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로 갑질하는 양아치 재벌-78화 (78/183)

반도체 공장 (2)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업을 한다는 것을 숨긴 적이 없는데. 왜 내가 숨기려고 한다고 생각하지?

상대방이 삐딱하게 나오자 내 안의 망나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뭐?”

“내가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든 꼬라박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나의 공격적인 말에 전태영은 잠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질 수 없다는 듯이 이내 표정을 싹 바꾸고 말했다.

“제일 그룹이 오성 ENP까지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다고?

되물어보려고 했지만, 전태영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서 가버렸다.

“우리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겠어.”

“······.”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벙쪘다.

“제일 그룹이 오성을 먹는다고?”

이게 뭔 개소리야?

도대체 이 오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어쩐지 오늘 외할아버지도 유난히 날이 서 있다고 느꼈는데, 제일 가에서 오성을 잡아먹는다는 건 또 무슨 말이지?

그러다가 문득 오성 ENP의 구조에 생각이 미쳤다.

오성 ENP 제품의 주 고객은 전기차 업체이다. 일단 테슬라가 최대 고객이고, 그다음이 바로 제일이었다. 제일에서는 전기차에 오성의 배터리를 쓰고 있다.

그렇기에 오성 그룹과 제일 그룹의 관계가 돈독했던 이유도 있고.

그런데 제일 그룹의 사람인 내가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려는 움직임은, 제일 그룹의 자동차 사업 부문에서 배터리 사업을 내재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문득 피곤해졌다.

‘이제와서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면 안 믿겠지?’

사업 하나 하는데 왜 이렇게 신경 쓸 게 많냐.

의도치는 않았지만, 오성 ENP를 적으로 돌리게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축되어있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아무리 오성이라고 할지라도, 내 사업을 방해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이건우와 한바탕 한 전태영은 아버지 전형욱을 찾아갔다. 전형욱은 오성 ENP의 현 사장을 맡고 있다. 전형욱이 말했다.

“흠, 제일에서 배터리 사업까지 넘보고 있구나.”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요즘 전기차 업체들은 대부분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우 그 녀석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광산이라뇨.”

갑자기 광산 개발에 나설 때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광산업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아무 준비도 없이 광산업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황당함을 넘어 웃음이 났다. 심지어 폐광 처리된 광산만 골라서 염가에 매입하지 않던가.

하지만 도대체 거기서 뭘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배터리 사업과 관련된 광물을 손에 넣게 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협력업체 대부분은 우리 손 아래 있으니까.”

배터리 업체는 많은 협력업체가 필요하다. 양극재, 음극재, 반도체, 전해질, 분리막···. 심지어 반도체 안에서도 웨이퍼를 만드는 공장과 패키징하는 공장 등으로 나눠져있다.

그 모든 제조 공장을 직접 운영하지 않는 이상 협력업체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형욱은 그렇지 않아도 치열한 배터리 시장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아끼던 여동생의 아들이라고 해도, 사업은 사업이니까.

“이건우가 반도체 때문에 회장님을 찾아뵀다고 했지. 회장님께서 어떤 기업과 연결해주셨을 거 같으냐?”

아버지의 말에 전태영은 고민했다. 이건우는 지금 미니온-트래킹을 전세계에 팔고, 게임스탑 덕분에 수조 원을 벌어들였다.

“제가 이건우라면 반도체 기업을 아예 인수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그런 기업이 하나 있죠.”

“하이텍 파운드리.”

*

나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내게 제안해준 반도체 기업은 세 곳이었다. 대만의 TCM과 미국의 마그넷 파운드리, 그리고 국내의 LJ 하이니콘.

하지만 나는 세 곳 다 거절했다. 일단 대만과 미국은 내가 영향력을 끼치기에 너무 큰 곳이었었고, 위치도 조금 멀어 공정에 관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LJ 그룹은 오성 전자와 같은 포지션에 있는 기업이었다.

즉, 종합반도체기업으로서 배터리 생산도 겸하고 있다.

파운드리 수주는 하지만 나와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곳이라, 나를 배척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외할아버지는 내 의사를 짐작했는지 순수 파운드리 업체 이름을 꺼냈다.

“하이텍 파운드리는 들어봤느냐?”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그래. 중견기업이기는 하지만, 배터리 2사를 제외한다면 국내에서는 손에 꼽히는 반도체 회사이지. 일 때문에 가끔 만나봤는데, 사장이 나름대로 신의도 있고 능력도 있더구나. 하지만 거기는 자동차용 반도체와 8인치 파운드리를 주로 만드는 곳이다.”

“제가 원하는 것도 딱 그 정도예요.”

깐깐한 외할아버지의 입에서 칭찬이 나온 것을 보면 사장도 꽤 괜찮은 사람인가보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도 전기차에 들어가던 배터리 관리 반도체라 하이텍 파운드리가 적임이다.

왜냐하면, 하이텍 파운드리는 이미 미래 자동차에 납품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퀄리티가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알겠다. 이 정도 규모이면 네 선에서 그냥 진행해도 될 텐데 왜 굳이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구나.”

“말씀드렸잖아요.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해도 안 믿으시더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직접 뚫는 것보다 외할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직빵이다.

또한, 업계 최고 전문가인 외할아버지의 평을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길러온 통찰력은 단순히 문서화된 자료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는 단순한 협력업체를 구하는 게 아니라, 반도체 산업 전반을 믿고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의 평가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산이 철저한 외할아버지도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하이텍 파운드리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쪽 사장과 나를 연결해주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오성 ENP에서 견제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할아버지의 호의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외할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곧장 하이텍 파운드리로 향했다.

*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반도체 회사는 대부분 대기업의 계열사이며, 설계와 제작을 동시에 담당하는 종합반도체 기업이다.

하지만 하이텍 파운드리는 설계 없이 순수한 파운드리만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위기도 많았다. 중소기업에서 시작했기에 초반 설비가 작아 대규모 수주 자체가 어려웠고 그에 따라 이런저런 문제도 많이 겪어서 도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본지, 때마침 일본의 반도체 기업인 엘피다가 망했다.

한때 세계 3위에 기록될 기업이었기 때문에 그 여파는 컸고, 하이텍 파운드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적인 글로벌 수주를 진행해 가까스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금은 주 고객을 미래 자동차로 두고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있으며, 반도체 기술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독자적으로 개발한 차량용 배터리 관리 반도체(BMIC)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이건 내가 준 설계랑 다르잖아요.”

“아니, 전무님.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까지 이대로 납품해왔는데.”

“내가 지난번에 설계가 바뀌었다고 새로운 설계를 보내줬잖아요!”

“전무님이 언제 그랬습니까. 그냥 납품 기한만 맞추라고 했잖아요.”

훤히 열린 사장실. 미래 자동차 전무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싸움 구경은 또 꿀잼인지라 나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전무가 줬다는 새로운 설계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중간에 전달이 잘못되면서 반도체 업체는 기존의 것을 만들었는데, 미래 자동차에서는 새로운 반도체를 원하는 상황.

과연 누가 잘못했을까?

전무는 화가 나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지금 당신 때문에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어?”

“그게 왜 내 잘못입니까. 애초에 전달을 똑바로 못한 사람이 누군데!”

“됐고. 이달 보름까지 납품 기한이나 제대로 맞춰요. 안 그러면 돈은커녕 소송 준비를 해야할 테니까.”

으름장을 놓은 미래 자동차의 전무는 사장실을 뒤돌아 나왔다.

하다하다 자동차 업체가 반도체 업체한테 갑질하는 건 처음 본다. 그 반대의 경우는 종종 일어나기는 한다. 지금 포비드 사태 때문에 반도체 품귀 현상이 일어나면서 공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내연기관차에 비해 전기차는 반도체가 10배나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반도체 업체는 저런 식으로 대할 게 아니라 부둥거리면서 소중하게 다뤄줘야 한다.

“어휴”

한숨이 들려서 옆을 쳐다보자 하이텍 파운드리 사장이 진땀을 닦고 있었다.

“미래 자동차만 아니었어도 진짜···.”

하긴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대규모 반도체 회사와 다르게 중소규모의 회사는 고객님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미래 자동차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곳에다가 주문을 넣어버리면, 그날로 회사는 망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기껏 만든 반도체를 전량 폐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니. 그 손실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KW 에너지의 이건우라고 합니다.”

오늘은 KW 에너지의 사장으로 왔다.

“아닙니다. 저야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회장님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살짝 스쳤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로 오기 바로 직전, 첫째 외삼촌인 전형욱의 연락도 받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캐리온에게 오성 ENP를 주요 감시 대상으로 봐두라고 했고, 역시나 그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전형욱은 내가 하이텍 파운드리에 방문을 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개수작을 부렸다.

내가 어떤 제안을 하든지 간에 그걸 거절하면, 오성 ENP에서 만드는 배터리에 들어갈 반도체를 하이텍에서 주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파운드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달콤한 제안일 수밖에 없다. 특히 하이텍은 포비드가 터진 이후로 수주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공장을 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캐리온에 의해서 도청이 끝난 상황. 알고도 당하면 바보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내가 말했다.

“오성 전자에서 과연 약속을 지킬까요? 자기네가 알아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이?”

“예?”

내 말에 하이텍 사장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소지었다.

“전형욱 사장님이 어떤 제안을 했을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성 ENP에서 과연 언제까지 그 제안을 지켜주겠습니까?”

나는 하이텍 사장이 불안해하는 부분을 콕 찔렀다.

오성 ENP는 오성 전자에서 생산하는 반도체를 쓴다. 그러니 굳이 외주를 줄 필요가 없다.

하이텍 파운드리는 잠깐 쓰이다가 버려지고 말 것이다.

사장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 그게···. 그런 제안을 듣기는 했지만 결정한 건 아닙니다. 아직 사장님의 제안이 뭔지 들어보지도 않았으니까요.”

좋은 자세다.

그리고 내 제안을 듣게 되면, 전형욱의 제안은 생각도 안 나게 될걸?

“포비드가 터진 이후 수주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이텍은 경기도와 충청북도에서 2개 파운드리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문제는 두 공장 중 하나를 놀릴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하이텍이 주력으로 삼은 8인치 파운드리는 차량용 반도체뿐만 아니라 웨어러블기기나 사물인터넷 등 여러 성장시장에서 반도체 수요가 발생하는 만큼, 언젠가는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언젠가’를 지금으로 당겨줄 수 있다.

“제가 하이텍에 BMIC 수주를 넣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 주문량을 감당하려면 공장을 아예 하나 더 지어야 할 겁니다.”

사장은 뭔가 잘못 들은 표정을 했다.

“네? 공장을 더 짓는다고요?”

당연하지. 출력, 안정성, 원가까지 모두 잡은 배터리 ‘파워온’이 나온다면 전세계에 쓰이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증설해야 한다. 하지만 하이텍은 연 매출 3000억도 나오지 않은 중견기업이며, 공장을 증설하려면 정말 최소치로 잡아도 1조는 투자해야 한다.

“예. 제가 1조 투자하겠습니다. 하이텍 파운드리에.”

사장의 턱이 툭 떨어졌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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