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로 갑질하는 양아치 재벌-79화 (79/183)

반도체 공장 (3)

1조.

내 입장에서 큰돈은 아니지만, 중견기업의 사장으로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이다.

그 돈이면 지금껏 미뤄두기만 했던 설비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도, 더 나아가 추가로 공장을 증설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내 입에서 1조라는 금액이 튀어나오는 순간 사장의 대접이 달라졌다. 그는 허둥지둥하다가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하면서 얼른 나를 사장실의 상석으로 안내해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손수 고급 다과를 준비해준 건 덤.

아마 지금쯤이면 전형욱의 제안은 머릿속에서 사라졌지 않았을까?

확실하지 않은 납품계약과 눈앞에 있는 1조 원. 뭐가 더 매혹적인지는 뻔하지.

흥분을 가라앉힌 하이텍 사장이 물었다.

“그러면 1조를 투자하는 대가로 KW에서 요구하는 사항은 뭡니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당연히 1조 원을 공짜로 투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조건을 말했다.

“지분의 51%를 넘겨주세요.”

회사를 넘기라는 뜻이다.

뭐, 1조를 투자했으니 당연한 요구다. 나는 여기 오기 전 캐리온에게 지분 관계를 조사해보았다.

총 지분 100% 중에서 사장이 70%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투자자들이 3명이 각각 10%를 나눠 가지고 있다. 나는 사장의 지분 70% 중의 51%를 요구한 것이다.

직접 키운 회사를 넘기라는 말에 사장은 조금 당황한 듯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사장에게 나는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습니까?”

“아 예. 왜 사장님이 작은 회사의 지분을 요구하는지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그 돈이면 대기업에 수주를 맡겨도 될 텐데···. 혹시 제일 그룹에서 반도체 사업도 같이하나요?”

제일 그룹이라. 오성에서 열심히 헛다리 짚는 것처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제일 그룹은 아니고 KW에서 할 겁니다.”

나는 이미 배터리 산업에 7조를 쏟아붓기로 했다. 광산 개발에 10퍼센트가량 투자했고, 또 그 일환으로 반도체 제조에 추가로 1조를 투자할 예정이었다.

지금 세계적으로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면서 전체적으로 생산부족에 시달려왔고, 그런 만큼 반도체 사업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사업이다.

내가 대기업이랑 제휴를 맺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기반이 약한 중견기업은 다르다.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내 입맛대로 끌고 갈 여지가 생긴다.

중견기업에 부족한 건 기술력뿐이고, 그건 캐리온이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캐리온의 기술력과 중견기업의 기반을 바탕으로, 하이텍을 세계 1위의 반도체 기업으로 끌어올릴 생각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이텍이 온전히 내 손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괜히 나중에 지분 문제로 골치 아파지기는 싫거든.

우리는 합의를 봤다.

내가 1조를 투자하는 대신 지분 51%를 받아온다. 그리고 새로 짓는 공장은 강원도에 최대규모로 설립하며, 그때까지 필요한 부품은 기존의 두 공장에서 제공하기로 한다.

대신 나는 사장의 경영권은 보장해 주기로 했다. 특별히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한다거나,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나는 경영 자체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하이텍을 인수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고질적인 인재의 부족에 있다. 지난번 미스리늄에 대한 논문을 집필하는 건 때에도 느꼈지만, 내 주변에는 사람이 너무 없다.

기술은 캐리온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지만, 그걸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건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하이텍 사장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회사를 운영하면서 큰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직원들에게 평판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그 외할아버지에게 괜찮다는 칭찬을 들었다면 말 다 했지.

"좋습니다, 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웃으며 인사를 나눴고, 그 순간 나는 잊고 있던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

"근데 사장님···. 성함이 어떻게 됐었죠?"

"···이영민. 이영민입니다."

*

배터리의 4대 소재는 양극재, 전해질, 음극재, 분리막이다.

그중 양극재와 전해질은 미스리늄을 이용해 생산할 것이기 때문에 관련 공장은 강원도에다가 직접 짓고 있다.

나머지는 남은 것은 음극재와 분리막 사업. 그리고 이 분야의 강자는 바로 포항에 있는 포스칼이다.

이번에도 오성 ENP의 방해가 있을까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건 없었다.

하긴, 포스칼 정도 되면 오성에서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해도 될만한 사이즈는 아니지. 오히려 그런 짓을 하면 오성이라도 꽤나 곤란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포스칼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2차전지 소재를 아우르는 종합 기업으로, 배터리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먼저 분리막의 경우, 양극과 음극이 닿으면 열이 발생하면서 폭발할 수 있어서 안정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그런데 포스칼은 습식 분리막 시장에서 가장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며, 세계 최고 속도의 분리막 코팅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음극재에서도 부분에서도 손꼽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번에 기존에 개발하던 음극재에 이어서, 전기차 배터리용 저팽창음극재 생산량을 확대했다.

저팽창음극재를 사용한 배터리는 기존보다 충전속도와 안정성, 수명이 향상될 수 있어서 나에게 꼭 필요한 물질이었다.

포스칼과의 계약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어차피 포스칼에서는 대금만 받을 수 있다면 물건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또한 포스칼 입장에서는 고객을 다각화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졌다.

이것으로 일단 배터리를 만드는 데 들어갈 4대 핵심소재는 확보가 끝났다. 하지만 아직 배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터리 하나 만드는 데 필요한 게 뭐가 그리 많은지, 양극재의 중간원료인 전구체, 포장재인 셀파우치나 알루미늄 양극박 등에서도 자잘하게 업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캐리온은 각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업만 뽑아서 연락을 돌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흠, 분명 업계 표준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는데.

그리고 잠시 후, 캐리온이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오성 ENP가 협력업체와 접촉한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이것 봐라?

하지만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내 장기를 발휘할 때가 되었군.

*

며칠 전, 오성 ENP 사장인 전형욱은 직접 협력업체에 직접 전화를 돌렸다. 대기업의 사장이 전화를 건다는 게 이례적인 일이기에, 협력업체 사장들은 바짝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전형욱의 요구는 간단했다.

“KW 에너지에서 제시하는 모든 계약을 거절하세요.”

그들은 잠깐 고민했다. KW 에너지가 신생회사이긴 해도 무려 제일 그룹에서 뻗어 나온 기업이다.

제일 그룹에서 배터리 시장에 뛰어드는 것 같은데, 여기서 얻을 이익을 포기하는 게 아까워 보였다.

그렇다고 싫다고 하기에는 오성 그룹의 후환이 두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전형욱이 당근을 흔들어줬다.

“우리 오성 ENP에서도 생산량을 늘리려고 합니다. 추가 생산분에 대해서 일감을 몰아줄 테니, KW 에너지와 계약을 하지 않는 대가로는 충분할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협력업체 사장들은 모여서 논의를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오성 ENP는 배터리를 비롯한 에너지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오성 ENP와 LJ 하이니콘 2사가 배터리 시장을 꽉 잡은 이상, KW 에너지가 새로 배터리 시장에 뛰어든다고 해서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였다.

“오성에서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제일 그룹에게 대놓고 싫다고 말할 수는 없잖습니까.”

“후우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완전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군요.”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KW 에너지에서 광산과 직접 계약도 하고, 포스칼과 계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에너지 시장에 뛰어드는 것 같습니다. 2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뒷배경이 제일 그룹인 만큼 실패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KW 에너지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힘듭니다.”

“그건 그렇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희는 그냥 대답을 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어떻습니까?”

“그냥 무시하자는 말인가요?”

“아예 무시한다기보다는 적당히 발을 빼고 있어 봅시다. 오성 그룹에서 이런 제안을 했으니, 잘 하면 제일 그룹에서도 저희에게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해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성 그룹에서 추가 생산분을 맡기겠다며 조건을 내걸고 회유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KW 에너지에서도 그들에게 좋은 조건을 걸며 회유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콩고물을 집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좋습니다. 그럼 KW 에너지에서 접촉해올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그들은 이건우를 너무 몰랐다.

*

우리 첫째 외삼촌이 아주 깜찍한 장난을 치셨다. 나를 견제하겠다고 아주 불을 키고 달려드시는구만. 이거 굉장히 서운해지는데.

하지만 협력업체에 나와 계약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해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외삼촌이 당근을 흔들었다면, 내 스타일은 채찍을 휘두르는 것.

“캐리온 협력업체 사장들이 구린 짓을 많이 했을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봐. 만약 뭐가 나오지 않는다면 가족까지 전부 다 털어버려.”

[알겠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장쯤 되는 사람이면, 로비하느라 이리저리 돈을 찔러주고, 잘못을 봐도 못 본 척 넘어간 적이 많을 거다.

그리고 예상에 한 치의 빗나감이 없었다.

한서진이 서류박스를 쿵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청하신 자료 배달왔습니다.”

안에서 파일을 하나 꺼내 드는데 굉장히 묵직했다. 한서진이 생글거리며 덧붙였다.

“그쪽 집안이 이것저것 많이 해 먹었더라고요. 가족까지 터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왔어요.”

나는 제목만 주르륵 훑어보다가 서류 한 장을 꺼내서 한서진에게 넘겨주었다.

<엔트릭스, 골프장에서 캐디에게 갑질>

엔트릭스는 배터리 패키징을 하는 업체이다. 사장 내외가 골프장에서 캐디에게 갑질을 했다고 하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내 마음이 다 아프더라.

봉변당한 캐디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천성이 정의로운 나는 이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기자들에게 넘겨주시고, 협력업체 사장들에게 한번 더 연락을 돌려주세요.”

본보기로 한 명을 조져놨으니, 이번에도 배짱 있게 튕기지는 못할 것이다.

*

<엔트릭스 사장, 캐디에게 갑질하다?>

중소기업 사장이 골프장에서 갑질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렇게 커다란 이슈는 아니었지만, 캐리온이 개입하니 메인 뉴스란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특히 요즘 갑질이라는 이슈가 사람들에게 굉장히 민감해진 만큼, 이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논란이 되었다. 당연히 협력업체 사장들도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서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 우리 사장님이 보낸 선물은 잘 받으셨죠?

“아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 글쎄, 이유는 그쪽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어디 한번 튕겨봐요. 난 그쪽이 더 재밌을 거 같거든요.

“······.”

이건우가 보내는 메시지는 노골적이었고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부랴부랴 KW 코퍼레이션 사옥으로 향했다.

커다란 회의실에 들어간 그들은 단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이건우를 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제가 먼 길을 오신 여러분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으니 한번 확인해보시지요.”

내 말이 끝나자 한서진이 두꺼운 파일을 나눠주었다.

그들과 가족, 심지어 친척까지 저지른 비리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이번에 골프장 갑질로 이름이 오르내리락 하는 사장이 화를 못 참고 벌떡 일어났다.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거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설득하는 걸로 보입니까? 내용이 뭔지 파악이 됐으면 맨 뒷장으로 가주세요.”

그들은 파일의 맨 뒷장을 보았고, 거기에는 계약서 한 부가 있었다.

계약서를 읽던 그들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말도 안 되는 노예계약이었다.

나는 상냥하게 웃었다.

“물론 계약서에 서명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됩니다. 대신 제가 가진 원본 파일의 주인이 검찰로 바뀌겠지요.”

그러게 미리미리 말을 잘 듣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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