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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콩고물 (1)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 이정혁은 폭행 사주 혐의로 현행범으로 구속됐다.
하지만 마약 유통 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나머지 차를 타고 간 경찰들이 상철파를 성공적으로 털어내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언론에도 ‘미디어 기업 사장 A 씨, 폭행 사주 혐의로 구속되다.’ 정도로 한 줄로만 나왔다.
전부 할아버지가 입단속을 한 결과이다. 이 수많은 눈과 입을 막으려고 얼마나 어르고 달래며 돈을 뿌렸을지 짐작도 안 간다.
할아버지도 아들이 감방에 들어가는 건 막고 싶었겠지.
일단 이정혁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만큼 구속 수사는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주가조작의 의혹까지 받고 있으나 당분간은 구치소에서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재판까지 간다면 어찌어찌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겠지만 말이다.
모든 일을 마친 나는 할아버지의 저택에 방문했다. 할아버지는 며칠 만에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먼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는 더이상 말하지 말하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제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꾸나. 나도 정혁이가 너를 해코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 불찰이지.”
평소 철두철미하시던 할아버지께서도 이 상황은 예측하시지 못한 듯했다.
설마 아들놈이 자기 자식을 해하면서까지 자리를 보전하려 들거라고는 생각하시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판을 키웠다.
“이제 제일 ENM의 사장으로 취임할 것이냐?”
“예”
“이사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들도 알 겁니다. 저에게 항복 선언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걸요. 어차피 회사의 지분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건 접니다.”
최대주주인 내가 45퍼센트를 들고 있고, 2대 주주인 하이버(HIVER)가 내 손을 들어줄 것이다.
하이버는 국내 최대의 포털 사이트로, 미디어 쪽에서는 웹툰과 웹소설의 강자이다.
하이버는 내 OTT 플랫폼에 자신이 보유한 웹툰과 웹소설을 바탕으로 오리지널 컨텐츠를 만들고 싶어했고, 우리는 얼마 전 MOU를 맺었다.
그런 까닭에 하이버 쪽에서도 내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 이제부터 제일 ENM은 네게 맡기마.”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
그렇게 제일 ENM 사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나는 이사회를 소집했다.
“지금부터 제일 ENM의 임시 이사회를 개최합니다. 안건은 이정혁 사장의 공식적인 해임, 이건우 전 MCN 사업본부장님의 사장 취임, KW 미디어 인수에 관한 건입니다.”
“이사들은 의견을 개진해주십시오.”
먼저 이정혁 사장의 해임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미 구속되어서 정상적인 경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사장 취임이 안건으로 올라오자 이사들은 합죽이가 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여기서 개긴다 이건가?’
아무래도 내 장기를 보여줘야겠군.
*
이정혁이 운영하던 제일 ENM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 이정혁과 젊어서부터 회사를 키워 온 중진들과, 이정혁이 직접 뽑아서 키워낸 신진 세력.
이정혁은 일부러 두 세력을 이용해 서로를 견제하게 하며 제일 ENM을 발전시키도록 유도했다.
사내정치의 가장 올바른 예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세력이 워낙 큰 영향력을 갖게 되어 그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서는 회사생활을 이어나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도 두 세력의 대표들이 조용히 있으니 다른 이사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까먹은 모양이다.
이정혁이 없어졌다고 자기네들이 뭐라도 될 줄 아는 모양이지?
나는 두 세력의 대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분, 전 사장님께서 어떻게 해임하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정혁이 왜 물러나게 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난 모양이다.
그 대단하던 이정혁의 모가지를 날려버린 사람이 바로 나다.
저런 잔챙이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캐리온이 미리 준비해온 종이를 흔들었다.
“제 손에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보군요. 먼저 정용선 이사님부터 시작해볼까요? 불···”
불법 취업 청탁부터 꺼내려고 했는데, 원로 세력의 대표인 정용선 이사는 벌떡 일어나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당연히 저는 찬성합니다.”
그에 따라 정용선 이사를 따르는 등기이사들도 일제히 일어나 박수치기 시작했고, 이를 떨떠름하게 지켜보던 신흥 세력들도 일어났다.
그들도 한 자리씩 차지하며 뒤가 구린 일을 잘도 저질렀으니 항복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개기기는 왜 개겨.
“본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알립니다.”
나의 사장 취임안이 결정되고 나서는 일사천리였다. 이후에 나온 KW 미디어의 인수 건과 제일 그룹에서의 계열 분리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한 건의 반대도 없이 통과되었다.
그렇게 이사회는 시작한 지 30분 만에 끝났다.
이사회가 끝나고 난 뒤, 나는 사장실로 향했다.
제일 ENM의 사장실은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물씬 났다. 최고급 가구에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유리창까지.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연구실에 처박혀서 매일같이 코딩하느라 끙끙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제일 ENM, 아니 KW 코퍼레이션이라는 기업의 회장이 되었다.
캐리온이 없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캐리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을 처리하려면 본격적으로 데이터센터를 설립해야 합니다.]
그래. 이제는 데이터 센터를 세울 때가 됐지.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나는 KW 코퍼레이션을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였다.
내가 사장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강원도에 2천억 원을 들여서 데이터센터를 지은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질 캐리온을 위해 온전히 투자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캐리온이 해준 것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이천억 원도 아깝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제일 ENM의 간판을 KW 미디어로 바꿔 치웠다.
형식상으로는 제일 ENM이 KW 미디어를 인수하는 것이었지만, 제일 ENM의 간판이 KW 미디어로 바뀌면서 실질적으로는 KW 미디어가 제일 ENM을 집어삼키는 형국이었다.
이 일을 두고 인터넷에서는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 집 나간 아들이 결국 귀환했네
- 그럼 이제 KW 미디어 주가가 올라가나요?
- 이제 좀 올라가자ㅠㅠ 나는 지금 60층이란 말이다.
ㄴ 60층ㄷㄷㄷ 높은 데 사시네요.
- 사장이 바뀌었으니까 좀 올라가지 않을까요? 이번에 하이버랑 MOU도 맺었다는데.
다행히 지난번 할아버지에게 블록딜 형식으로 주식을 받아오면서 떨어진 주가는, 사장이 바뀌었다는 기대감에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며 급격하게 덩치를 불린 KW 미디어를 관리했다.
물론 캐리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니, 사실 캐리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로 세력의 대표인 정용선 상무는 불법 취업 청탁, 불법 비자금 조성에 연루되어있습니다. 이들의 구심점을 없애고 나머지는 끌어안고 가십시오.]
이번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캐리온은 감정적인 분석 능력이 많이 올라왔다. 벌써 사람의 권력욕과 사내정치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능력으로 이 자리에 올라온 신흥 세력은 끌어안고 가더라도, 이정혁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정용선 상무를 비롯한 원로들은 쳐내야 한다.
나는 두 세력의 대표를 불렀다.
먼저 정용선 상무에게 말했다.
“대대적인 감사를 시작할 겁니다. 여기서 깔끔하게 물러가시지요.”
정용선 상무는 이 상황을 예견했는지 눈을 감았다. 그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담담하게 말했다.
“대신 제 아랫사람들은 자리를 보전하도록 해주십시오.”
“다른 임직원들까지는 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몇 명은 책임지고 사퇴하는 건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내 목적은 원로 세력의 핵심을 쳐내서 이들의 구심점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려서 완전히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나로서는 온화한 처분이다. 어차피 제일 ENM을 완전히 갈아엎을 수는 없다. 대부분의 지시는 캐리온이 내리겠지만, 이를 수행할 인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임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 주십시오. 제 목표는 하나, 제일 ENM의 경영 정상화입니다. 지금까지 제일 ENM은 많은 악재에 시달려왔지요. 이제부터 KW 미디어로 이름을 바꾼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내가 온화하게 타이르자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장님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캐리온은 이외에도 인사에 관해 많은 부분에서 개입했다.
이번에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개발하게 된 인사 시스템이 빛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한 성과물들을 바탕으로 최적의 자리에 인재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음악사업본부장은 차라리 황민혁 차장이 맡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OTT 사업본부를 신설하고 이준호 과장이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십시오. 영화사업본부와 스튜디오 드래곤 사이의 협업을 조율하는 데 능숙한 인재입니다.]
[한서진의 역할은 비서와 경호원 둘 중 하나로 정리하십시오. 저는 경호원을 추천합니다. 비서실장을 따로 뽑는 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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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온이 아니었으면 나 어쩔 뻔했니.
덕분에 이른 시일 내에 KW 미디어는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의 덩치가 커지자 SBC, KBC, MBS에서는 오히려 먼저 콘텐츠를 팔고 싶다고 다가왔으며, 나는 좋은 조건으로 독점 공급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이 지나고 2월이 되었다.
*
별장의 어느 밀실. 세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상석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이정혁이가 구속되었다지요?”
그의 이름은 성윤식. 여당의 4선 국회의원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예. 제일 그룹에서 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마 폭행 사주 건만 혐의가 적용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날 겁니다.”
그의 이름은 박근형. 국내 3대 신문사 중 하나인 한양일보의 사주였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성상납 건은 걸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하긴 그게 드러난다면 이정혁도 징역을 살아야 했을테니, 제일 그룹에서 기를 쓰고 막았겠지요.”
유종근. 국내 최대의 제약회사이자,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 알바트리온의 사장이다.
국회의원, 언론, 대기업, 미디어.
이 네 사람은 늘 모여서 시국을 얘기하곤 했다. 물론 그 자리에 여자를 대주는 건 이정혁의 몫이었다.
“에잉 쯧. 이정혁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우는 것을 잊지 말아요. 그렇다고 제일 그룹을 너무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고.”
“저희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정혁이 구속된 지금, 그들은 이정혁과의 커넥션을 모두 끊어내려고 애썼다. 잘못해서 불똥이라도 튀면 큰일이니까.
성윤식 의원이 말했다.
“근데 이번이 이정혁이 아들한테 당했다고 하지요? 그 아들은 어떤 놈인가요?”
그의 말속에는 이정혁을 대신해서 이건우를 끌어들이자는 뉘앙스가 담겨있었고, 그 의도를 캐치한 한양일보 사장이 말했다.
“아버지를 친 걸 보면 보통 권력욕을 가진 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벌써 기획을 짤 줄 알아요.”
“저번 스캔들부터 이번 마약 사건까지, 모두 그놈이 꾸민 짓입니다. 이정혁 정도 되는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더군요. 결국 서서히 궁지에 몰아넣고 끝장을 내버리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한양일보 사장은 그가 파악한 정보를 풀어놓았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성윤식 의원은 탐이 났다.
“당돌한 놈이군.”
대담함, 정보력, 패기, 야망까지.
젊은 놈치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어린놈을 미리 끌어들여서 잘 조련해서 써먹는다면 그것보다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를 꺾어놓을 필요는 있겠어. 너무 나대도 좋지는 않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간내기는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이정혁을 꺾었으니 기세가 등등할 터.
놈에게 권력의 힘을 보여줘 한번 눌러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한양일보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건우에 관한 이야기를 끝낸 그들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전국에 야금야금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바이러스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 건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이 상황을 최대로 이용해서 이득을 보는 것.
이것이 각 분야의 최고라고 불리는 그들이 모인 이유였다.
성윤식 의원이 제약회사 사장에게 말했다.
“중국 질병 관리청에서 바이러스 샘플을 받아왔으니 그걸로 백신을 개발해보세요.”
제약회사 알바트리온의 사장은 그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진짜 백신을 개발하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국내의 기술력으로는 백신을 개발할 수 없다.
단지 백신 개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흘려서, 백신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알바트리온의 주가가 껑충 뛰어오르겠지.
한양일보 사장도 한 손 거들었다.
“저희가 나팔수를 하겠습니다.”
한양일보에서 연일 기사를 때리면 주가를 띄우기는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럼 세 사람은 미리 저가에 알바트리온 주식을 사뒀다가, 백신 개발로 주식이 고점을 찍을 때 팔아 치운다.
그들은 수십억 원의 부당이득을 얻게 되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겠지.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늘 이렇게 판을 조작해왔으니까.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