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 ENP (1)
김정숙. 그 여자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와 김정숙 의원은 팽팽하게 대치했다. 김정숙 의원이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우 사장님. 그러고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가슴 한편에 달린 금색 배지를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근데 어쩌지? 고작 국회의원에 쫄 내가 아니다.
“친절하기도 하시군요. 아직도 저를 걱정할 정신이 남아있나 봅니다?”
나는 기자들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영상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김정숙 의원은 지금까지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하면서 제 배를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시민단체 활동을 진심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정치인이 되기 위한 스펙을 쌓는 과정으로 여겼지요.”
“모함이야!”
김정숙 의원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이렇게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건지. 나는 귀를 후벼 파며 말했다.
“지금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의원님은 좀 닥치고 있으세요.”
“뭐, 뭣?”
처음 들어보는 직설적인 말에 김정숙 의원이 기가 막혀하는 사이, 나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손짓을 하자 영상이 종료되고 화면에 후원금 사용내역이 나타났다. 이중장부가 아니라 한서진이 훔쳐온 진짜 장부였다.
“보시면 알 수 있듯이 후원금 일부가 의원님의 이번 총선 자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법인 명의가 아니라 의원님 개인 계좌로 모금을 받았지요. 이건 충분히 횡령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국가보조금 3억을 받아놓고 장부에는 기록도 하지 않았고, 기타 등등 합쳐서 공시 누락액이 총 37억 원입니다. 전체 49억 원 중 75%가 회계자료에 대한 공시가 누락된 것이지요.”
이후로도 나는 캐리온이 가져온 자료를 화면에 띄우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내 말이 길어질수록 김정숙 의원의 얼굴색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너무나도 구체적인 증거 자료들에 이제 더는 변명도 소용없다는 것을 김정숙은 깨달았다.
그러길 개기긴 왜 개겨.
“따라서 희망의 집에 기부하는 것은 없는 일로 하겠습니다. 대신 KW 코퍼레이션 차원에서 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중으로 고통받은 할머니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고통받으신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을 끝맺었다.
“과거에 겪으신 일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마음의 짐을 들어드리고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
내 기자회견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전화해서 칭찬을 늘어놓으셨다.
할아버지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과 같은 세대이셨기에 누구보다 그 아픔에 공감하셨다.
“잘했다. 네가 좋은 일로 신문 1면에 나올 때도 있구나.”
···이건 칭찬인가?
“그 썩을 것들은 없어져야 마땅하지. 우리 제일 그룹에서도 네가 만든 재단에 후원하고 싶구나.”
“저야 환영이죠.”
뒤이어 많은 사람이 내 결정에 환호했으며, 희망의 집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다.
- 희망의 집은 개뿔. 절망의 집이 따로 없네.
- KW가 보면 볼수록 진국이다
- 진짜 이건우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음ㅠㅠㅠ
- 와···. 연옌들 희망의 집에 기부를 많이 했던 거 같은데. 그게 다 저새끼들 뱃속으로 들어간 거 아냐
- 김정숙 의원을 탈당시켜라!
재단을 만든 나는 발표했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저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사람을 쓰는 것보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관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할머니를 모실 새로운 재단 ‘나래빛’은 프로그램을 통해 투명하게 관리할 것이며, 여러분 모두 언제나 자금 내역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하겠습니다.”
- 그렇지. 사람보다는 컴퓨터가 낫지
- 하긴 프리온도 만들어냈는데, 돈 관리 프로그램도 못 만들까.
- 그런데 이건우가 프로그래머였음?
ㄴ 찾아보니까 그냥 경영학과 나왔던데
일단 나는 새로운 재단이 완성될 때까지 할머니들을 희망의 집에서 빼내서 5성급 호텔에 모셨다.
희망에 집에서 나오신 할머니들의 표정은 다행히도 무척 좋아보였다. 전문 요양사들이 할머니들의 옆에 붙어 돌봐드리고 있었다.
재단을 만드는 일은 캐리온이 맡아서 하고 있으니 곧 있으면 완료가 될 것이다. 나는 캐리온에게 특별히 최고의 시설을 가진 곳으로 알아보라고 일러두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신 할머니들이 그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 문제는 여기서 일단락하고, 나는 일본에게 파워온을 공급하면서 내건 세 번째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나섰다.
바로 사도 광산에 일할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것.
나는 공고를 냈다. 조건은 간단했다.
1. 숙식 제공, 생활비, 여행경비 제공
2. 일당 세후 100만원
3. 6시간 4교대
4. 일제강점기 징용/징병 피해자 후손, 독립유공자 후손 우대
나는 공고를 낼 뿐만 아니라, 캐리온에게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빼 오게 시켰다. 국가기록원에는 일제강점기 희생자 명부 67권이 있는데, 31운동 피살자가 630명, 관동대지진 피살자가 290명, 강제징용 피살자 명부가 23만 명이었다.
캐리온은 그들의 후손을 추적해서 KW 에너지의 이름으로 공문을 날렸다.
우대해줄 테니까 사도 광산에 일하러 오시라고, 조상님들이 받지 못했던 임금까지 쳐서 다 줄 거라고. 그것 외에도 각종 혜택과 지원들을 길게 적어놓았다.
나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역사 속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나라에서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똑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누가 나라를 위해서 앞장서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내가 앞장섰다.
어차피 하는 데 내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돈을 다 대주는데. 널널하게 4교대를 하면서 인력도 팍팍 뽑고, 돈도 팍팍 썼다.
그러자 순식간에 광산에 일할 사람들이 뽑혔다. 또한 KW 자원개발에서 낸 공고는 사람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 뭔데 일당이 100만원임?!
- 심지어 세후 100만원이네ㄷㄷㄷ 한 달 일하면 실수령이 3000만 원?
- 이 정도면 황제노역? 100만원 받는건 노역이 아니구나...
- 일제강점기 때 피해보신 분들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 정부 뭐하냐. 좀 보고 배워라.
- 이번 일로 KW 다시 보게 됐습니다. 국위선양을 할뿐만 아니라 역사개념도 제대로 박혀있네요.
미스리늄과 파워온으로 KW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KW에 대해 완전히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브랜드 파워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일본과 관련된 일은 모두 끝났다.
위안부 할머니는 최고급 시설을 가진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갔고, 연세가 있으신 만큼 다양한 간호 및 생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피해를 본 분들의 후손들도 뒤늦게나마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겸사겸사 KW라는 기업의 이미지도 엄청나게 좋아졌다.
사람들도, 할머니도, 나도. 모두가 행복했다. 일본만 빼고.
*
파워온의 등장으로 모두가 웃는 것만은 아니었다.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들은 난리가 났다. 파워온 덕분에 자사의 배터리 판매량이 박살 나버린 상황.
특히 2분기 실적이 공개되고, 그들은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주가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대기업인 오성 ENP도 하락세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최대 고객인 테슬라와 두 번째 큰손인 제일 자동차가 동시에 빠져나가면서 타격이 컸다.
이대로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전무인 전태영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예전에 이건우에게 굽히고 들어가서 파워온 배터리를 받아오자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으셨지만, 이제 더이상 지켜볼 수는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오성 ENP가 망하게 생겼다. 전태영은 아버지 전형욱을 향해 진심으로 말했다.
“아버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얼른 KW와 손을 잡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주가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어요. 주주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파워온이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이 오성 ENP의 주식을 내던지고 돌아섰다. 그리고 2분기 실적이 공개되자 남아있던 사람들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걸 팔아야 하나, 아니면 계속 들고있어도 되나. 고민하는 순간에도 오성 ENP의 주식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 전에 해결책을 내놓지 않으면 남은 사람들도 모두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전형욱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보기에 지금 파워온의 인기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술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일본에서 미스리늄으로 실험을 하다가 폭발사고 난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주식 떨어지는 게 하루 이틀 일이더냐. 당장 파워온이 새로 나와서 열광하겠지만, 그래 봤자 신생 회사에 불과하다. 분명 무슨 문제가 발생할 게야. 그렇게 되면 우리 오성 ENP의 제품이 팔리기 시작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망해가는 기업의 주식을 들고 있을 이유도 없지요.”
전태영의 과격한 표현에 전형욱이 책상을 쾅 쳤다.
“망해가는 기업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파워온이 나타난 지금, 저희가 만드는 배터리는 모두 쓰레기고 되고 말았습니다.”
“파이가 줄어든 것뿐이지, 아직 우리 배터리를 쓰고 있는 곳들도 많단다. 이건우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혼자서 전세계의 모든 배터리를 공급할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아버지!”
전태영은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사장이라는 작자가 저런 속 편한 소리를 늘어놓다니.
전태영에게는 회사를 키우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고집과 마인드로는 회사를 키우기는커녕 말아먹기 딱 좋아 보였다.
“저희 오성이 언제부터 이인자에 만족했습니까. 이건우가 장악하지 못한 시장만 골라 찾아가며,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어쩌자는 게냐.”
“KW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지금은 물량이 부족해서 몇몇 업체밖에 쓰지 못하고 있지만,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파워온 배터리는 빠르게 시장을 장악할 테지요. 그때 가서는 너무 늦었습니다. 차라리 지금 손을 내밀어서 KW와 합작법인을 세우고 기술 제휴를 맺으면 배터리 시장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제일 그룹에 오성 ENP를 갖다 바치란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냥 한발만 물러서자는 거지요.”
전형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태영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을 모두 바쳐서 오성 ENP를 일궈냈다. 지금 아들의 말은 그 오성 ENP를 이건우에게 홀랑 바치라는 말과 다름없이 들렸다.
이건우 밑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전형욱도 머릿속으로는 전태영이 말한 게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감정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지금은 나가보거라.”
결국, 두 사람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그리고 전태영은 그 길로 바로 이건우를 찾아갔다.
*
나는 전태영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눈을 끔벅였다.
“누가 찾아왔다고요?”
내가 되묻자 한서진이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오성 ENP의 전태영 전무요. 약속 없이 온 거긴 한데, 돌려보낼까요?”
“아니에요. 일단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나는 몇 달 전 전태영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반도체 회사인 하이텍을 소개받으러 외할아버지댁에 갔을 때 전태영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전태영은 제일 그룹이 오성 ENP를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휑하니 가버렸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KW가 세계 배터리 시장을 삼켜버렸으니 말이다.
그때 이후로 얼굴 볼 일이 없어서 유야무야 넘어갔었는데, 전태영이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찾아온 목적이 짐작 가지 않은 건 아니다.
2분기 실적이 막 발표되고 국내 배터리 2사의 주가가 동반자살한 지금, 전태영이 나를 찾아와서 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도와달라는 것.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게 웬 떡이냐. 잘 하면 오성 ENP를 먹을 수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