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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사냥 (6)
김남일 이사의 난데없는 계약 파기 통보를 받은 이정혁은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이렇게 파트너십을 포기한다고?’
분명히 JTBS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를 통해 김남일은 주석영 사장을 상대로 기선제압 하는 것을 넘어, JTBS의 실세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계약이었다.
이런 완벽한 조건을 걷어찬다고? 왜?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제안이 들어왔나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이정혁은 혹시나 해서 김남일에게 수차례 연락을 해봤지만, 전화는 꺼져있고 메시지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JTBS에 직접 찾아가 보았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남일이 이미 이사직에서 사퇴한 것이다.
이정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욕심 많은 김남일이 하루아침에 모든 걸 포기하고 물러났다고?’
욕심 많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 김남일이다. 그렇기에 신임 사장과도 그렇게 기 싸움을 벌였던 거고.
‘혹시 주석영 사장이 그렇게 강한 상대였나?’
아니, 이건 아녔다.
주석영이 그렇게까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사회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초장에 박살을 내버렸겠지.
한참 고민하던 이정혁의 머릿속에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우.
‘설마 그놈이?’
그러고 보면 항상 그랬다. 요 몇 달간, 이건우가 엮인 일에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벌어졌다.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커진 거지?’
그저 길가에 놓인 돌멩이 정도라고 생각했던 방해물이, 어느새 집채만 한 바위가 되어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다.
아니, 지금 그 바위는 자신을 깔아뭉개기 위해서 굴러오고 있었다.
이정혁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수많은 경쟁을 겪고, 승리해서 지금 이 자리에 올라섰다. 그 과정에서 위기를 수도 없이 맞닥뜨렸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이겨 낼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이건우는 뭔가 달랐다. 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자신의 모든 수가 다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상념에 빠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는 그대로 당하고 만다.
지금 그들은 체스를 두고 있다. 이건우가 다음 수를 읽기 전에 그가 빨리 움직여야 했다.
‘JTBS가 떠났으니, 이제 남은 건 지상파 3사. 그중에서 SBC가 가장 상업적인 면이 강하지.’
이정혁은 그 즉시 SBC 사장과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SBC 사장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 사장. 오랜만에요.”
“반갑습니다. 사장님. 잠시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미안해요. 당장은 어려울 것 같군요. 지금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라서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사장이 아는 사람이구먼.”
“제가 아는 사람이요?”
이정혁은 의아해하면서도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그가 아는 사람이라면 동석해서 자연스럽게 사업 이야기를 풀어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SBC 사장의 말은 이정혁은 뒤통수를 거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요. 아들이 나와 사업 얘기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더군. 당돌한 게 이 사장을 빼닮았어. 하하.”
수화기 넘어서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능글맞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번에도 또, 이건우였다.
SBC 사장이 말했다.
“나중에 내가 연락하지요. 그런데 이 사장, 지금 나와 얘기할 시간이 없을 텐데요?”
“예?”
“아직 뉴스를 보지 않았나보구먼, 쯧. 사업 얘기는 일단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고 얘기합시다.”
“아, 예.”
이정혁은 홀린 듯이 전화를 끊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머리끝까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이건우가 SBC 사장을 만났다고? 그리고 일이 터졌다는 건 무슨 일이지?’
이정혁은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실검에 가득 자리 잡은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1. 이정혁 주가조작
2. 이정혁 청부해커
3. 제일 ENM 주가
4. 해커 주가조작 의혹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제일 ENM 사장 이정혁, 경쟁사의 미공개 실적을 유출해 주가조작>
「작년, 천하 미디어의 인트라넷 서버가 해킹당하면서 ‘실적 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났었다.
당시 해커에 의해 미공개 실적을 자료가 발표된 이후 천하 미디어의 주가가 폭락해 수많은 투자자가 손실을 본 일이 있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검찰에 해당 사건의 정황과 그 모든 증거를 제보했고, 주모자가 경쟁사인 제일 ENM의 이정혁 사장으로 드러났다.
금융위원회는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정혁 사장을 회부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기사의 뒤에는 이정혁이 천하 미디어를 해킹하고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적혀 있었지만, 이정혁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다가 댓글 창이 나왔다.
- 제일 ENM 왜 이러냐···. 저번에 마약도 터지더니
- 나 오늘부터 제일 물건 안 써야겠다.
- ㅅㅂ주가 지금 난리났넼ㅋㅋㅋㅋㅋ
수많은 사람이 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머리가 띵해졌다. 두 달 전부터 제일 ENM은 악재에 시달렸다.
양소희 스캔들, 김우영 자살 사건, 이지훈 마약 사건.
그리고 거기에 이어서 자신의 경쟁사 주가조작까지.
‘이번 사건을 수습하지 못하면···.’
아무리 회장님의 아들이자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이정혁이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이만호 회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제일’이라는 이름.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일단 기자들에게 전화해서 기사를 막는 것부터 먼저였다.
그는 최초 보도한 기자를 찾아서 전화했다. 다행히 이정혁이 잘 아는 기자였다.
몇 번이고 매수한 적이 있는 사람이기에 전화번호도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자의 첫마디는,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어이없는 변명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정혁은 분노를 쏟아냈다.
“지금 장난해? 당신 이름으로 올라온 기사인데 당신이 안 썼으면 누가 썼다는 거야!”
“아 진짜 저 아니라니까요. 누가 제 아이디를 해킹한 거 같습니다. 지금 저도 로그인도 못 하고 있어요. 진짜 제가 쓴 게 아니에요.”
기자의 필사적인 변명에 이정혁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하긴, 몇 번이고 돈을 받아먹은 놈이 생각이 있으면 그런 기사를 썼을 리가 없다.
“일단 끊어.”
그다음 바로 홍보실장을 불렀다. 이정혁의 고함을 들은 홍보실장은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말했다.
“사장님 기자들을 어떻게든 막고는 있는데,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스케일이 커지고 있어 막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 줄이라도 관련 기사를 쓰면 광고 끊는다고 해.”
“예?”
초강수였다. 그만큼 이정혁이 급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당장 반박 보도자료부터 내고! 내 돈을 먹은 기자들한테 잘 말해둬.”
“알겠습니다.”
홍보실장은 허리를 숙이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혼자 남은 이정혁은 작년 이맘때쯤 청부해커 렛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렛은 미국의 보안자료를 뚫다가 걸려 징역을 살다 나온 상태였다.
음지에서는 워낙에 유명한 해커였었지만, 전과가 있었던 만큼 요주 감시 대상이라서 팀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정혁은 제일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장남이라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아버지인 이만호 회장은 그런 조건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입지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두 동생은 식품과 건설 쪽에서 차근차근 자리를 잡고 있었고, 후계자리에 관심이 없는 막내 여동생도 제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후계 위를 점하려면 제일 ENM이 미디어 업계에서 1등을 해야만 했다. 이만호 회장은 1등이 아니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벌인 천하 미디어를 밀어내기 위한 계략을 짰고, 렛을 끌어들였다.
이정혁은 렛의 해킹 능력이 필요했고, 렛은 이정혁의 뒷배가 필요했었다.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둘을 그렇게 손을 잡았다.
렛의 공격으로 천하 미디어는 휘청거렸고, 이정혁은 그 틈을 빠르게 치고 올라가 미디어 왕좌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도, 비서실도.
그가 직접 움직였기 때문이다.
렛과 연락을 한 것은 오직 이정혁뿐이었다.
그렇기에 천하 미디어 해킹 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본인과 렛, 단둘뿐이어야 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빠져나간 거지?’
그는 일단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렛에게 연락을 했다.
“분명히 그때 뒤탈 없이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나?”
- 죄송합니다. 분명히 그랬는데 저희 서버가 털린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장님의 자료가 새어나갔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자, 이정혁은 이제 황당해지기까지 했다.
해커 그룹의 서버가 털린다고? 그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그리고 자료가 빠져나갔다면 검찰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자료가 진짜라는 말이 아닌가.
누군가의 손길이 목을 죄고 있는데, 이정혁은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누구야. 누가 그런 거야.”
- 지금 저희 팀 해커들이 달려들어서 범인을 역추적하고 있습니다만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다른 고객의 자료가 아니라 사장님의 자료만 쏙 빼간 것을 보면 사장님과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듯합니다만···.
- 의심 가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뭐야? 뭔데 그렇게 망설여?”
- 해킹 프로그램이 깔린 시기를 보면 사장님의 아드님이 왔다 간 시기와 일치합니다.
마지막 말에 이정혁은 잠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지훈이가 그쪽에 왔다 갔다고?”
- 아, 둘째 도련님이 아니라 첫째 도련님 말입니다. 제일 ENM의 서버가 털렸다고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과 관련해서 찾아왔었는데··· 모르셨습니까?
이정혁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던 사람은···.
“···이건우다. 이건우가 그랬어.”
- 예?
의아해하는 렛이 되물었지만, 이정혁은 더이상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끊었다.
이정혁은 생각에 빠졌다. 렛과 꾸민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금 터진 주가조작 건이고, 다른 하나는 시청률 조작이다.
일의 경중으로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강력한 패이다. 하지만 이건우는 그것을 숨겼다.
이정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
나는 시청률 조작 문건을 공개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이걸 이용하면 제일 ENM에 타격을 주고, 조금 더 확실하게 이정혁을 쫓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일 ENM을 온전히 내가 차지하는 것.
내가 만약 여기서 시청률 조작 사건까지 터뜨린다면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아마 제일 ENM이 가지고 있는 채널에도 징계가 내려질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가질 거면 최대한 살려서 가지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굳이 시청률 조작 사건을 터뜨리지 않아도 악재가 겹친 제일 ENM의 주가는 신나게 떨어지고 있었다.
김우영 자살 사건에, 이지훈 마약 게이트, 그리고 사장의 주가조작 사건이 2주 간격으로 터지니 주가가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제일 ENM의 주가는 요 며칠 벌써 40퍼센트 가까이 떨어졌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던 주식을 던져댔고, 나는 그 틈을 타서 KW 홀딩스의 이름으로 주식을 야금야금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주식이 4.99퍼센트. 공시 직전까지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정혁이 들고 있는 주식이 2.5퍼센트라는 걸 고려하면 정말 많이 모은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제일 ENM의 대주주는 제일 그룹이라는 것이다. 제일 그룹 회장인 할아버지가 40퍼센트를 들고 있었다.
대주주인 할아버지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서 사장이 바뀌는 것이다.
그럼 예전에 할아버지께 달아드린 빚을 받으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