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3)
KW 에너지의 최상층, 이건우의 집무실.
밍메이는 재빠르게 이건우를 스캔했다. 이건우의 신상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지만, 직접 만난 이건우의 인상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날렵한 턱선을 가진 남자다운 얼굴에서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업가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분명 호색한이라고 하였지만, 그의 눈에서는 음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맥 오스턴과 인사하던 이건우는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이 여성 분은 누구신가요?”
“아, 제 비서입니다. 재주가 많은 친구이지요.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습니다.”
맥 오스턴이 그녀를 소개하자, 밍메이는 수백 번 연습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기품 있으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는 남자라면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사장님을 수행하고 있는 메이린이라고 합니다.”
“메이린. 중국인이신가요?”
“어머니께서 중국인이시고 저는 호주인이랍니다.”
“그렇군요.”
이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밍메이는 이건우의 질문을 자신에 관한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하루라도 여자를 끼고 다니지 않은 날이 없는 망나니라고 했지.’
당장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분명 속으로 음심을 숨기고 있는게 분명했다. 밍메이가 본 사람 중에서도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지금 포비드가 터진 이후로 사람들의 만남이 제한되고, 또 사업이 승승장구하느라 바빠지면서 여자를 만날 상황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밍메이는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쌓인 욕정이 상당할 터, 조금만 성적으로 자극해줘도 넘어올 것만 같았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고, 밍메이는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이며 준비한 서류를 건넸다. 열린 셔츠 틈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기 계약서 최종본입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건우는 밍메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을 돌리긴커녕 그냥 손만 뻗어서 서류를 받았다. 오히려 엉뚱한 맥 오스턴이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장부터 유혹에 실패한 밍메이의 웃는 입꼬리가 살짝 떨려왔지만, 어차피 한 번에 쉽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오히려 옆에 있는 오스턴이 자꾸 쳐다보는 통에 작전이 실패할까 짜증이 났다.
‘저 변태 새끼. 눈알을 확 파버릴까.’
하지만 무심하게도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다. 둘은 한 시간 동안 주구장창 계약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이미 실무진이 세부 조율이 끝난 부분인데도, 이건우는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가 어떻게 끼어들 틈도 없었다.
밍메이는 그저 계속 멍하게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웃고 있는 입꼬리가 떨려오고 높은 힐을 신은 탓에 다리가 저릿저릿해질 때쯤, 이건우가 휴식을 제안했다.
“조금만 쉬었다 하지요.”
오스턴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그러지요. 저는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메이린 양도 좀 쉬어요.”
“감사합니다.”
오스턴은 눈치 좋게 이건우와 둘만 남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밍메이는 눈을 빛냈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흠흠."
밍메이는 목을 가다듬으며 하며 인기척을 내었다.
하지만 둘만 남았는데도 이건우의 눈은 서류에만 박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 남자의 시선을 돌릴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고전적이지만 확실한 효과를 보여주는 방법이 떠올랐다. 마침 그녀의 앞에는 식은 차가 있었다.
밍메이는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일부러 옷 앞섶에 그대로 차를 부었다.
“어멋!”
밍메이가 비명을 지르자 이건우가 드디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얇고 하얀 와이셔츠가 찻물로 젖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너머로 속옷과 속살이 은은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밍메이는 어쩔 줄 모르는 척하면서 이건우를 바라보았다.
‘남자라면 이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갈 리 없지.’
아마 분명 손수건이나 티슈로 옷을 닦아주러 오겠지. 그러면서 작은 인연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우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밍메이는 굳어버렸다.
경멸이 느껴지는 눈빛. 그 눈빛에 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남자에게서 저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건우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아깝다는 듯, 밍메이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어버리고는 다시 계약서에 몰두했다.
황당한 마음에 옷이 젖은 채로 멍하니 있던 밍메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건우가 들리도록 혼잣말을 했다.
"아아···. 옷이 다 젖어버렸네. 이를 어쩌지?"
젖은 와이셔츠를 양 손가락으로 집어 들며 최대한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건 덤이다.
하지만 이건우는 밍메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계약서에 고정한 채,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슈는 저쪽에 있으니 알아서 닦으세요.”
“···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거 고자 아니야?
지금까지 항상 통해왔던 기술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린 탓에 밍메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번 닫힌 이건우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밍메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망나니라며?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넘어와?’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긴다. 저 남자를 꼭 굴복시키고 말겠다는 오기가.
그녀가 한 번 더 시도하려는 순간이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맥 오스턴이 돌아왔다.
“하하.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그리고 이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네?”
“그러니까 기분이 나빠서 계약은 못 하겠습니다. 계약은 없던 이야기로 하죠.”
“네? 아, 아니. 사장님.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라도 알려주셔야죠.”
“글쎄요. 그 이유는 저 비서가 잘 알 것 같은데요.”
“메이린이요?”
오스턴이 당황한 표정으로 이건우와 밍메이를 번갈아 보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제가 없는 사이에 저희 비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밍메이는 그녀 나름대로 억울했다. 옷에 찻물까지 묻히고도 남자를 꼬시지 못한 게 억울한데 누명까지 뒤집어쓰다니.
“잠시만요, 사장님.”
그녀가 마지막 시도를 하려고 이건우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미끄덩
대리석 바닥에는 조금 전에 밍메이가 흘린 찻물이 흥건했다. 그리고 밍메이가 신고 있던 신발은 굽이 높은 하이힐. 그녀는 중심을 잃고 이건우를 향해 쓰러졌다.
“꺅!”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맥 오스턴과 당황한 표정의 밍메이.
그리고 쓰러지는 밍메이를 보며 재빠르게 피하는 이건우.
밍메이는 그렇게 이건우를 스쳐 땅바닥과 키스를 했다.
“······.”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몸 위로 이건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서를 다시 뽑으셔야겠어요. 이렇게 어설픈 사람이 비서라니.”
말을 마친 이건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중국의 이건우 회유 작전이 보기 좋게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
이건우는 망나니 시절 다양한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연습생들부터 탑 급 연예인들까지. 그의 영혼에 동화된 나 역시 눈이 한껏 높아졌다. 심지어 지금 내 영혼은 50대의 워커홀릭이다. 그것도 일에 빠져 결혼도 하지 않은 지독한 워커홀릭.
눈이 한껏 높아진 50대의 워커홀릭. 꼬시는 난이도가 이미 천장을 뚫고 하늘까지 닿은 수준이다.
밍메이가 아무리 이쁘다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아 이쁘구나 하는 수준이었다. 그 이상의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독이 든 게 뻔한 사과를 먹을 바보는 없었다.
[맥 오스턴의 비서실을 확인한 결과, 메이린이란 사람은 없었습니다. 과거의 인사기록을 뒤져보았지만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쯤 되니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시간 동안 협상을 질질 끌면서 캐리온에게 추가적으로 정보를 확인해보라고 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몇 주 전에 중국에서 해킹을 시도했었지.'
KW 코퍼레이션을 설립한 이후, 중국이 해킹하는 건 매달 행사처럼 있었다.
미니온-트래킹을 개발했을 때부터, 최근에는 파워온을 만들었을 때까지 그들은 계속 KW 보안망을 뚫으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 미팅 몇 주 전에 있었던 해킹은 그 규모가 조금 달랐었다. 중국은 작정이라도 한 듯, 여러 경로를 통해 필사적으로 캐리온의 보안망을 뚫으려고 하였다. 물론 결과는 똑같았지만 조금 예외적인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마침 중국계 회사에, 중국계 사장에, 중국계 비서가 접근을 해오네?
심지어 비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수상하기 짝이 없다.
원래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건 짝퉁이고, 그다음은 스파이가 아닌가.
메이린의 정체를 짐작한 나는 다른 경로로 접근하기로 했다.
'캐리온. 국가안전부 위주로 밍메이와 신원이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휴식을 선언할 때쯤, 캐리온이 자료를 물고 왔다.
[신원을 파악했습니다. 이름은 밍메이, 중국 국가안전부 장쑤성 지부 제6 판공실 소속으로 해외 정보와 방첩 임무를 담당하는 간부급 인사입니다.]
“호오”
나는 스스로 찻물을 뒤집어쓰고 나를 향해 같잖은 유혹을 던져오는 밍메이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감히 내 기술을 빼돌리려고 했다 이거지?
정체 모를 비서의 신원을 알아낸 이상, 더는 이들과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나는 즉시 계약을 엎어버린 다음, 두 사람을 쫓아냈다. 맥 오스턴은 난동을 피우며 항의를 했지만, 한서진이 나서자 상황은 간단하게 종료되었다.
두 사람이 나간 뒤, 나는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중국이 이런 수를 쓰다니, 앞으로는 중국 회사뿐만 아니라, 중국계 자본이 들어간 회사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 인물들에게도 주의하라고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예전에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캐리온에게 그가 누구와 접촉하는지 확인해서 일주일 단위로 보고하게 시킨 적이 있었다.
역시나 중국 스파이가 김상현 교수에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밍메이와 같은 소속의 한 남성이 김상현 교수에게 접근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1주일 전, 과학기술증진협회 관계자로 위장해 배터리 관련 전문가들을 강연에 초청하며 접촉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김상현 교수와 남성의 미팅이 잡힌 것을 확인했습니다. 장소는 연구소 근처에 있는 중식당입니다.]
"알았어. 김상현 교수에게도 언질을 줘야겠군."
김상현 교수는 요주 인물이다. 중국의 더러운 손길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김상현 교수를 꼬시기 위해 접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성이 연구자이다. 돈과 명예보다는 탐구욕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었다.
닥터 온의 논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가 KW 에너지 연구소에 남아있을 이유는 충분했다.
*
같은 날 저녁. 김상현 교수는 협회 관계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과학기술증진협회 관계자로 일주일 전에 개최된 세미나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 꽤 말이 잘 통했다.
이름은 티엔이. 중국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데, 한국 대학에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 딱 봐도 값 좀 나가 보이는 음식을 두고, 티엔이가 자랑하듯 말했다.
"중국에 있을 때는 정부에서 연구비를 팍팍 지원해줘서 어떤 연구를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매번 투자에 걸맞은 성과를 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하지만 우리 중국에서는 당장에 성과를 내지 못해도 압박을 주지 않더군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는 또 다른 부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김 교수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에서 나와 연구소에 들어가시다니요. 기업에서 연구 활동은 어떤가요? 아무래도 대학교랑 많이 다르지요?"
티엔이의 자랑에 김상현 교수가 피식 웃었다.
‘겨우 그 정도로?’
회사 자랑이라면 김상현 교수도 할 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