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4)
나는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로비에서 다소 초조해 보이는 엘렌 홉스를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논문을 읽고 상당히 충격을 받을 거라 예상했기에, 나도 그녀가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논문을 전해준 당일 밤일 줄은 몰랐지만.
나는 짐짓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홉스 양?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그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향해 후다닥 달려왔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 논문을 쓴 사람이 궁금해서 말이에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가 던진 미끼에 제대로 걸려들었군.
“일단 안에서 얘기할까요?”
나와 엘렌은 방으로 들어갔다. 엘렌은 논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논문, 대체 뭔가요? 가이드라인만 보면 포비드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핵심은 빠져있더군요. 심지어 이름도, 발간지도 아무것도 없고 그냥 닥터 온이라는 이름만 있어요. 이 논문을 쓴 사람은 대체 누구죠?”
그녀는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조급하게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나는 짙은 탐구열을 느꼈다.
또 다른 천재의 존재는 성장에 자극을 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뛰어났던 엘렌은 지금까지 자신의 탐구욕을 자극할 만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내가 준 논문을 읽기 전까지는.
논문을 쓴 사람과 얘기해본다면 학문의 본질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캐리온은 실체가 없다. 오직 내 머릿속에만 있을 뿐.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닥터 온을 소개해 드릴 수는 없지만, 논문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제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엘렌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은 연구자가 아니라 사업가가 아닌가요?”
“그래도 논문의 내용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엘렌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질문을 시작했다.
“알았어요. 이중나선 DNA가 핵산 단백질과 함께 강하게 응축된 상태라서, 많은 종류의 단백질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면 항원 결정부가 많다는 뜻이며 따라서 다양한 항체를 생성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변종 바이러스는 항체가 형성되어도 면역이 기능하지 않아요. 그래서 백신도 쓸모가 없지요. 이에 대한 이유를 쏙 빼놓고 결과만 도출해냈는데 중간에 생략된 과정을 설명해주시겠어요?”
“······.”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캐리온은 그 모든 내용을 이해한 모양이다.
캐리온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온갖 전문용어를 동원하여 설명하였고, 그렇게 나는 얌전히 출력기 모드로 들어갔다.
한 시간쯤 문답이 끝날 때쯤, 엘렌의 표정은 무척 밝아져 있었다.
내게 처음 질문할 때의 의심은 눈 녹은 듯 사라지고, 나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예?”
나는 어리둥절했다. 닥터 온과 엘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알게 된 게 있나 보군.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마치 세기의 비밀을 풀어낸 사람의 그것과 같달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와 캐리온은 동시에 기함하고 말았다.
“당신이 닥터 온이군요.”
“예?”
[말도 안 되는 착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도출될 수 있지? 심지어 나는 성이 이 씨란 말이다.
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저런 논문을 쓸 수준이 되지 않습니다.”
“네네. 그렇겠죠. 논문을 쓸 수준이 안 되는데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으시네요.”
“······.”
아니, 본인이 아니라는데 왜?
왠지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지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는 정말 닥터 온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내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이 녀석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엘렌은 눈을 찡긋거렸다.
“알았어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비밀은 지켜드리지요.”
있지도 않은 비밀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엘렌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함께라면 치료제 개발도 금방이겠네요. 물론 저도 양심이 있으니 이게 다 된 밥에 숟가락 올려놓는 격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최대한 당신의 조건을 수용하도록 하지요. 오늘 밤은 너무 늦었으니 구체적인 사항은 내일 얘기하도록 하죠.”
그렇게 나는, 엄청난 오해와 함께 파이저와 치료제 공동개발 계약을 맺기로 했다.
*
내가 엘렌과 협상을 하는 사이, 다이아몬드 엠페러 호의 검사가 모두 끝났다.
검사 결과 탑승 인원의 80%가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다. 심지어 처음에 음성을 판정받았다가 갑자기 발진이 일어나며 양성 판단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며칠 사이에 면역력이 약한 노인을 중심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으므로 상처 부위를 치료하고 체액을 보충하는 등의 대증치료만 행해질 뿐이었다.
모두 격리가 끝나고 집계된 최종 사망자 수는 271명이었고, 중증 환자 수는 그 다섯 배인 1350명에 달했다.
중증 환자 중에서 사망자가 또 나올 가능성이 컸지만, 사망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치보다 훨씬 낮은 7%에 불과했다.
초기 대응을 잘 했다고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사망률이 10%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이 공은 모두 KW 제약이 제때에 나서준 덕분이었다.
적절한 조치 없이 크루즈 안에만 있었다면 사망률이 30%를 훌쩍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이 좋게도 카터 부부는 둘 다 음성이 나왔고, 일주일 만에 하선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자가격리시설에서 2주간 지내야 하지만,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다.
그리고 카터 부부가 하선하는 모습을 발견한 기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물론 기자도 KW 로고가 달린 방호복을 입고 에코 브레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선을 축하드립니다. 몇 가지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
기분이 좋았던 카터 부부는 흔쾌히 허락했다.
“물론이지요.”
“크루즈 내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상황은 어땠습니까?”
제임스 카터는 과장되게 몸을 떨며 말했다.
“말도 마세요. 좁은 선실 안에만 갇혀있었어요. 크루즈 전체가 오염된 상황이라 사실 선실 안도 안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겠어요”
에밀리 카터가 덧붙였다.
“저는 당뇨가 있었는데 가져온 약이 다 떨어져 갔어요. 시기적절하게 이건우 사장님이 와서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지만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조마조마했지요.”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선실 안에서는 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에밀리 카터가 빙그레 웃었다.
“처음에는 잠을 자거나 얘기나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둘 다 폰이나 봤죠. 오성 전자에서 새로운 휴대폰을 나눠줬는데 거기에 볼거리가 많더라고요.”
“볼거리라면 뉴튜브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한국에도 넷플렉스 같은 게 있더라고요. 와칭이라고 영어 자막이 있어서 한국 드라마나 쭉 몰아봤어요.”
“그러셨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불고기요!”
카터 부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워낙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생존자 인터뷰는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며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먼 나라 일이라고 구경만 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 와 미국 방역도 이건우가 다했음
- 미국은 바로 미니온-트래킹 계약하네. 우리 구청장이 똥만 안 쌌어도···.
- 이건우가 움직이니까 대기업 두 곳이 따라 움직이네
ㄴ 친가가 제일그룹이고 외가가 오성그룹이니까
ㄴ 클라쓰 미쳤ㄷㄷㄷ
그리고 희망적인 소식은 하나 더 날아왔다.
바로 KW 제약이 파이저와 포비드 치료제를 공동 개발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제약 거인 ‘파이저’ KW 제약과 포비드 치료제 공동개발에 나서>
「세계적인 제약 기업인 파이저는 국내 KW 제약과 포비드 치료제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오는 3월 3일에 밝혔다.
KW 제약은 포비드 치료제 개발을 위한 전임상을 마쳤으며, 각 모델에 관한 중추적인 연구에서 동물이 치사 바이러스 용량에 감염된 뒤 지연된 치료 이후 위약 대비 통계적으로 유의한 생존 혜택을 보였다.
두 회사는 공동개발을 통해 확보한 특허권, 실용신안권, 상표권, 연구데이터 등의 권리를 5대5의 비율로 공동소유하기로 했다. 해당 지식재산권의 출원, 보정, 등록 및 관리 유지 비용도 공동 부담한다.
또한 파이저 측은 치료제의 임상을 전적으로 돕는 조건으로 매출의 20%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KW 제약의 전임상을 바탕으로 파이저는 미국 FDA와 한국 식약처의 임상시험계획 승인 신청을 동시에 했으며, 이후 유럽 및 남미에도 확대해 글로벌 임상에 나설 예정이다.
이건우 KW 제약 사장은 “KW 제약은 이번 계약을 시작으로 파이저의 뛰어난 임상 노하우를 활용해 포비드를 치료하는 신약들을 개발한다”라며 “양사가 글로벌 블록버스터 포비드 치료제를 개발하면 기업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도 아닌 한국에서 포비드 치료제를 만든다니. 심지어 협력업체는 세계 1위의 제약회사 파이저다.
특히 한국에 빠르게 백신을 공급하기 위해서 미국 FDA와 한국 식약처의 승인 과정을 동시에 밟고 있다고 한다.
치료제가 곧 나올 것만 같은 기대감에 국내의 여론은 뜨겁게 타올랐다.
- 와 파이저랑 계약을 맺었다고?
- 알바트리온이 원하오랑 짜고 구라치던거랑은 클라스가 다르네
- 바이오 관련주 다 뜨겠네
- KW 제약 주식은 못사나?
ㄴ 비상장회사임
아쉬운 건 KW 코퍼레이션의 계열사 중 상장이 된 회사는 KW 미디어밖에 없었다.
모두 KW 제약의 주식을 사고 싶어했지만, KW 제약의 주식은 이건우가 꽉 잡고 있어 장외거래 매물까지 없는 상황.
꿩 대신 닭이라고 사람들이 KW 제약 대신 KW 미디어의 주식을 사면서 KW 미디어의 시총이 50%나 오른 헤프닝도 있었다.
또한 이번 미국 원조에 함께 한 제일 그룹과 오성 그룹의 주식들도 덩달아 오르면서, 두 할아버지는 쌍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내에서 이건우라는 인물 자체에 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 그냥 미디어 사장인 줄 알았는데 제약도 잘 하네
- 못 하는 게 뭐야? 마이다스의 손이야?
- 아···. KW 주식 사고싶다
- 심지어 개잘생겼네. 이게 나라냐.
이건우의 이미지는 완전히 탈바꿈했다.
과거 가문의 위세를 업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망나니에서, 이제는 손대는 족족 대박을 터뜨리며 국위선양을 한 성공한 기업가로 말이다.
*
그리고 그 이건우는 로날드 대통령을 자신의 판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기자를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