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 (1)
내가 발표를 한 후,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미쳤냐는 거다. 특히 할아버지에게 많이 들었다.
“내가 제약 사업에 뛰어든 것까지는 이해한다. 네 말대로 팬데믹이 일어났으니까. 하지만 배터리 시장에 뛰어든다고? 얼마 전에 광산업도 시작한 녀석이?”
“네. 나중에 제일 자동차에도 납품할 텐데 잘 봐주세요.”
제일 그룹의 자동차 부문은 할아버지께서 직접 관리하실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다.
“이놈이! 잘 보긴 뭘 봐! 사업이 장난이야?”
“저도 확신이 있어서 뛰어든 거예요.”
진짜다. 캐리온이 미스리늄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전고체 배터리를 만들 방법을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확장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 돈 많이 벌었어요. 이 정도는 투자할 수 있어요.”
얼마 전 게임스탑 사건에서 번 돈만 해도 8조이고, 이번에 유럽과 일본에 미니온-트래킹을 팔면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또한, 배터리 시장의 경우, 워낙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이기에 매출의 가시성이 높다.
초기에는 상당한 자본지출이 있겠지만, 향후 수년 동안 건전한 재무지표와 재무적 완충 장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내가 판단한 것은 아니고, 전적으로 캐리온이 판단해준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좋은 기술을 가만히 썩힐 수는 없었다. 성공하는 게 확정적인 이 기술을, 하루빨리 써먹어서 돈을 벌어야지.
지금 나는 수십 조의 자금을 굴린다. 하지만 내 위에서는 수백 조의 자금을 굴린다. 나는 빠르게 그 차이를 따라잡아야 하고, 그래서 배터리와 전기차 사업을 택했을 뿐이다.
투자는 몇조일뿐이지만 성공하면 수백, 수천 배로 뛰어서 돌아올 사업이다.
내 고집에 할아버지는 혀를 몇 번 차시더니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으셨다.
하여간 우리 할아버지도 참 츤데레시라니까.
*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그 결과는 빽빽한 스케줄로 나타났다.
시장과의 미팅이 줄줄이 잡힌 것이다.
한서진이 생글생글 웃었다.
“사장님이 자초하셨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오전에 하나하고, 점심 먹으면서 미팅을 가진 후, 오후에 두 개 뛴 다음, 저녁 미팅까지만 하면 끝이에요.”
“···맙소사”
내가 미쳤지.
이건 시간 낭비다. 나는 어차피 할 말은 보내준 제안서를 봐서 알고 있는데, 굳이 얼굴까지 보면서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좋은 생각이 났다.
단톡방을 만들어서 입찰을 희망하는 모든 지자체장을 초대하는 거지. 그리고 즉석에서 경매를 해버리는 거다.
내 입장에서는 시간이 절약되고, 입찰을 원하는 쪽에서는 즉각적으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 아닌가!
나는 내 아이디어를 한서진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표님은 정말, 정말 대단하시네요."
사실 이게 조금 미친 짓이라는 건 알지만, 뭐 어때. 내가 하고 싶다는데. 무려 7조의 사업이 걸린 거라고.
나는 그 즉시 약속이 잡힌 모든 지자체장을 초대했다.
[이건우 님이 부산시장 님, 군산시장 님, 강원도지사 님, 창원시장 님 ···을 초대하였습니다.]
“······.”
한서진이 나를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할 줄은 몰랐던 표정이다.
갑자기 초대를 받은 시장들도 당황한 모양이다.
[부산시장]: ···뭡니까?
[창원시장]: ??
[나]: 제안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개별 연락 드리기 번거로워서 한 곳에 모셨습니다.
[나]: 각 시도에서 얼마나 혜택을 줄 수 있는지 자유롭게 의견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중하게 돌려서 말했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귀찮으니까 깔끔하게 조건이나 내걸어라.
무례하다고 할법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7조가 걸린 사업인데 안 할 거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아마 다들 보좌관과 관련 부서를 호출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나는 소란스러울 그들의 사무실을 생각하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고, 한서진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도 보통 사람은 아닌데, 대표님은 진짜시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첫 타자가 나타났다. 부산시장이었다.
[부산시장]: 저희 부산광역시는 고급 인력이 많이 있으며 국제항이 있어서 수출입에 유리합니다. 저희 부산시에 공장을 지으신다면 보조금과 함께 향후 5년간 세제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나]: 부지는요?
[부산시장]: 아, 그건 내부 논의를 거쳐···.
응 아니야.
나는 바로 부산을 제외했다. 어차피 부산은 땅값도 비쌀뿐더러 내가 원하는 만큼 부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때 군산시장이 나섰다.
[군산시장]: 받고 부지까지 저렴하게 제공해드리지요.
[울산시장]: 울산에는 공장이 많아서 협력업체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군산시장]: 군산 시는 항만시설이 잘 되어있지요
[울산시장]: 울산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산시장]: 울산은 땅값이 비싸지 않소?
[울산시장]: 오해입니다. 외곽에는 부지도 많고···.
울산과 군산시장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두 분은 왜 여기서 싸우실까.
둘 다 각자의 메리트가 있었다. 울산에는 일단 제일 중공업이 자리 잡고 있어서 협력업체를 찾기가 쉽다.
군산도 항만시설이 잘 되어있고 부지 확보가 용이하다.
흠. 둘 다 끌리는데.
그때 조용히 있던 거물이 나섰다.
[강원도지사]: 조건이 뭐든지 다 들어드리지요.
백지수표라니. 어우야 이건 좀 쎈데.
도지사는 어떻게든 유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지만, 현실적으로 강원도가 뭘 해줄 수 있는지는 들어봐야지 아는 일.
[나]: 강원도는 다른 곳에 비해 항만시설이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강원도지사]: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 강원도가 지금은 다른 부산항이나 인천항보다 항만이 쇠퇴하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꽤 이름을 날리던 곳입니다.
[강원도지사]: 사실 항만이 쇠퇴한 것도 주변에 산업시설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출입을 할 이유가 없으니 자연히 쇠퇴한 것이지요. KW 에너지가 들어오기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항만 사업도 살아날 겁니다.
도지사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았다. 일례로 평택은 항구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는데, 오성 그룹이 바로 옆에 있는 수원에 오성 전자를 짓자 평택항이 갑자기 뜨게 됐다.
하긴, 강원도는 수심이 깊은 동해와 맞닿아 있으니 선박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겠지.
도지사는 계속해서 장점을 어필했다.
[강원도지사]: 저희는 빈 땅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그리고 제가 도지사잖습니까. 여러 시와 연계해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지요. 아무래도 특정 시 한 곳에서 하는 것보다 여러 시에서 합작하는 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강원도지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원도지사는 잠깐 말을 끊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강원도지사]: 강원도는 지금 KW 자원개발이랑 하는 사업과 연관해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만.
이 카드를 꺼내 들다니 조사를 꽤 했나 보다.
세 군데 모두 장단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건 한 가지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을 때이다.
바로 미스리늄의 생산지 중 하나가 강원도이고, 강원도가 일본이랑도 가깝다는 것.
전부 고만고만하다면 원료 수급이 제일 좋은 곳을 골라야겠지.
땅땅땅.
그렇게 7조짜리 사업이 단톡에서 낙찰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
나는 강원도에 신산업을 유치하기로 결정했고, 도지사는 굉장히 기뻐했다.
대략적인 업무협약을 작성하고, 사진도 좀 찍고 기사도 내면서 광고도 했다.
그러고 나서 온캐리 변호사의 깐깐한 자문을 받아 뽕을 제대로 뽑는 계약을 체결한 뒤에 바로 공장 설립에 들어갔다.
내가 제일 먼저 지으려는 공장은 양극재 공장이다.
배터리 핵심소재 산업은 양극재, 음극재, 전해질, 분리막 사업이 있다. 그중 양극재는 배터리 생산 원가의 40%를 차지하며 배터리의 용량과 수명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또한, 내가 만들려는 배터리의 양극재는 미스리늄을 핵심 원료로 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신성장 사업을 키우는 일은 중장기적 계획과 설비투자, 기술개발 등이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걸 캐리온으로 땜방했다.
캐리온의 설계대로 최소한의 인력을 사용하고, 최대한 자동화된 시스템을 갖춘 공장을 만들 것이다.
둘째로, 배터리 관리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배터리 관리 반도체가 필요하다.
배터리 관리 반도체는 배터리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충전과 방전 효율성까지 높이는 기능을 맡는다.
그리고 나는 이 방면의 전문가를 한 명 알고있다. 바로 내 외가이자 전자로 유명한 오성 그룹.
그럼 외할아버지와 협상하러 한번 가볼까?
*
요즘에는 분업이 잘 돼서 반도체를 설계하는 업체와 반도체를 제작하는 업체가 나누어진다.
전자를 팹리스 업체라고 부르는데,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에플(A+), 퀼컴, 엠비디아 등이 있다.
팹리스 회사는 기술개발에만 집중하고 생산은 외부의 공장에 위탁함으로써 거액의 투자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기밀 유지에 민감한 반도체 업계의 특성상 이쪽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그리고 반도체 위탁생산만 하는 업체를 파운드리라고 하는데, 국제 시장에서 파운드리의 강자는 대만이다.
그럼 오성 전자는 어떤 경우일까?
바로 설계도 하고 생산도 하는, 종합반도체 업체에 속한다.
나는 오성 전자에 위탁생산을 맡길 생각은 없다.
일단 오성 전자도 배터리 사업을 하기 때문에 경쟁자에게 설계 기밀을 맡긴다는 게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외할아버지도 달가워하시지 않을 게 뻔하고.
하지만 반도체 업체에 한 다리 놔달라고 하는 것 정도는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외할아버지댁을 찾아갔다.
다이아몬드 엠페러 사태 이후 처음으로 뵙는 건데, 다행히 외할아버지도 나를 반겨주셨다.
그 사태 이후 오성 스마트폰의 점유율이 늘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외할아버지의 입 모양만 봐도 얼마나 기분이 좋으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내리고서는 말씀하셨다.
“어릴 때는 제 어미 손 잡고 자주 놀러 오더니 컸다고 일 아니면 찾아오지를 않아.”
“에이 제가 언제 일 때문에 찾아왔다고 그래요. 보고 싶어서 온 거죠.”
“사돈어른이 그러시더라. 네가 광산업체를 소개해달라고 했다던데.”
···이미 할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으셨구나.
“일본까지 가서 폐광된 사도 광산까지 파내고 국내에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고 하질 않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배터리 시장에 한 발 걸쳐보려고요.”
외할아버지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 놈이 나한테 와? 오성 그룹에서 배터리 사업을 하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야.”
오성 그룹은 원래부터 전자로 유명하다. 휴대폰, 반도체, 배터리. 이 세 가지가 오성 그룹의 핵심 업종이고, 그중에 배터리 사업은 나의 첫째 외삼촌 되는 전형욱 사장이 관리하고 있다.
배터리 사업으로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오성 ENP (Energy and Power)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외할아버지는 나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뭐 나는 큰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잘 아는 업체 하나만 소개해 달라는 건데. 이 정도면 이쁜 손주가 부탁하는데 들어주시지 않을까?
“에이 할아버지. 제가 조그마한 배터리 회사 하나 운영한다고 해서 이미 시장에 자리 잡은 오성 ENP에 비교가 되겠어요? 그냥 말 그대로 한 발 걸쳐보자는 거죠.”
그러고는 다이아몬드 엠페러 사태를 들먹였다.
“오성 그룹 스마트폰에만 알람온 앱을 깔 수 있도록 한 덕분에 미국에서 점유율이 높아졌다고 들었는데요.”
“커흠. 그건 그렇지.”
알람온의 얘기가 나오자 외할아버지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난 다이아몬드 엠페러 호 사태에서, 오성 그룹은 알람온 앱이 디폴트로 설치된 스마트폰을 무상 제공했다.
알람온 앱은 미니온-트래킹과 연동하여 확진자 동선과 포비드 상황에 대한 안전한 대처를 제공해준다.
심지어 요즘에는 업데이트하면서 인공지능을 살짝 가미해서 사람들의 일정을 관리해주는 정도의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다.
덕분에 국내와 미국에서 알람온 앱의 다운로드 수는 거의 5억회를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알람온 앱을 오성 스마트폰의 스토어에만 풀어놨다는 것이다. 에플(A+)의 엘폰도 우회를 하면 다운받을 수는 있지만, 디폴트 앱으로 설정된 오성 스마트폰에 비해 귀찮은 게 사실이다.
덕분에 미국시장에서 오성 그룹의 스마트폰 점유율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여 놓고 인제 와서 입을 싹 닫겠다고 하면 안 되지.
그러다가 내가 심사가 뒤틀려서, 에플(A+)에도 알람온 앱을 풀어놓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실까?
내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는지 외할아버지는 혀를 쯧 찼다.
“내가 뭘 해주면 되는 게냐?”
“그냥 적당한 반도체 업체 하나 소개 부탁드릴게요.”
내가 알아볼 수도 있지만, 외할아버지의 입김이 닫는다면 일이 원활하게 풀릴 것이다.
“알았다.”
“사랑합니다. 할아버지.”
“썩 꺼져!”
다 해주실 거면서 왜 툴툴거리시나 몰라.
어쨌든, 이걸로 반도체 문제까지 해결이 되었다.
조만간 시장을 뒤흔들 KW의 배터리 출시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는 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나왔다.
*
외할아버지 서재를 나와 거실을 지나쳐 가는데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전태영. 깐깐한 성격처럼 앙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성 ENP를 맡고 있는 첫째 외삼촌의 아들로, 일단 나와는 사촌지간이다.
명절에만 가끔 보던 사이인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전태영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이번 설날에는 못 봤으니까.”
“요즘 바쁘다며?”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어서.”
정말이다. 대부분의 일은 캐리온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나는 여러 사업을 하면서도 다른 사장보다 꿀을 빨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전태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굳이 숨기려고 할 필요는 없어. 배터리 사업에 뛰어드는 거 알고 왔으니까.”
음?
이 새끼는 말투가 왜 이렇게 공격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