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3)
로날드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 위해 애썼다.
귀빈용 응접실이라 그런지 아까 있었던 곳과는 품격 자체가 달랐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값비싼 장식품으로 치장된 이곳은, 재벌 3세인 나도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했다.
그리고 그 방의 가운데, 로날드와 한 여성이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녀가 누군지 알아봤다. 제약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파이저 제약회사의 CEO, 엘렌 홉스.
엘렌 홉스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분자유전학을 전공한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머리를 자랑했다.
중학교 시절 대학의 학부 과정을 모조리 학습했고, 남들이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나이에 세계 최고의 분자유전학과가 있는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계속 승승장구하여 파이저 제약의 이사가 되었고, 몇 년 뒤에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파이저 제약의 CEO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렌 홉스는 그 아름다운 외모로도 유명했다.
풍성한 금발과 녹색 눈동자. 쭉 뻗은 팔다리와 글래머러스한 몸매. 몸 전체에서 풍기는 이지적이고 우아한 분위기.
CEO가 아니었다면 모델을 해도 됐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잠시 그녀에게 둔 시선을 떼고, 먼저 로날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또 뵙게 되는군요.”
로날드는 다소 편한 차림으로 있었는데 약간 피곤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원래 혼자 나오려고 했는데, 엘렌이 기어코 따라오겠다고 하지 않은가.”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면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인 듯싶었다.
하긴 대통령은 원래 사업가 출신이니, 제약회사 CEO인 엘렌 홉스를 알고 있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괜찮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파이저 제약의 CEO를 만나다니 제가 영광이지요.”
나의 칭찬에 엘렌 홉스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로날드에게 재미있는 젊은 사업가라고 듣기는 했는데 정말 그렇네요. 로날드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사람은 처음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적당히 사담을 나누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로날드 대통령이 엘렌 홉스를 데리고 온 것을 보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뻔했다.
KW 제약의 포비드 치료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엘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포비드 치료제 전임상을 마쳤다고 들었어요. 저희 쪽에서도 이제야 연구 개발에 들어갔는데 이렇게 빨리 전임상을 마칠 줄은 몰랐네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구원들이 고생했지요.”
운이라.
수많은 연구를 해본 엘렌은 전임상이 그저 운으로 통과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엘렌은 이 젊은 사업가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이건우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KW 제약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창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회사이더군요. 전임상은 통과했다고 해도 임상을 마치는 건 쉽지 않아요.”
전임상은 죽음의 계곡이라 불릴 만큼 성공 확률이 낮지만, 다행히도 돈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KW 제약의 전임상은 캐리온이 대부분의 일을 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본 임상은 다르다. 말 그대로 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1상에서 3상까지의 과정을 거치는데, 최소 수년 이상의 시간과 수천억 원 이상의 돈이 소비된다.
문제는 그렇게 투자해놓고 실패하는 경우다. 실패하게 된다면 손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대부분의 바이오 벤처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저희 파이저 제약에 기술 이전을 하는 건 어떤가요? 지금 KW에서 임상을 진행하기란 어려울 텐데요.”
기술 이전. 바로 신약후보물질을 대기업에 파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누가 이 치료제를 만든 건데.'
무려 캐리온이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캐리온이 나서서 실패한 일이 있었던가. 임상만 확실하게 거치면, 최소 수십억 개는 판매할 수 있는 치료제가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파이저 제약이 내민 손을 거절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KW 제약의 역량만으로는 험난한 임상의 과정을 통과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인력 부족과 절차적인 문제가 크다.
일단 한국에서는 성윤식이 훼방을 놓을 것이 뻔했고, 미국 FDA 승인을 받고자 해도 자체적으로 IND(임상시험계획승인)를 짤 인력이나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 회사는 임상 시험을 할 역량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요즘은 분업이 잘 되어있지 않습니까?”
최근 다국적 제약사들은 생산·신약 개발·임상·마케팅·유통 등 일원화됐던 부분들을 분리해 아웃소싱으로 진행하고 있다.
즉 R&D를 대행해주는 기업이 있는데, 그중 CRO는 신약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제약기업의 임상 시험을 대행해주는 기관이다.
특히 요즘 CRO 산업은 단순한 데이터 관리 및 통계분석 서비스에서 최근 약물 발굴 · 신약 개발 · 제조 · 운송 · 상품화까지, 제약 산업 전 단계에 걸쳐 서비스를 제공한다.
참고로 파이저도 하청기업으로 CRO를 하나 가지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역제안했다.
“차라리 저희와 공동 개발에 나서는 건 어떻습니까?”
말이 공동 개발이지 전임상은 끝났다. 파이저와 같은 대기업에 임상 대행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엘렌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저더러 겨우 설립한 지 3개월 된 바이오 벤처와 공동 개발에 나서라고요?”
“뭐,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저야 다른 기업을 찾아보면 그만이니까요.”
어차피 주도권을 가진 건 나다. 지금 시점에서 전임상을 끝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 것이다.
나의 당당한 태도에 엘렌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날드가 껄껄 웃었다.
“엘렌, 네가 그렇게 당황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보통 친구가 아니라고.”
이쯤에서 그녀의 협조를 얻어낼 미끼를 꺼내기로 했다.
나는 준비해둔 논문을 꺼냈다. 캐리온의 다섯 번째 부캐인 닥터 온이 저술한 논문으로, 포비드 치료제와 관련된 논문이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쏙 빼놓고, 전체적인 가이드라인만 잡은 논문이다.
원래는 로날드와 협상하기 위해 가져왔는데, 엘렌이 더 적임자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명함과 함께 논문을 건넸다.
“이걸 읽어보시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요.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 논문이 얼마나 뛰어난 물건인지 알아보겠지. 내가 던진 미끼를 받아먹지 않고서는 못 배길걸?
나의 당당한 태도에 결국 엘렌은 고민하는 얼굴로 논문을 받아들였다.
응접실을 나가는 순간까지 그녀의 얼굴에는 혼란과 고민이 묻어있었다.
*
엘렌 홉스가 나가고 로날드와 나만 남았다. 로날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합중국 대통령으로서 자네의 도움에 감사하네. 이 빚은 잊지 않도록 하지.”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겸손하게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미국 대통령에게 빚을 지웠다라···. 얼마나 뽕을 뽑아먹을 수 있을까?
세상에 내가 미국 대통령을 호구 잡는 날이 오다니.
그러나 로날드에게 빚을 지운 것보다, 그의 호의를 얻었다는 게 더 중요했다.
미국 대통령과 이렇게 마주 앉아서 대화할 기회는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마 이 기회가 주어진 것도 나의 도박 때문이겠지.
그리고 로날드가 물었다.
“중국의 압박할 카드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나는 녹음파일이 든 USB를 건네며 말했다.
“저희 KW 제약에서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는데, 중국의 국가안전부 부부장이 그것을 빼돌리려고 하는 증거자료입니다.”
나는 이 자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했다.
단지 성윤식을 날려버리는 카드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냥 터뜨리면 중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며, 성윤식과의 관계를 잘라내겠지.
성윤식은 나락으로 가고, 이 사건은 한국의 어떤 작은 제약회사의 기술이 유출될 뻔한 사건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어차피 성윤식 정도는 이게 없어도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는 놈이다. 소 잡는 칼로 닭만 잡고 끝내버리는 셈.
그래서 나는 판을 키우기로 했다.
“만약 그 치료제가 저 혼자 만든 것이 아닌, 미국의 소유권이 있는 것이라면 문제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야.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정당하게 누를 수 있을 테니까 말일세.”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로날드의 말속에는 불신이 숨어있었다.
뭐,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처음 보는,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중국을 압박하자고 하면 나 같아도 의심부터 할 테니.
그리고 로날드는 지금 미국에 몰려오는 팬데믹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다.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혼란을 잠재워야 할 때.
나는 USB를 도로 회수하며 말했다.
“나중에 필요할 때가 오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그런데 이거 어쩌지.
나는 당신이 조만간 움직였으면 하거든.
판에 올라오지 않는다면, 멱살을 잡고 끌어올릴 수밖에.
로날드가 이 USB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을 내가 직접 만들어줘야겠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회의를 마무리하였다.
*
백악관에서 나온 후 엘렌 홉스는 차에 올라탔다. 푹신한 뒷좌석에 몸을 기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오늘 점심에 있었던 미팅에서, 웬일인지 로날드가 회의하는 내내 정신을 못 차렸다.
꼬치꼬치 물어보니 결국 로날드는 이건우라는 동양인 남자 때문이라고 실토했다.
이건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알아보니 KW 제약의 오너였다.
엘렌 홉스는 KW 제약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포비드 치료제의 전임상을 마친 곳이 아닌가!
신약 개발의 80%가 전임상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양의 작은 회사가 그런 성과를 낸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직 그녀와 파이자 제약도 풀지 못한 것을, 해낸 회사가 있다니.
이건우의 이름을 듣자 그녀는 마음속에 탐구심과 경쟁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로날드에게 막무가내로 졸랐다. 한 번만 같이 보자고.
로날드와 그녀의 아버지는 친구였기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로날드를 이웃집 아저씨처럼 따랐다.
그리고 로날드는 그런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기어코 백악관까지 따라간 엘렌은 이건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논문을 받았다.
제목도 없고 학회지도 없다. 그저 ‘닥터 온’이라는 불친절한 저자명만이 하얀 종이 위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논문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모두 읽는 순간 그녀는 닥터 온의 사고와 논리적인 추론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논문은 정말 쉬웠다. 학부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적혀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읽은 논문만 수천 편이 넘고, 직접 작성한 논문만 해도 수십 편이다.
하지만 이 논문은 그녀가 접한 어떠한 논문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어려운 분자 바이러스학을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학문에 대한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이겠지.
논문에는 여러 두 바이러스의 복수 감염 형태를 설명하며, 포비드의 세포 침입 기작과 그 생활사에 대해서 풀어가면서, 기존의 두창 바이러스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비교 설명하고, 치료제 개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는 순식간에 논문을 독파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논문에 나온 것은 가이드라인 뿐, 정작 중요한 알맹이가 빠졌다.
마치 엔딩이 없는 소설을 본 것만 같은 기분.
당장 이 논문의 저자와 밤새도록 분자유전학에 관해 토론하고 싶었다.
그녀는 기사에게 말했다.
“차를 돌려요. 지금 당장, 로즈우드 호텔로 가주세요.”
그녀가 이건우가 던진 떡밥을 제대로 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