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집 (2)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어느덧 희망의 집에 1조 원을 기부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기부 장소는 희망의 집 대회의실.
희망의 집 소장은 이날을 홍보하기 위해서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기자들을 불렀고, 김정숙 의원도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한서진과 함께 희망의 집에 발을 내디뎠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소장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반갑습니다. 사장님. 귀한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내가 귀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주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다시는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다 같이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가 사장님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홀에는 유명인사들이 많이 자리했다. 지역 유지에서부터 김정숙과 같은 당의 국회의원들까지. 그들은 준비된 고급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 할머니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들께서는 보이지 않는군요. 오늘 행사의 주인공이신데 말이죠.”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소장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준비한 변명을 재빠르게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이런 번잡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도 많고요.”
“그러시군요. 꼭 뵙고 싶었는데 안타깝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절대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지난 행사에서 할머니가 폭로하겠다는 말을 한 이후, 소장은 할머니들을 외부인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풀어드려야지. 주인공 없는 행사는 말이 되지 않잖아.
나는 한서진에게 눈짓했고, 그녀는 생긋 웃으며 홀연히 사라졌다.
*
한서진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손에 많은 사람의 피를 묻혀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위안부 할머니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분기탱천한 그녀는 할머니가 갇혀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건물 끄트머리 앞에 경비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한서진은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귀엽게 생긴 얼굴이 더 화사해졌다.
“여기가 할머니들께서 머무르시는 곳이지요? 저희 사장님이 모셔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녀의 외모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경비원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그렇군요.”
한서진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하자 경비원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에, 다른 곳으로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아, 예. 들어가십쇼.”
그런데 돌아갈 줄 알았던 한서진이 그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 아닌가.
“?”
그가 당황하는 사이, 강력한 펀치가 명치에 꽂혔다.
“커억!”
자연스럽게 경비원의 허리가 꺾였고, 한서진은 경비원의 숙어진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땅에 내다 꽂았다.
지면과 박치기한 그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이 모든 과정이 단 몇 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이루어졌다.
여리여리한 한서진이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경비원은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뒤, 다른 경비원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서진에게 달려들었다.
“이 년이!”
하지만 한서진이 한발 빨랐다.
한서진의 늘씬한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뾰족한 힐이 그대로 턱에 명중하며 경비원의 머리가 빙글 돌아가 버렸다.
“꽥!”
볼 것도 없는 KO. 경비원은 그대로 땅과 키스하며 쓰러져버렸다.
이 정도면 당분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은 무척이나 작고 퀴퀴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그 작은 방 안에 할머니들이 불편한 자세로 갇혀있었다.
할머니들은 밖에서 난 소란에 약간 겁에 질린 눈치였다. 한서진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날씨도 좋은데 잠깐 밖으로 나오시겠어요?”
*
같은 시각, 나는 희망의 집 소장이 연설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이러저러해서 저희 희망의 집은 지금까지 일본에 문제를 알리고 올바른 역사적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이건우 사장님의 후원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한 만큼, 저는 한 몸을 불살라서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에 헌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저절로 나오네.
나도 그냥 한서진이 싸우는 걸 구경하러 갈 걸 그랬나?
다행히 내가 뛰쳐나가기 전, 소장의 연설은 곧 끝났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그리고 이어서 희망의 집 이사회 의장이기도 한 김정숙 의원이 단상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다시 절망에 빠졌다.
“저는 여성인권운동가로서 평생을 위안부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 힘써 왔습니다. ···(후략)”
소장과 비슷한 내용의 연설이 이어졌고, 적당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진 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기자들의 눈이 맛탱이가 간 게 다들 지루한 연설을 듣느라 힘들었나 보다. 내가 그 마음 잘 알지.
그래서 빅 이벤트를 준비했다.
나는 소장과 김정숙 의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분명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내 눈빛은 그 둘을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둘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움찔했다.
연단에 오른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지루한 연설을 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의 직설적인 말에 소장과 김정숙 의원은 어색하게 웃었고, 기자들은 내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는지 행사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영상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보시지요.”
영상?
식순에 없었던 돌발행동에 소장과 김정숙 의원은 당황한 듯 마주 보았고, 눈치 빠른 기자들은 눈에 빛을 내었다.
지금까지 이슈를 펑펑 터뜨려온 나인만큼, 이번 일도 보통 일이 아닐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캐리온은 노트북을 해킹했고 이어 대회의실에 있는 대형 티비에 불이 들어오면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느그들 또 돈을 빼돌리려고 그라제.”
“어후 씨, 깜짝이야. 할머니는 또 여기 왜 있어요. 우리가 할머니를 얼마나 챙겨주는데. 우리 아니었으면 밖에 나가서 콱 뒈져버릴 노인네가 은혜도 모르고.”
“이 천벌 받을 놈들이! 이번에도 또 돈을 빼돌리면 다 폭로할 테니까 알아서 해라.”
“이 미친 노인네가 확!”」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증거 자료들이 터져나왔다.
소장은 틈만 나면 할머니를 찾아가서 협박해댔고,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대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든 사람의 눈빛에 분노가 깃들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한몸에 받은 소장은 하얗게 질린 채 굳어버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한 기자가 벌떡 일어났다.
“한국일보 김현준 기자입니다. 해당 영상은 어떤 의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서울일보 박지은 기자입니다. 소장님, 지금 할머니를 겁박하신 게 사실입니까?”
소장이 더듬거렸다.
“아, 아니 나는···.”
그러나 기자들은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졌다.
“동국신문입니다. 지금 할머니들은 어디 계신 겁니까?”
“한양일보···”
기자들의 질문세례에 패닉이 온 소장이 소리를 빽 질렀다.
“모함이야, 모함이라고! 저 새끼가 나를 음해하는 겁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한 게 없어요. 저건 다 조작된 거라고!”
뭐, 그렇다고 하신다.
그래서 내가 직접 증인을 모셔왔다. 나는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작된지 아닌지는 할머니를 직접 모시고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회의장 뒤편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한서진과 그녀가 모셔온 할머니들이 서 계셨다. 나는 당부했다.
“몸이 좋지 않으신 분이니 다들 예의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내 말에 기자들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나는 연단에서 잠깐 비켜섰고, 한서진은 할머니들을 모시고 연단 위로 올라왔다. 그중 대표로 한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희망의 집에서 일어나는 참상에 대해서 고발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기회를 마련해주신 이건우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할머니는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 씨부랄놈의 새끼는 우리를 이곳에 가둬놓고 장사를 했습니다. 뉴스를 보면 국민들이 저희를 위해 많은 지원을 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저희는 받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픈 제 친구는 간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버렸고, 이제 남은 사람은 열두 명뿐입니다. 기부해주신 수많은 돈은 전부 저들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할머니는 말을 잇다가 울컥했는지 눈물을 흘렸다.
회의실이 숙연해졌다.
소장이 벌떡 일어나서 달려오려고 했지만, 한서진에게 저지됐다. 할머니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끝까지 말을 이었다.
“자세한 진상은 이건우 사장님께서 밝혀주실 겁니다. 천하의 몹쓸 놈이 지금껏 저지른 만행을 모두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군.
나는 준비해온 서류를 꺼냈다. 모두 캐리온이 차곡차곡 모은 것들이다.
“나눔의 집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전문적으로 보호하는 국내 최고의 시설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시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무료 양로시설일뿐 그 이상의 치료나 복지는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그간 수십억대 후원금을 받아놓고 할머니들에게 사용하지 않고, 60억 원이 넘는 부동산과 70억 원이 넘는 현금자산으로 보유만 하고, 할머니와는 관계없는 부적절한 곳에 돈이 쓰였음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한 직원이 천만 원가량의 후원금을 가로챘고, 그 사실을 인식했음에도 조처하지 않고 승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 흔한 결핵 검사도 시행하지 않고, 생활 프로그램은커녕 간호체제도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외에도 이사회를 비롯한 운영 관계자들은 자금을 횡령하여 개인적으로 유용했습니다. 관련 자료는 검찰에 제출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김정숙 의원이었다.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기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희망의 집에 일어난 사태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 이런 일이 있다니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사회 의장으로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수습하며, 관계자들이 확실히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할머니에게 다가와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할머니, 죄송해요. 저는 소장이 이런 짓을 저지른 줄 몰랐어요.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할머니는 기가 차서 입을 뻐끔거렸다.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의 태세 전환이라니. 다른 의미로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김정숙 저 여자는 정치가 아니라 연기를 했으면 성공했겠어.
하지만 이대로 빠져나가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아, 저도 김정숙 의원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됐군요.”
“···네?”
뭔가 잘못됨을 직감한 김정숙은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내가 손짓하자 캐리온이 바로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바로 어제, 기자회견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연회장 세팅을 점검하러 나온 김정숙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이봐요. 저기···.”
잠깐 볼일을 보러 밖에 나온 할머니가 김정숙을 발견하고 그녀의 옷깃을 잡는 순간이었다.
“꺅!”
김정숙은 히스테리컬하게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할머니는 힘없이 휘청거렸지만, 김정숙은 더 매몰차게 몰아세웠다.
“더러운 늙은이가 어딜 만져!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고!”」
영상을 본 김정숙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바로 탄로가 날줄은 몰랐겠지?
한서진이 다가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김정숙의 손을 툭 쳐냈다. 충격을 받은 김정숙은 그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른 서류 뭉치를 꺼냈다. 내 손에 들린 증거물을 보고 김정숙 의원은 흠칫 놀랐다. 이게 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나를 보며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