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로 갑질하는 양아치 재벌-92화 (92/183)

오성 ENP (2)

KW 코퍼레이션의 사옥 최상층.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전태영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하긴 지난번에 나한테 싸가지없이 굴었던 걸 생각하면 다시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넝쿨째 들어오는 호박을 보니 나는 마음이 저절로 너그러워졌다.

“오랜만이다.”

“어? 어, 어. 요새 바쁘다며.”

“그렇지. 여기저기에서 파워온에 대해서 문의가 들어와서 정신이 없더라고.”

내 말에 전태영의 얼굴에 한 줄기의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처음에는 비교의 대상이었다. 나는 제일 그룹의 장손이었고, 전태영은 오성 그룹의 장손이었으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이건우의 온갖 망나니짓으로 인해, 세간에서는 항상 오성이 제일보다 손주 농사를 잘 지었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둘의 격차는 아득했다. 아니, 비교하는 것도 민망한 수준이다.

한때 구제 불능 소리를 듣던 나는 이제 계열사 다섯 곳을 거느리는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지만, 전태영은 그저 계열사의 임원일 뿐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그게···.”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가 요즘 좀 어려워서 말이야···. 그래도 한 가족인데 좀 도와줄 수는 없을까?”

“흠 도와달라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뗐다.

“파워온이 처음 나왔을 때 오성 ENP에서 뭐라고 했더라, 허황한 개소리라고 하면서 쓰자마자 폭발할 거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그건”

“그리고 외삼촌께서 친히 손을 써주신 덕분에 특허 등록도 막혀있었고.”

“나는 분명히 반대했는데 아버지께서 너무 완고하셔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해해. 너는 일개 전무일 뿐인데 사장이 까라면 까야지, 그렇지 않겠어?”

“······.”

비꼬는 말투에 전태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이내 비굴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버지께서 작정하고 벌이신 일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니까. 오죽 회사가 어려웠으면 내가 너한테 찾아왔겠냐."

전태영이 이렇게 숙이고 들어온다니. 똥줄이 타기는 타는가 보다.

이쯤에서 나는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하긴 우리 회사랑 기술 제휴를 맺고 파워온을 생산한다면 지금의 리스크를 해결할 수 있겠지."

내가 슬쩍 운을 띄우자, 전태영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그래도 사촌지간인데 좀 봐주라.”

"조건만 맞으면 못할 것도 없지. 내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KW의 유일한 파트너가 될 기회인데 나도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아, 당연히 그렇지. 뭐든지 말만 해. 파워온을 들여올 수 있다면 내가 다 맞춰줄 수 있으니까.”

이런 적극적인 태도, 아주 좋다.

나는 내 조건을 말했다.

“외삼촌이 나를 공격한 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외삼촌이 기자들에게 돈을 쥐여주고 파워온을 비방한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증거, 그리고 산업통상부 장관과 짜고 특허 등록을 방해했다는 증거.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오면 기술 제휴를 맺어주지.”

당연히 캐리온으로 증거를 찾을 수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전태영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기 손으로 그 증거를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전태영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겠지. 나는 그 약점을 쥐고 전태영과 오성 ENP를 흔들 예정이고.

전태영도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그, 그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러면 나는 LJ 하이니콘과 협상을 하면 되니까. 마침 파워온을 공급하기 위해서 인프라를 늘려야 했는데, 한국에 내 물량을 감당할 수 있는 회사는 오성 ENP만 있는게 아니거든."

KW의 등장 이전까지 한국 배터리 시장은 오성 ENP와 LJ 하이니콘이 양분하고 있었다.

만일 내가 LJ 하이니콘과 손을 잡는다면, 오성 ENP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훤하다.

그리고 나로서는 누구와 손을 잡아도 손해 볼 것이 없다. 하이니콘과 손을 잡고 오성 ENP가 망하면 그때 가서 줍줍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끄응···.”

당근과 채찍은 함께 써야하는 법.

채찍을 휘두른 나는 당근을 흔들었다.

"하지만 오성 ENP가 파워온을 생산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온전히 네 공로가 되겠지. 파워온을 가져와서 망해가는 오성 ENP를 살린 사람이라는 타이틀이면, 사장 자리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사장이라고?"

달콤한 내 말에 전태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한 번 고민해봐.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

이건우와 이야기를 나눈 후, 전태영은 오히려 전보다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오성 ENP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대신 이건우가 말한, 오성 ENP의 사장 제안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그만큼 이건우의 제안은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었다.

‘내가 오성 ENP의 사장이 된다고?’

그걸 꿈꾸지 않은 게 아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경영하다가, 오성 그룹 회장이 되는 것. 그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기고 달려왔으니까.

하지만 그 길에 아버지를 배신하는 과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이 바닥에서 부모가 자녀를 내치고, 자녀가 부모에게 하극상을 벌이는 건 마냥 없는 일만은 아니다. 당장 이건우만 해도 제 아버지를 내치고 제일 ENM을 삼켜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 꼬리표는 영원히 남아서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물론 이건우야 이정혁이 한 행동들이 있고 그런 꼬리표 따위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거물이 되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그런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건우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어.’

이건우는 이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LJ 하이니콘과 기술 제휴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지금 LJ 하이니콘은 오성 ENP와 같이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 이건우가 내려준 동아줄을 냉큼 잡아버릴 거다.

그리고 오성 ENP는 벼랑 아래로 추락하겠지.

오성 ENP는 갈기갈기 찢겨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아버지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 우리 회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전태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건우에게 연락했다.

*

- 전태영 님이 파일을 보냈습니다.

나는 메일로 날아온 자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전태영이 넘어오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오성 ENP의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욕심, KW 에너지와 제휴를 맺어 회사를 키울 수 있다는 야망, 그리고 이대로라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세 가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전태영을 압박했다.

그리고 결국, 전태영은 스스로 자기 목에 목줄을 채워서 내게 건네줬다.

이렇게 손수 목줄까지 채워서 넘겨줬는데 못 써먹으면 바보지.

“캐리온. 오성 ENP가 했던 짓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부풀려서 커뮤니티에 뿌려.”

이번에도 오리온 작가가 나섰다. 30분 만에 뚝딱 만들어진 글을 읽어보니, 오성 ENP는 작은 벤처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막는 천하의 악당이 됐고, KW 에너지는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미스리늄으로 배터리를 개발한 회사가 되어버렸다.

“···이 정도면 오성 ENP에서 사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는데?”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해당 글은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KW 에너지에 이입하면서 오성 ENP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위안부 할머니와 징용 피해자들을 돕고, 일본에게 한방 크게 먹이면서 KW의 이미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상황이었다. 오성 ENP로써는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이렇게 여론을 한번 달궈준 뒤, 나는 기자들에게 전형욱이 기자를 매수하여 여론몰이한 것과 산업통상부 장관과 뒷거래를 통해 특허를 막은 사실을 공표했다.

기자를 매수해 여론몰이한 것은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기자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산업부 장관과 뒷거래한 것을 적극적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산업부 장관이 나서서 특허를 막아?>

<대기업에 좌지우지되는 산업부, 이대로 괜찮은가?>

<산업부가 한국의 산업 발전을 막고 있다>

「산업 분야가 급성장한 한국 특성상 산업통상부의 힘은 막강하다. 게다가 수출 비중이 큰 구조상 대기업들도 산업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산업통상부 장관 임보훈(56세)는 뇌물을 수수하고 소규모 벤처 기업의 특허권을 막아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일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앞서서 산업을 발전시킬 산업통상부가 오히려 새로운 기업의 진입 장벽을 막으며 국가의 발전을 퇴보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언제부터 KW 에너지가 소규모 벤처 기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확실하게 KW 에너지가 피해자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성 ENP는 그렇지 않아도 배터리 시장에서 입지가 줄어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장의 비리까지 터져 나오자 휘청거리고 있었다.

외국인 기관투자자부터 시작해서 작은 개미들에 이르기까지 오성 ENP의 주식을 던져댔고, 오성 ENP의 주가는 연일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오성 ENP의 주식을 쓸어 담았다.

“캐리온. 오성 ENP의 주식을 있는대로 다 쓸어담아. 공시 직전까지 최대한 많이 끌어모아야 해.”

오성 ENP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리고 나와 기술 제휴를 맺는 순간 오성 ENP의 주가는 올라갈 게 뻔했다.

내가 열심히 오성 ENP의 주식을 쓸어 담고 있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야, 이건우! 당장 나와! 커억!”

커억?

이건 우리 회사에서 나올 소리가 아닌데.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고, CCTV를 확인한 캐리온이 말했다.

[전태영 전무가 난동을 부리다가 한서진에게 제압당했습니다.]

“······.”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한서진의 뾰족한 구두 아래 깔린 전태영을 볼 수 있었다. 전태영은 나를 보더니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건우!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그걸 언론에 뿌려버리면···켁!”

괜히 입을 열었다가 한서진에게 한 대 더 맞는 건 덤이었다. 나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풀어주세요.”

한서진은 산뜻하게 웃으며 전태영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또 행패를 부리면 더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

전태영은 한서진이 무서운 듯 후다닥 거리를 벌리더니 나보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자 전태영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그걸 언론에 뿌려버리면 어떡해! 지금 아버지께서 곤란하시게 됐다고.”

나는 피식 웃었다. 먼저 배신한 게 누군데 인제 와서 효자 코스프레야.

참 위선적이다. 오성 ENP를 가지고 싶지만, 파워온을 얻어내고 싶지만, 본인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다는 건가.

“병신이냐? 너, 사장이 되고 싶어서 나랑 손잡은 거잖아. 그럼 제일 먼저 공격해야 하는 게 누구인지 머리가 안 돌아가?”

“그, 그래도···. 회장님께서 아시면 난 죽은 목숨이라고. 사장은커녕 당장 쫓겨날지도 몰라.”

전태영은 전전긍긍해 하며 나에게 더 매달렸다. 이제 기댈 구석이 나밖에 없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나는 씩 웃었다.

“괜찮아. 안 들키면 장땡이니까.”

그리고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내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와 전태영의 눈은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으로 향했고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

내 외할아버지가 누군지 깨달은 전태영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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