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금속 (5)
은행원의 전산조작 사건에 이어, 은행이 폭력단에 대출상품을 팔았다는 사실이 터진 것이다.
해당 사건은 카드 조작 건과 마찬가지로 2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경영층이 폭력단에게 대출하는 게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는데도, 금융청이 지적하기 전까지 은폐했었다.
심지어 금융청 또한 ‘해당 사건은 이슈화되지 않았으며 피해가 경미하여 업무개선 명령만 내렸다.’는 식으로 흐지부지 넘어갔다.
내가 터뜨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넘어갔을 일이지만, 하지만 이 좋은 걸 터뜨리지 않을 수가 있나.
기자회견장에 문자를 보낸 이후, 미쓰비시와 조직폭력단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다 흐뭇해진다.
그렇게 미쓰비시 은행과 금융청은 도덕적 불감증에 걸렸다며 싸잡아서 두들겨 맞고 있었다.
‘당분간 아마 정신이 좀 없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 끝내기는 뭔가 아쉽단 말이지.
나는 미쓰비시가 확실하게 정신을 못 차리게 해주기 위해서 준비한 세 번째 선물을 주었다.
"캐리온. 미쓰비시의 전산시스템을 살짝 손봐둬."
IT에 심혈을 쏟은 국내 금융권과 달리, 일본 은행의 전산 혁신은 아직 미흡하다. 그중에서도 미쓰비시 은행의 전산시스템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예전에 미쓰비시 은행이 UFJ은행과 합병한 적이 있었다. 보통 합병을 하면 한쪽 시스템이 다른 쪽으로 흡수되기 마련이지만, 미쓰비시 은행은 무식하게도 양쪽의 시스템을 그대로 합쳐버렸다.
덕분에 코어 시스템은 복잡하게 얽혀버리고, 송금, 예금, ATM 등 서비스별로 관리하는 회사와 시스템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여기에 캐리온이 정말 아주 살짝 장난질을 쳐놨다.
그리고 그 작은 장난이, 미쓰비시라는 거인을 꼬꾸라뜨렸다.
<미쓰비시 은행, 1개월간 ATM에서 현금 인출이 불가능>
<미쓰비시 은행, 급여 송금 도중에 증발해?···또다시 드러난 전산시스템의 문제점>
<미쓰비시 은행, 자동이체가 2중으로 이루어져···피해자 속출>
···와우. 어마어마한데.
나도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몰랐다고. 저걸 수습하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릴 거 같은데.
어쨌든 미쓰비시 은행은 당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아마 지금쯤 나란 사람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기회. 나는 미쓰비시가 정신 못 차리는 틈을 타서 미스리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
미스리늄이라는 기적의 금속을 발견한 캐리온은 그 즉시 새로운 기술을 구체화했다.
첫 번째는 바로 미스리늄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미스리늄을 활용 가능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으로 추출을 해야만 한다. 추출한 미스리늄은 이후에 정해진 비율로만 망간, 코발트 등과 결합해야 한다. 만약 잘못된 비율로 조합을 한다면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건 기본이고, 최악의 경우 폭발사고까지 이어질 수 있다.
캐리온은 미스리늄을 추출하는 방법과 그 배합식에 대해서 체계화해놨다.
두 번째로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냈다.
전고체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는 전기차 시장에서 ‘꿈의 배터리’라고 불리는 차세대 기술이다. 그리고 아직 상용화에 성공한 회사가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요구한다.
보통 전기차에 쓰이는 리튬 기반 배터리는 내부를 채우는 전해질이 액체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전고체 배터리는 내부를 고체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덕분에 안전성이 높아져 배터리 화재사고 등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 또한 배터리의 밀도가 크게 높아져 전기를 담을 수 있는 용량도 커지며, 배터리 생산 원가도 절감할 수 있다.
현재 전기차가 비싼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전기차의 배터리에 있다. 만약 전기차 배터리의 원가를 내연기관 차량 수준까지 떨어뜨린다면 가격 경쟁력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 때문에 배터리 기업뿐만 아니라 전기차 사업 확대를 노리는 완성차 기업까지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탐내고 있지만, 아직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기술을 구현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캐리온이 해냈다.
이번에 발견한 미스리늄에 기존에 사용하던 금속을 결합하면 고체 형태의 배터리가 나온다.
물론 아직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므로 상용화를 위해서라면 실제 실험을 거쳐야겠지만, 어차피 형식적인 단계일 뿐이다. 캐리온의 시뮬레이션이 틀렸을 리는 만무하니까.
실험을 바탕으로 논문을 써서 학회에 알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업계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사람이 해야지 말이 된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한다면 다들 의심부터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은 건 캐리온의 연구성과를 대신 실험해줄 사람을 찾는 것.
그리고 나는 그런 인재를 알만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바로 KW 제약의 연구원 백하영. 나는 오랜만에 백하영을 만나러 갔다.
*
백하영은 다크써클이 진 퀭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녀 옆에는 커피잔과 에너지 드링크 캔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연구실에 오면 왜 다들 좀비가 되는 걸까?
“일이 바쁜가 봐요.”
“미니온-메딕의 처리속도가 워낙 빨라서 따라가기가 벅차네요. 그래도 성과는 좋아요.”
반쯤 죽어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만큼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퍼즐만 맞춘다면 피부조직의 완벽한 재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벌써요?”
나는 살짝 놀랐다. 백하영이 미니온을 데리고 연구에 들어간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성과를 보이다니.
물론 백하영이 기존에 연구하던 것도 있긴 했지만, 미니온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됐나보다.
하긴 캐리온은 없던 기술도 뚝딱 만들어내는데, 하위 호환인 미니온도 기존의 연구를 완성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테다.
“축하드려요. 평생소원을 이루겠네요.”
“평생소원이요?”
백하영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아차 싶었다.
백하영의 어머니가 화상을 입어서 연구를 하게 됐다는 건 내가 연구소장으로 있었을 때 알게 된 일인데. 아직 그녀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하는 피부조직의 완벽한 재생. 그 정도 성과면 누군가에게는 평생소원이 아닐까요?”
“뭐, 그렇죠. 그나저나 부탁할 일이 뭔가요?”
다행히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휴, 전생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나니 기억이 헷갈리는군.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배터리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데, 그쪽으로 아는 교수님이 없나 해서요.”
백하영은 과거 한국대 교수로 재직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분야는 다르지만 혹시 아는 교수가 없나 물어본 건데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침 잘됐네요. 김상현 교수님이라고 에너지공학과에 저랑 친분이 있는 교수님이 한 분 있으세요. 요즘 연구가 막혔다고 조금 예민해져 있긴 한데···. 제가 연락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연구가 막혔다라.
오히려 잘됐군. 캐리온이 막힌 거 뚫는 데는 직방이거든.
*
김상현 교수는 한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 중에서도 괴짜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괴팍하고 예민한 성질은 둘째치고서라도, 학과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는 성질머리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학과장이랑 한바탕해서 대학원 수업 하나만 맡기로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에 몰두한다고 했다.
그가 관심있는 분야는 원자력과 2차전지인데, 요즘은 특히나 2차전지 쪽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연구 목표는 2차전지 중 리튬 기반 배터리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
리튬 기반 배터리는 리튬과 다양한 금속물질을 혼합하여 만들어낸다.
그런데 어떤 금속물질을 얼마만큼 혼합하느냐에 따라 장단점이 확연하게 나뉜다.
용량을 높이면 안전성이 떨어지고, 안전성을 높이면 출력이 떨어지고, 안전성과 용량을 둘 다 잡으려면 원가가 높아진다.
출력, 용량, 안전성, 수명, 원가.
어떤 물질을 혼합하더라도 저 다섯 가지를 모두 잡을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질을 혼합하여 배합식을 찾아내는 건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 짓일 테고.
그런데 어느 날.
그 미친 짓을 해낸 사람이 찾아왔다.
*
나는 김상현 교수를 방문했다. 백하영이 미리 연락을 해뒀다는데 연구실에 없는 걸 보면, 이 사람도 정신을 어디다 팔아놓고 사는 게 틀림없다.
조교는 미안해하며 커피를 내왔다.
“죄송해요. 화장실 가신다고 나가셔서 아직 안 돌아오시네요.”
“아닙니다.”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후줄근한 차림의 김상현 교수가 머리칼에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왔다.
딱 봐도 잠을 깨기 위해 세수를 하고 온 모양새.
“······.”
“······.”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약간 민망한 시간을 가졌다.
김상현 교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마저 닦더니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약간 깡마른 몸집에 면도하지 않아 거칠어진 얼굴. 짙게 올라간 눈썹은 그를 성마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죄송합니다. 연구를 하다 보면 가끔 시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때가 있어서요.”
“이해합니다.”
나도 한번 코딩에 매달리면 사흘이 순삭되는 경험을 했던지라 그 마음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그에게 할 말은 많지 않다.
“바쁘실 텐데 긴 시간 빼앗지 않겠습니다. 교수님을 저희 KW 에너지 연구소로 모시고 싶습니다.”
김상현 교수는 눈을 끔벅거리다 되물었다.
“KW 에너지 연구소요?”
그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겠지. 지금 인테리어 작업도 끝나지 않은 곳이니까 말이다.
한국대학교 종신교수이면 명예와 고용이 보장된 직업이다. 매년 연구비도 넉넉하게 주는 편이고. 하지만 이런 곳을 떠나 처음 들어본 연구소로 오라니 황당하기도 할 거다.
“물론 당장 결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겸직 교수로 활동할 수 있고, 어차피 다음 해가 안식년이지 않습니까? 겸사겸사 기업의 연구 활동이 어떤지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그리고,”
나는 말을 끊으며 논문을 하나 내려놓았다.
표지에는 ‘파워온 프로젝트 (Dr. On)’라는 제목만이 박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거면 김상현 교수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파워온 프로젝트. 이번에 개발하는 배터리 이름이다.
“교수님이 현재 연구하시는 내용에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되다 못해 친절하게 해설과정까지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해설서나 다름없다.
하지만 정답은 알려주지 않은 채 모호하게 끝내버린다.
김상현은 아리송한 얼굴로 논문을 받아들었다.
“그럼 생각해보시고 연락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연락을 받는 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KW 코퍼레이션 사옥으로 직접 찾아온 김상현 교수가 말했다.
“닥터 온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을 당장 만나야겠습니다.”
*
나는 일단 김상현 교수부터 진정시켰다. 그는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침묵을 지켰다.
예전에 엘렌 홉스에게서 내가 닥터 온이라는 이상한 오해를 산 덕분에 아직도 엘렌에게서 종종 연락을 받곤 한다.
이 사람도 딱 보니 엘렌과 같은 타입으로 보였다. 나는 섣불리 교수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닥터 온의 행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사람과 오래 대화를 나누지 못하거든요.”
“아···.”
대인기피증이라는 말에 김상현 교수의 표정이 짐짓 안타깝게 변했다.
“연구에 매진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요. 음, 예. 이해합니다. 이 정도 성과를 내려면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하군요.”
알아서 납득해주니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김상현 교수의 가슴은 새로운 물질에 대한 열망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닥터 온이 발견한 미스리늄이라는 물질의 정체부터 그걸 정제하는 방법과 다른 물질과 조합하는 화학식까지.
그것만 알게 된다면 수년간 그의 연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부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김상현 교수의 들뜬 표정을 보곤 은근하게 제안했다.
“닥터 온은 저희 연구소에 파워온 프로젝트를 맡겼습니다. 교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닥터 온의 다른 논문들도 보여드리겠습니다.”
“닥터 온에게 다른 논문도 있나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학회지에 등록되지는 않아서 저희 연구소에 오셔야지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판도라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결국 상자를 열어보았다.
탐구욕이 짙은 이 교수는 과연 어떻게 할까?
그리고 그의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좋습니다. 파워온 프로젝트에 참여하지요.”
당연하게도, 승낙이었다.
*
김상현 교수가 승낙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KW 에너지’라는 법인을 발족시켰다. 동시에 빅뉴스를 공표했다.
“KW 에너지는 국내에 최대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지으려고 합니다. 투자금액은 7조 원인데 아직 공장을 어디에 지을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방자치단체 여러분, 7조짜리 사업을 유치하고 싶으면 제안서를 써서 빨리 튀어오도록.
7조 원짜리 경매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