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로 갑질하는 양아치 재벌-93화 (93/183)

오성 ENP (3)

오성 그룹 회장 전병철은 오성 ENP의 사장이자 장남인 전형욱과 독대하고 있었다. 아니, 독대를 가장한 꾸지람을 하고 있었다.

“2분기 실적이 박살 난 게 엊그제인 것 같은데, 이건우를 건드리기는 또 왜 건드려! 그런 헛짓거리는 또 언제 하고 돌아다닌 거냐? 도대체 회사를 얼마나 방만하게 경영하는 거야!”

전병철의 질책에 전형욱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2분기 실적이 잘 나오지 않은 게 어디 제 탓입니까. 그리고 지금 전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건 KW 에너지밖에 없습니다. 일단 지금 수출 판로를 다각화하고 있으니 다음 분기 실적은 훨씬 나아질 겁니다.”

전병철은 혀를 찼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데, 사장이라는 놈은 핑계만 늘어놓고 있으니 사업이 잘 될 리가 있나.

접근 방법도 완전히 잘못되었다.

파워온 배터리의 등장은 구석기 시대에 갑자기 철기가 나타난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철기를 구해오는 게 베스트지만 그건 이미 물 건너간 일. 철기를 써본 사람들에게는 구석기는 아무리 포장해도 구석기일 뿐이라는걸, 자식 놈만 모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당면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후우, 그래. 그건 그렇게 치자꾸나. 그럼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산업부 장관에게 돈을 먹인 게 새어나간 거야!”

기자들에게 돈을 뿌려서 기사를 쓰게 한 것쯤은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산업부 장관과 대기업의 결탁은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정경유착이라는 프레임이 씌어 오성 그룹 전체에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전형욱의 입에서는 여전히 변명만이 나왔다.

“분명히 이건우가 손을 쓴 겁니다.”

“당연히 그 녀석이 손을 썼겠지. 이정혁이 어떻게 박살 나는지 봐놓고서 그런 말을 해! 건우 녀석을 적으로 돌려놓고 그걸 예상하지 못했더냐? 조금 더 뒤처리에 신경을 썼어야지.”

과거 오성 ENP는 LJ 하이니콘과 함께 오랫동안 배터리 시장을 양분해왔다. 그런 지위를 차지하기까지 치열한 싸움을 거치며 수많은 경쟁자를 암암리에 제거해왔다. 하지만 그건 옛말이 되었다.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자, 오성 ENP는 나태하게 군림한 결과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현실을 받아들여라. 오성 ENP는 이미 왕좌를 빼앗겼다. 퍼스트 무버가 되지 못하면, 적어도 패스트 팔로워가 되어야지.”

전병철이 현실을 꼬집자 전형욱은 고개를 숙였다.

인생을 바친 오성 ENP는 이제 퇴물이 되었다. 지금 오성 전자가 나아갈 방향은 단 두 개뿐이었다.

계속 퇴물로 남아있던지, 아니면 무릎을 꿇고 재활용이라도 하던지.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방안을 짓눌렀다. 이내 전병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일단 당사자를 불러서 얘기를 해보마.”

하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이 늑장을 부리는 사이, 오성 ENP의 처분은 이미 이건우에게 넘어갔다.

*

나는 오랜만에 외할아버지댁에 방문했다. 서재에는 외할아버지인 전병철 회장과 전형욱이 이미 자리해있었다.

전태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괜찮을까?’를 남발했다. 저렇게 대범하지 못해서 어떻게 아버지를 배신한다는 생각을 했는지 몰라.

물론 그래서 전형욱보다 전태영이 더 휘두르기 쉬운 것도 있다.

나는 당당하게 서재로 들어갔다.

“어, 건우야. 오랜만···.”

“잘 계셨어요, 할아버지.”

전형욱은 나를 보자마자 친한 척하며 인사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본체도 하지 않으며 곧바로 외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전형욱을 내보내라는 무언의 제스쳐였으며, 외할아버지는 금방 그걸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으셨다.

“그래. 형욱이는 나가보거라. 건우랑 둘이서 얘기하겠다.”

“예. 아버지.”

분한 표정을 지으며 전형욱이 나가고, 외할아버지가 운을 띄었다.

“그래. 너를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네. 오성 ENP를 좀 도와달라는 거겠지요.”

“그래. 오성 ENP가 이번 일로 많이 힘들다. 가뜩이나 실적도 안 좋은데, 언론에서도 달려드니 아주 죽겠구나. 그래도 우리가 한 가족이 아니냐. 가족끼리 싸우는 꼴이 좋지만은 않구나.”

외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니 상당히 어색하게 들렸다. 회장직을 내걸고 외삼촌들을 치열하게 경쟁시키는 장본인이 누군데.

그리고 외삼촌이 내 사업을 방해하려 하는 걸 외할아버지가 과연 모르고만 있었을까? 아마 알면서도 모른 척 하셨을 게 뻔하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칼같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외삼촌이 있는 오성 ENP와는 절대 같이 일을 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주도권은 나에게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명분도 있었다.

“외삼촌은 반도체 업체를 비롯한 협력 업체에 훼방을 놓아서 KW 에너지와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었죠. 이것만 해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인데, 기자들과 심지어 산업부 장관까지 이용해서 파워온 배터리의 상용화를 막으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외삼촌을 믿고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형욱이 지금까지 해온 일을 조목조목 짚어주자, 할아버지는 할 말을 잃으셨다.

하긴 삼촌이 조카를 방해하려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는데, 그걸 지금까지 방관하시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인제 와서 중재하려 하니 할 말이 없으시겠지.

“으음···.”

나는 이쯤에서 곤란해하는 외할아버지를 구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오성 ENP를 끌고 가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할아버지를 압박하는 것도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말씀대로 가족끼리 다투는 것도 좋지 않지요. 저도 다른 기업보다는 오성 ENP와 기술 제휴를 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거 잘 생각했구나. 그런 건 가족이랑 하는 게 제일 좋지, 암.”

내 말에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대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외삼촌하고는 일을 못 하겠습니다. 오성 ENP의 사장 자리에 다른 인물이 있으면 좋겠군요. 외삼촌은 지금까지 일을 모두 책임지고 물러나고, 새로운 사장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이게 기술 제휴에 대한 조건입니다.”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외부인인 네가 감히 오성 그룹의 일에 관여하려는 것이냐?”

나는 빙긋 웃으며 바로 전까지 외할아버지가 주구장창 하시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외부인이라니요. 저희는 가족이지 않습니까.”

“······.”

*

나는 그 자리에서 외할아버지와 담판을 지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들을 내치는 것과 파워온을 받아오는 것 사이에 고민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국 외할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파워온이었다.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신임 사장은 태영이가 맡는 게 낫겠구나. 어릴 때부터 너희 둘은 친하게 지내지 않았더냐.”

오성 그룹은 무조건적인 가족 세습을 고집하고 있는 회사 중 하나이다. 전형욱이 물러났으니 외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손자인 전태영에게 맡기는게 제일 좋은 그림이시겠지.

그리고 이건 내가 바라지 마지않았던 일이다.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려가서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하시죠.”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태영이 나에게 다가왔다. 전형욱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외삼촌은?”

“아버지는 가셨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외삼촌이 물러나기로 하셨어. 그리고 곧 있으면 네가 신임 사장으로 취임할 거다.”

그 말에 전태영의 얼굴에 환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로 방금 잘린 마당에 대놓고 좋아하기도 어려웠다. 전태영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많이 힘들어하시겠네. 뭐, 이제 쉬실 때가 되기는 하셨지.”

이게 뭐 불속성 효자? 그런 건가?

“네 아버지를 보내버린 게 너 아니냐?”

내가 핀잔을 주었지만, 전태영은 사장이 되었다는 생각에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전태영은 짐짓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파워온 배터리를 들여오고 싶은데, 지금 빠르게 처리하는 게 어때?”

“나야 좋지.”

아직 정식 임명도 되지 않았건만 전태영은 마치 사장이 된 것처럼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고, 나는 캐리온이 준비해 준 양해각서를 꺼냈다.

“구체적인 사항은 좀 더 논의해봐야겠지만, 우리 쪽에서 대략 원하는 건 이 정도야.”

내용은 간단했다. 오성 ENP는 설비를 제공하고, KW 에너지는 기술을 제공한다.

당연히 각종 설비와 인프라를 제공하는 데 드는 돈은 오성 ENP에서 부담한다.

등골을 쏙 빼먹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들어간 탓에 계약서를 읽은 전태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건 뭐, 대놓고 오성 ENP를 하청업체처럼 부리겠다는 거잖아. 그리고 KW에서는 설비에 투자도 안 하는데 공장의 지분을 반이나 가져가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될게 뭐야. 오성에서는 기술 개발에 투자도 안 했는데, 내가 친절하게 기술 제휴를 맺어주잖아.”

“대신 우리는 기술사용료를 지급하잖아. 어쨌든 나는 이 조건이면 받아들이지 않겠어.”

나는 피식 웃었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전긍긍하던 그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는 당장 사장이 된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이쯤에서 전태영에게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다시 한번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꼬우면 계약하지 말던가.”

"뭐?"

"계약이고 뭐고 다 엎어버리고, 나는 이대로 LJ 하이니콘으로 가면 되겠네. 그리고 외삼촌께 뒤통수를 친 게 너라는 걸 말씀드리면 아주 좋아하시겠지?"

"야, 너···."

한참 입을 뻐끔거리던 전태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하하하"

바보 같은 말에 나는 웃음이 다 나왔다. 새삼 이 녀석이 온실 속의 화초라는 게 확 느껴졌다.

전형욱이 녹슬었긴 해도 한때를 전장에서 보낸 노쇠한 전사라면, 아들인 전태영은 평생을 떠받들어져서 살아온 귀족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려움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오랜만에 재밌었다. 설마 지금 네가 네 능력으로 사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전태영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서늘하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야. 기어오르지 마, 전태영. 너랑 오성 ENP 정도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찢어버릴 수 있어."

“그리고, 지금 외삼촌이 물러났다고 좋아할 때가 아닐 텐데. 외삼촌이 놔두고 간 수족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외할아버지는 전태영을 차기 사장으로 낙점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전태영은 사내에 세력도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하니 그를 바지사장으로 앉힌 후, 전형욱이 상왕 노릇 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사장이 되어서, 병신처럼 평생 네 아버지 명령이나 들으면서 살건 아니잖아."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은 전태영은 얼굴을 굳혔다. 그도 이제 깨달은 것이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세력을 모두 쳐내고 회사를 온전히 장악하는 과정은 험난할 것이다.

그리고 전태영이 기댈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KW의 위세를 등에 업는 것.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사촌이 좋다는 게 뭐야.”

나는 기존 세력과 신진 세력의 갈등을 이용해서 오성 ENP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을 것이다. 전태영이 나에게 의존할수록 오성 ENP는 점점 더 내 손아귀에 들어오겠지.

그리고 나는 전태영의 약점을 알고 있다.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약점을.

“너는 그냥, 내 말만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 하면 돼.”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전태영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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