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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사냥 (2)
내가 드라마의 제작을 강행한 이유는 전적으로 캐리온을 믿기 때문이었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무조건 대박이지.’
내 자식 같은 캐리온이 쓴 시나리오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캐리온과 함께 빙의한 건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전생에 자식도 없이 열심히 인공지능만을 만들다 죽은 걸 누군가가 불쌍하게 여기고 나를 굽어 살펴주셨나 싶다.
이 몸에 들어온 후 이룬 모든 것들이 캐리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모두 캐리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이 몸에 들어오자마자 이정혁과 이지훈의 공격에 당해 어디 지방으로 쫓겨났겠지.
캐리온 혼자서 사람 수백 명의 역할을 하고 있다.
투자하고,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작곡과 법률 업무까지 담당한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리고 이제는 시나리오 작가 역할도 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와 외국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시나리오를 분석하여 MSG가 듬뿍 들어간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름하여 오리온 작가가 쓴 <스카이하우스>
명문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이 드라마는, 명문고 아이들의 경쟁을 녹여내는 것과 동시에 상류층 어른들의 불륜과 갈등 또한 담아냈다.
프리 프로덕션은 빠르게 진행됐다. 편성제작 회의는 JTBS 사장이 강력하게 밀어붙여 주말 핫타임에 배정됐고, 기획회의도 거의 마무리됐다.
작가는 이미 섭외가 됐고 대본도 나왔으며, 예산은 내 지시로 빵빵하게 배정됐다. 다만 문제라면···.
“이거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정혁 사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 앞에 있는 CP(책임 프로듀서)가 이정혁의 사람인 것이다.
*
스튜디오 라이언과 외주 계약을 맺을 때, 이정혁이 어떤 식으로든 방해 공작을 넣을 것으로 생각은 했다만 내 드라마 CP에 자기 사람을 떡하니 앉혀놓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은 없지.’
그리고 그 먼지 하나를 가지고 협상을 하는 게 바로 내 특기이다.
하지만 CP는 대놓고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의 견제 속에서 CP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이제 실무자인 PD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다행히 이정혁은 PD까지는 건드리지 않았는지, 그의 태도는 철저하게 사무적이었다.
나는 PD에게 리스트를 건네며 말했다.
“저희 작가님이 고려하고 있는 배우들입니다.”
스튜디오 라이언에서는 캐스팅에서 오리온 작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고 했다.
원래 드라마 쪽은 작가의 입김이 세기도 하고, 캐리온이 그려낸 대본이 워낙에 뛰어났기에 캐스팅 우선권을 넘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캐리온의 의견을 참고하여 캐스팅보트를 대략 작성해서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참고해서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예산을 넉넉하게 지원해주시긴 하셨는데, 경쟁작들이 많아서 배우 몸값이 높아지고 있거든요.”
“경쟁자들이요?”
“예. 이번에 tvM이랑 MBS에서도 주말 드라마로 신작을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저희랑 날짜가 겹쳐요. 심지어 홍보도 엄청나게 때리고 있더군요. 아마 매우 박터지겠지요.”
tvM이라면 제일 ENM의 채널이다. 이정혁이 나를 노리고 일을 벌이는 게 틀림이 없어 보인다.
아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를 하다니. 참 속도 좁으셔.
PD는 캐스팅보트를 넘기며 말했다.
“주연 배우 쪽에는 저희가 AD를 보내서 성의 표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오디션을 보도록 하지요. 혹시 오디션에 작가님께서도 참가하실 수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저희 작가님이 대인기피증이 있어서요.”
나는 자연스럽게 둘러댔고,
[저는 대인기피증이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서는 오리온 작가가 발끈하며 반박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반박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대신 제가 참가하겠습니다.”
“사장님이요?”
PD는 의외라는 듯했지만, 곧 내가 예전에 제일 ENM에서 MCN 사업본부를 맡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긴 사장님도 관계자이시니 안목이 있으시겠지요. 그럼 캐스팅은 이대로 진행하면 되고···. 이제 남은 건 주제곡과 테마곡이네요.”
나는 눈을 반짝였다. 돈을 벌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또 우리 캐리온이 작곡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데 말이야.
“제가 아는 작곡가가 있는데 한 번 곡을 받아와도 되겠습니까?”
“사장님은 발이 넓으시군요. 누구입니까?”
“작곡가 개리라고 있습니다.”
원래 의도했던 이름은 캐리였는데, 내가 박세나의 곡을 전달하면서 오타를 내는 바람에 개리가 되었다.
캐리온이 어찌나 구박하던지.
“개리라고요?”
PD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내가 곡을 받아온다는데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신경 써주신다면야 감사하지요. 저희도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네. 그럼 다음 오디션 때 뵙지요.”
*
청담동, 3층 건물을 통째로 쓰는 고급 샵.
VIP만 받는다는 꼭대기 층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국내 최고의 탑배우 강지원은 머리를 손질받으며 대본을 읽고 있었다.
숨도 안 쉬고 대본에 몰두한 그를 보며 원장이 슬쩍 물었다.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강지원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네요. 몇 번은 읽었는데도 재미있어요. 이런 대본은 ‘비밀의 정원’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비밀의 정원은 S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로 당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비밀의 정원에 출연한 배우들을 모두 스타로 만들어준 기록을 가진 드라마이기도 했다.
특히 주연으로 출연한 강지원도 비밀의 정원을 통해 지금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강지원에게 비밀의 정원은 특별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였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대본을 비밀의 정원에 비유한다?
지금 읽고 있는 대본도 그만큼 인기가 좋을 만한 대본이라는 뜻이다.
최근 강지원은 tvM, MBS, 그리고 JTBS에서 모두 출연 제의를 받았다.
그리고 그중 tvM이 제일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다. 출연료도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고, 모든 촬영일정을 본인에게 맞춰서 진행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강지원은 쉽사리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로 얼마 전 전달받은 JTBS의 대본 때문.
대본을 읽은 순간 강지원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무조건 대박 난다.
그의 위치가 되면 몸값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인지도를 계속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JTBS에서 보내준 <스카이하우스>는 마음에 쏙 들었다.
원장은 눈을 빛냈다.
“그래요? 드라마 제목이 뭔데요?”
강지원은 눈을 찡긋거렸다.
“비밀이에요.”
“쳇. 나도 좀 알자.”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여자가 생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왔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여배우 장여진이었다.
“언니 저 왔어요! 커피 드세요.”
장여진과 매니저는 양손에 커피 캐리어를 들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원장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여진이 왔어? 센스가 있다니까.”
장여진은 커피를 나눠주다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강지원을 발견했다.
그는 장여진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고 대본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뭐야, 강지원 너도 있었어?”
그 말에 강지원이 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커피”
장여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야, 누님이 직접 커피를 사오셨는데 좀 더 공손해질 수는 없냐?”
“시끄러워 여진족. 대본 읽고 있잖아. 커피나 내놓고 꺼져.”
“뭐? 여진조옥?”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자 장여진이 눈에 쌍심지를 키며 달려들었다. 아역 때부터 여러 작품을 같이 했던 그들은 남매와도 같은 관계였다.
그녀는 강지원이 보고 있던 대본을 휙 뺏어 들었다.
“스카이하우스? 너도 이거 받았어?”
그제야 강지원도 장여진에게 관심을 주었다.
“설마 너도?”
장여진은 턱을 도도하게 들더니 말했다.
“당연하지. 이 몸이 꼭 출연해주시길 바란다며 AD가 직접 대본을 주고 가더라.”
강지원이 피식 웃었다. 재수 없음이 물씬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그래? 나는 PD가 직접 나오던데.”
장여진이 이 새끼 얼굴에 커피를 끼얹을까 말까 고민하는 찰나, 강지원이 말했다.
“어쨌든 여기는 내가 나갈 거니까 너는 나오지 마라.”
“시끄러. 내가 들어갈 거니까 너는 빠져.”
그러자 매니저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둘이 같이 나가면 안 되냐?”
그 말에 강지원과 장여진이 기겁했다.
“저더러 이 새끼랑 물고 빨고 하라고요?”
“여자애가 물고 빠는 게 뭐냐.”
“시끄러. 그럼 넌 나랑 키스신 찍고싶냐?”
“너 돌았구나?”
찐남매 캐미를 자랑하는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원장과 매니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오디션 당일.
나는 약속 시각보다 조금 더 일찍 가서 PD와 회의했다. 이번 드라마의 주제곡과 테마곡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자리에는 음악 감독도 함께 있었다.
우리 소속사 아티스트인 세나가 가이드한 주제곡을 듣자, 음악 감독이 연신 빛나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와···. 음색이 너무 좋은데요. 그리고 노래랑 찰떡이에요.”
PD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각 곡이 가진 느낌이 작품에 너무 잘 어울리네요. 세 곡 모두 픽스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드라마의 OST는 단순한 노래가 아닌, 어쩌면 드라마 전체의 흥행을 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중요한 것을 즉석에서 컨펌을 하다니.
내가 가지고 온 OST가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닌가 보다.
PD는 연신 곡을 만든 작곡가를 칭찬했다.
“그런데 작곡가분이 정말 대단하군요. 그 짧은 시간에 세곡이나 뽑은 것도 놀라운데 곡들의 퀄리티가 장난 아니네요. 우리 드라마가 뭘 하려는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아요.”
그건 그 둘이 동일인물이라서 그렇습니다.
사실을 밝힐 수 없는 나는 허허 웃으며 PD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하하. 이 친구가 워낙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요.”
“다음에 한 번 소개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PD의 눈에는 다음 작품에도 꼭 곡을 받겠다는 욕심이 엿보였다. 그때 조연출이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피디님. 배우들 모였답니다.”
그 말에 PD가 일어났다.
“가시지요. 사장님.”
나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그나저나 강지원과 장여진이 모두 작품에 출연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장여진이 내 작품에 나온다니! 나는 장여진의 캐스팅에 성공했을 때 뛸 듯이 기뻤었다.
내가 한창 캐리온을 만들던 시절, 나의 외로운 밤을 달래주던 건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캐리온이 쓴 드라마에 직접 출연을 한다니! 세상사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흥분해서 떠들자 PD가 웃으며 말했다.
“제일 ENM 측에서 회당 출연료를 2억 가까이 불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2억이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쪽에서 부른 금액을 훨씬 웃도는 금액이었다. 대기업이라 그런가 돈지랄도 풍년이구나.
“네. 그런데도 저희 작품을 선택했다는 건 그만큼 대본이 잘 뽑혔다는 거겠죠. 그러고 보니 오리온 작가님도 그렇고, 개리 작곡가님도 그렇고 사장님은 능력 좋으신 분을 많이 알고 계시네요.”
“하하하”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놈이 그놈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