 제련 공장장들을 불러모았다.
“최근 중국인이나 조선족이 접근해오지 않았나요?”
“예? 없었습니다만.”
“제 와이프가 중국 쪽과 무역을 해서 만날 기회는 많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타이진 이라는 회사에서 명함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히 아직 중국 쪽으로 넘어간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언젠가 중국에게 매수당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좋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중국 놈들을 피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공장장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뭐, 혹여라도 넘어가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각오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계약서에 써 놓은 비밀유지조항은 기억하시지요?"
내가 이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만큼, 비밀유지조항을 어길 경우 페널티도 상당했다. 못해도 수십 억대의 위약금을 물어야만 했다.
나의 살벌한 분위기에 공장장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여기에 추가적으로 당근을 쥐여줬다.
"대신 중국의 요청을 거절하신다면 그 횟수만큼 제가 보너스를 지급하도록 하지요. 물론 그 증거는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이어지는 보상에 공장장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증거를 수집한 후 도망가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캐리온에게 지속적으로 보고받은 결과, 공장장들은 중국이라면 명함만 받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오성 ENP.
중국이라면, 내가 꽉 쥐고 있는 KW 에너지보다 오성 ENP를 공략하기가 더 쉬워 보일 것이다.
그만큼 오성 ENP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권력 교체가 일어나면서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KW 에너지와 기술제휴를 맺은 연구소에 주요 인사들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의미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상무이사이자 CTO 부문 기술센터 그룹장인, 고영훈이 국가안전부 요원과 접촉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군."
확인한 결과 고영훈은 전형욱의 라인에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 윗대가리부터 하나씩 모가지가 날아가고, 이제 고영훈의 차례까지 다가왔다고 한다.
기술제휴를 맺는 프로젝트에 가담한 만큼 바로 잘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만간 해고당할 게 분명한 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캐리온이 파악한 바로도 그랬다.
[고영훈과 국가안전부 요원이 접촉한 정황을 보내드립니다.]
[국가안전부의 요원이 고영훈에게 거금과 함께 중국 기업의 센터장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근데 고영훈 씨. 당신 이번에도 잘못된 라인을 타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