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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의 끝 (1)
이건우가 나가고, 이정혁은 아버지인 이만호 회장을 노려보았다.
이건우가 흔들고 간 주식 양도서류.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건만. 그렇게 쉽게 이건우에게 넘겨?
이정혁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버지께서는 뒤를 이을 자식보다 손자가 더 중요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 여자의 망령에 사로잡힌 겁니까?”
그 여자, 이건우의 어머니를 이만호가 딸처럼 아꼈다는 건 집안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이만호 회장은 친자식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었다.
이정혁은 숨도 쉬지 않고 분노를 쏟아내었다.
“어째서 제일 ENM을 저런 어린놈 손에 쥐여주신 겁니까? 제가 제일 ENM을 국내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래. 잘 알고있지.”
이만호는 담담하게 수긍했다.
“그럼 도대체 왜···.”
“시청률을 조작해서 상대를 이기고, 마약을 불법 유통해서 자금을 끌어모으고, 사옥을 짓는답시고 회삿돈에 손을 댔더구나.”
이만호가 숨겨왔던 자신의 치부를 읊는데도 이정혁은 피식 웃기만 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라고 가르친 건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 나도 네가 부정한 일을 했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만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일이 있으면 잘 숨겼어야지.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겨우 아들에게 들킬 정도로 허술하게 일 처리를 하고는 무슨 핑계를 대!”
이만호의 일갈에 이정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그걸 이건우가 어떻게···.”
누구보다 은밀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거액의 돈을 들여 최고의 해커를 고용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동원해서 업무를 처리했다.
횡령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것과 마약을 유통한 일들은 알려진다면,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우가 그 모든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뒤통수를 거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이만호가 말을 이었다.
“같은 집안사람에게 들통났으니 내가 협상이라도 할 수 있었지, 경쟁사가 이 정보를 쥐고 있었으면 너는 지금 구속되고도 남았어.”
이정혁은 머리로는 납득했다. 이만호가 내린 결정이 가장 최선이었다는 것을.
아마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경쟁사였다면 이렇게 이 자리에서 아버지와 얘기를 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좀처럼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만호의 선고가 떨어졌다.
“일선에서 물러나거라. 이건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이정혁은 몸을 떨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분노에 찬 이정혁은 홱 돌아서며 말을 남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제 자리를 꼭 찾을 겁니다.”
비장한 각오를 남기고 사라지는 이정혁.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만호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
이정혁은 집으로 돌아왔다. 분노로 붉어진 이정혁의 얼굴을 본 오수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여보, 무슨 일 있었어요? 제일 ENM이 이건우의 손에 넘어간다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나중에 얘기해.”
이정혁은 가까스로 분노를 누르며 말했다. 여기서 더 말했다가는 사랑하는 아내에게까지 화를 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서재로 곧바로 간 이정혁은 독한 양주를 연거푸 마셨다. 목이 타들어 가듯이 뜨거워지자 정신이 확 깼다.
“후우”
그는 더운 숨을 뱉었다. 이정혁은 사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이건우와의 싸움에서 그는 패배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는 지금 이건우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정혁은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서랍을 뒤졌다.
서랍에서 나온 것은 대포폰이었다. 이 핸드폰에는 오직 한 사람의 번호만이 저장되어 있었다.
마약유통업자.
제일 ENM 내부에서 돌고 있는 마약을 공급해주는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이정혁이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비밀리에 키운 녀석들이었다.
브로커에서 시작한 놈들은 나름대로 체계가 잘 잡혀있고 조직원들의 충성심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뱉은 이정혁은 긴 고민 끝에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한 번이 가기 전에 수화기 너머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 사장님.
“애들을 보내서 이건우를 데려와.”
궁지에 몰린 이정혁이 할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
나는 이정혁이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 자존심에 순순히 물러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이지훈 마약 사건 때야 아들이 걸린 일이니 한발 뒤로 물러나 노예 계약에 서명했지만, 이번에는 이정혁의 모든 것이 걸린 상황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지금까지 이정혁이 해온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
이정혁은 어떻게든 판을 뒤집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아마도 온건한 방법은 아니겠지.
그리고 역시나, 내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정혁을 밀접 감시하던 캐리온이 말했다.
[이정혁이 상철파와 접촉했습니다.]
상철파는 김상철이 만든 조직으로 불법 마약유통에 깊게 관여하고 있으며, 이정혁과 긴밀한 커넥션을 맺고 있다.
캐리온에 의하면 이정혁이 사조직으로 부리기 위해 만든 놈들이라고 한다.
역시 이런 선택을 했나. 설마했는데 진짜 폭력 조직을 불러서 아들을 잡아오라고 할 줄이야.
그래도 아들이니 험하게 다루지는 않겠지만, 역시 연을 끊은 아들보다는 권력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어쨌든 이정혁이 상철파에게 뭐라고 지시했을지는 뻔하다.
그럼 나도 그에 알맞은 카드를 내놓아야지.
나는 옆에 있는 한서진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좀 도와줘야겠어요.”
한서진이 생긋 웃었다.
“뭐든지요. 우리 아들의 약값을 대주는 분인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저번에 그 윤단아 사건이 있었던 후, 다행히도 한서진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한서진의 아들 한지우는 지금 제일 의료원과 제일 제약 합동 연구를 통해 우선순위로 치료를 받고 있고, 상태가 조금이나마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일만 끝나면 필승 기획에 숨겨진 금괴를 꺼내기로 했다.
덕분에 요즘 한서진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한서진이 물었다.
“그래서, 이번 상대는 누구인가요?”
“약쟁이들이요.”
“아, 걔네들은 특히 위험한데.”
“그래요?”
“깡패 새끼들은 그냥 두들겨 패면 되는데 약쟁이들은 보통 이상한 놈들이 많죠. 어디 나사가 하나씩 빠진 놈들이라 말로 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런데 어떤 조직이에요?”
“혹시 상철파라고 알고 있나요?”
한서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되물었다.
“상철? 김상철?”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한서진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으로 접었다.
“예전에 겨우 브로커나 하던 놈이 조직을 세웠구나. 많이 컸네.”
아는 사람이었다니. 저 바닥이 생각보다 좁긴 좁구나.
“삼 년 전에 세운 신흥 조직이랍니다. 강남 쪽에서 활동한다는데 최근 무섭게 세를 불리고 있다고 해요.”
나는 캐리온이 상철파에 대해서 조사해온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들의 본거지와 마약밀매방식, 그리고 심지어 이정혁이 나를 어떻게 어디로 잡아 오라고 지시했는지도 캐리온이 파악한 상태였다.
종이를 넘기던 한서진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를 칠 거예요? 본거지? 아니면 이정혁이 있는 곳?”
이정혁을 확실하게 보내버릴 기회이다. 한 곳만 덮치면 서운하지.
“둘 다 칠 겁니다. 참고로 이번에는 경찰과 함께 잡을 겁니다. 형사님들도 실적 한번 올리셔야죠.”
한서진이 깔깔 웃었다.
“세상에. 살면서 경찰들이랑 같이 일하게 될 줄은 몰랐네.”
한서진은 재미있어했지만 나는 진지했다.
“괜찮겠어요? 경찰이 껄끄러우면 이번 일은 빠져도 됩니다. 보아하니 김상철이랑 아는 사이인데 그쪽에서 불어버리면 어떡하려고요.”
한서진은 손을 내저었다.
“아, 괜찮아요. 이번에 사장님이 제 신상을 털었잖아요.”
나는 찔리는 게 있어서 움찔했다.
한서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렛에게 그냥 제 개인정보를 다 지워버리라고 했어요. 저는 지금 전과도 없는 깨끗한 여자라고요.”
딱 봐도 렛이 엄청 고생했을 것 같다.
“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런데 경찰이 믿을 거 같아요? 그쪽도 정보를 교차 검증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아는 형사님이 있어서 그분의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형사님도 알아요?”
나는 미소지었다.
아주 잘 알지. 내가 왕년에 경찰서과 검찰청을 밥 먹듯이 드나들곤 했었거든.
*
나는 한서진과 함께 최진태 형사를 만나러 카페에 왔다. 최진태 형사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개망나니 아니야?”
“······.”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돌아볼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개망나니라니요. 개과천선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까?”
최진태가 깜짝 놀랐다.
“어, 그러게? 반말을 찍찍 내뱉던 놈이 존댓말을 쓴다고? 너 누구야? 이건우 맞아?”
참 정신없는 사람이다. 최진태는 나와 한서진을 번갈아 보더니 알겠다는 듯 내 등짝을 쫙 후려쳤다.
“짜식. 여자친구 앞에서 이미지 관리하는구나. 어차피 들통날 텐데 평소처럼 해.”
“······.”
나는 이쯤에서 평소 이건우의 행실을 되짚어보다가 최진태의 반응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이전의 이건우를 본 사람은 지금의 내 모습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겠지.
이 새끼, 정말 천하의 망나니였구나.
오죽하면 경찰서 내에 이건우 전담 형사가 배정이 되어있겠는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자친구 아닙니다. 저희 직원이에요. 참고로 애 엄마입니다.”
“헉, 너무 어려 보이셔서 그만. 실례했습니다.”
내 말에 최진태 형사는 화들짝 놀랐고, 한서진은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었다.
최진태의 헛소리 덕분에 분위기는 무척 산만해졌다.
“자꾸 이러면 저 그냥 돌아갑니다.”
“에헤이. 가더라도 정보는 주고 가야지.”
이 사람, 완전 마이페이스다. 뭔가 말을 섞을수록 피곤해지는 기분에, 나는 그냥 재빠르게 서류를 넘겼다. 조금 전 한서진에게 보여준 그 서류이다.
서류를 받자 최진태의 눈빛이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사라지고 진중한 표정으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서류를 다 읽은 최진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철파는 그냥 꼬리일 뿐이군.”
“네. 하지만 보통 꼬리가 아니죠. 몸통을 낚을 수 있는 꼬리이지요.”
보통 신흥 조직은 마약밀매에서 큰 건을 담당하지 않는다. 마약유통은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 수사망을 피하거나 꼬리를 쉽게 잘라내기 위해서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복잡한 유통과정 중에서 상철파는 크지는 않지만,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뒤에서 누군가 밀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면 제일 ENM도 엮여 들어가는데 나한테 정보를 넘겨주는 이유가 뭐지?”
“정확히는 아버지를 엮고 싶어서이죠. 저는 제일 ENM을 가지고 싶은데, 자꾸 절 방해하시더라고요. 저랑 아버지랑 사이 안 좋은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아버지잖아.”
앙숙처럼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는 했지만, 남들 눈에는 아직 부자지간으로 보이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진짜 이건우도 아닐뿐더러, 이제 와서 그런 감정 따위에 연연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상관없어요. 어쨌든 도와줄 겁니까, 말 겁니까.”
최진태는 씩 웃었다.
“설령 가짜 정보라도 이 정도 스케일이면 무시하고 넘어가기 어렵지. 내가 마약반을 한 번 설득해볼게.”
하긴. 잘 해서 몸통까지 낚을 수만 있다면 1계급 특진은 확정이겠군.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준비되면 연락해주세요.”
가자. 약쟁이들을 함정으로 유인하러.
*
그날 밤. 이건우의 집 주위를 감시하던 상철파 조직원은 뜻밖의 상황을 맞닥뜨렸다.
논현동 저택의 차고가 열리고 차량 세 대가 동시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일한 종류의.
“혀, 형님. 세 차 중 어디를 따라가야 합니까?”
간부라고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이 당황한 간부가 화를 냈다.
“씨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지만 화만 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차 세 대는 나란히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추적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아이씨 몰라. 우리는 제일 왼쪽을 쫓아갈 테니까, 너희 둘은 내려서 나머지 두 차를 쫓아가.”
“저희가요? 어떻게요?”
“택시라도 타던가!”
상철파의 야심찬 계획이,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