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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사냥 (1)
이정혁은 조용한 식당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을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JTBS의 이사. 그것도 이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조만간 이 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정혁은 이 사람을 이용해 이건우와 주석영을 방해할 심산이었다.
JTBS의 이사회와 신임 사장 간의 알력은 업계에서 워낙 잘 알려져 있다.
신임 사장이 개혁적인 정책을 통해 쇄신하려고 하는 반면, 나이가 있는 원로들은 그 상황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신임 사장이 조직 개편을 통해 보도 부문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만큼 주석영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거겠지.’
다른 말로 하면, 이사회는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상에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정혁이 조금 기다리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JTBS 이사 김남일이었다.
둘은 서로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허허. 바쁘신 이 사장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다 부르셨습니까?”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얼굴이라도 자주 봐야지요.”
“사장님께서 이렇게 신경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담을 나누다가 이정혁이 운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신임 사장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지요?”
신임 사장, 주석영의 이야기가 나오자 김남일의 얼굴이 굳었다.
요즘 주석영 때문에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정혁이 왜 이 자리에 자신을 불렀는지 생각했다.
‘이정혁 사장이 왜 주석영을 신경쓰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이정혁의 아들 이건우가 주석영과 함께 사업을 하나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정혁 사장과 이건우의 사이는 안 좋지.’
대충 계산이 선 김남일은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로운 사람이다 보니 이래저래 하고 싶은 것이 많나 봅니다. 그 때문에 회사에서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에요.”
“이사님께서 괜히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이정혁은 슬슬 안건을 꺼냈다.
“저희 아이가 얼마 전 주석영 사장과 계약을 맺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JTBS의 콘텐츠를 와칭에 서비스하기로요.”
“예. 저희 내부에서도 검토 중인 사안입니다. 먼저 드라마, 영화, 예능 중에 골라서 20편만 제공하고, 공동제작하는 드라마의 흥행 여부를 보고 추가 서비스를 하기로 했지요.”
그리고 김남일 이사는 그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계약이 성사되어 공동제작하는 드라마가 성공한다면?
주석영 사장이 드라마국마저 완전히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계약 자체는 훌륭했기 때문이다.
방송 콘텐츠 경쟁력을 회복하고, 이를 기반으로 프로그램 공급이나 포맷 수출 등 사업 수익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주석영에게 모든 권한을 눈뜨고 빼앗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김남일의 표정을 본 이정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제부터 중요한 얘기를 할 차례였다.
“이사님께서 내부에서 그 계약에 어깃장을 놓아주십시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대신 더 좋은 제안을 드리지요. 조만간 저희 제일 ENM에서도 OTT 플랫폼을 출시할 겁니다. 그리고 JTBS뿐만 아니라 지상파 3사와도 손을 잡을 거예요. KW 미디어 같은 중소 회사보다 저희와 손을 잡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이정혁은 생각했다. 이렇게 될 바에야 자신도 나서서 같은 OTT 시장에 끼어들어서 지금껏 쌓아온 저력으로 눌러버리면 된다.
방송 3사와 제일 ENM이 힘을 합치면 KW 미디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안을 들은 김남일의 표정이 좋아졌다. 꽤 혹하는 모양.
이정혁은 쐐기를 박기로 했다.
“그리고 저희 OTT 플랫폼의 지분 10퍼센트를 JTBS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이 조건은 이사님의 공으로 하셔야지요.”
김남일도 생각했다. 확실히 중소 회사보다 제일 ENM과 같은 대기업과 계약을 맺는 것이 훨씬 더 비전 있다. 그리고 이 계약을 성사시킨다면 자신 또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계산을 끝낸 김남일이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
JTBS 사장 주석영은 이사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이번 안건은 와칭과 계약을 맺고 공동제작을 하는 내용이었다.
“이건 기회입니다. 저희 콘텐츠를 세계 각국으로 수출할 기회라고요.”
“제가 여태껏 말했듯이 지금 미디어 업계는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이 서로 파이를 갈라먹느라고, 경쟁이 치열해질 대로 치열해진 상황입니다.”
“이 기회를 선점해서 저희 콘텐츠 역량을 강화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점에서 KW 미디어와 협력은 미래로 나아갈 좋은 방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석영은 연설하며 이사회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사들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이건우 사장과 계약을 맺기를 잘했군.’
그리고 주석영이 연설을 마쳤을 때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짝
자신의 연설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흐뭇해진 주석영이 손뼉을 친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 얼굴을 확인했을 때, 주석영의 표정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손뼉을 친 건, 다름 아닌 그의 정적 김남일이었으니까.
김남일이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
“사장님의 연설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사장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레드오션인 만큼 수익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겠지요.”
김남일이 이렇게 쉽게 수긍할 사람이 아닌데···. 주석영은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김남일은 서류 가방에서 새로운 사업계획서를 꺼내서, 사람들에게 한 부씩 나눠주었다.
사업계획서의 맨 앞장에는 제일 ENM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그렇다면 업계 최고인 제일 ENM과 협력하는 건 어떻습니까? KW 미디어 같은 중소기업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폭탄 발언이었다.
주석영은 김남일이 나눠준 사업계획서의 개요를 보았다. 대충 보아도 JTBS에 유리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제일 ENM이 이렇게까지 양보했다고?’
위기감이 느껴졌다. 잘못하다가는 이사회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길 수 있다. 주석영은 빠르게 입을 놀렸다.
“KW 미디어는 중소기업이니 우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이용해서 수익 배분을 유리하게 가져올 수 있습니다.”
조급해진 주석영과 달리 김남일은 느긋하기만 했다.
“제일 ENM에서는 KW 미디어와 수익 배분을 똑같이 해주는 거에 더해, 앞으로 만들어질 플랫폼 지분의 10퍼센트를 저희 회사에 넘겨준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지분을 10%나 넘겨준다고?”
“이러면 조건도 제일 ENM이 좋은 것 아닙니까? 굳이 KW 미디어와 손을 잡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김남일이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게다가 제일 ENM은 지상파 3사도 끌어들여 최대의 OTT 플랫폼을 만들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이름값도 있는데 수준에 맞게 놀아야지요. 중소기업과 손을 잡는다니, 말이나 됩니까.”
이제 회의장의 분위기는 이사회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주석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내가 와칭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을 때, 주석영 사장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겉보기에는 침착해 보였지만 캐리온이 그의 안면근육을 분석해줬다.
[화를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나는 한서진에게 차를 내오게 시켰다. 주석영은 차를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웠다.
“이사회에서 계약을 반대했습니다.”
“이사회에서요? 분명 JTBS에도 도움이 되는 사업일 텐데요.”
“네. 와칭에 드라마와 예능 20편을 제공하는 것까지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제작에 관해서는 반대했습니다. 대신 제일 ENM과 손을 잡기로 했어요.”
제일 ENM이 또 튀어나오다니.
또 이정혁이 개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이제 놀랍지도 않다. 아들을 구치소로 보냈으니 칼을 갈고 있겠거니 했는데, 노림수가 이거였던가.
조금 차분해진 주석영이 상황을 설명했다.
제일 ENM에서도 독자적으로 OTT 플랫폼을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여기에 지상파 3사와 손을 잡고 JTBS도 이 연합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이었다.
심지어 JTBS에게 OTT 플랫폼 지분을 10%나 준다는 모양.
이사회에서 눈이 안돌아갈 수가 없는 계약이었다.
그렇기에 나와의 계약은 무산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 대신 제일 ENM에게 모든 콘텐츠를 몰아주고, 공동제작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죠?”
“김남일 이사입니다. JTBS에서 가장 오래된 이사 중 한 명이죠.”
JTBS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라···.
벌써 냄새가 나는구만.
그럼 해먹은 것도 많을 텐데 이제 내 장기를 발휘할 때가 된 건가?
내 장기를 십분 발휘한다면 김남일 이사와 이정혁의 계획은 무산시킬 자신이 있다.
다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니 계약도 다시 해야하지 않겠는가?
“김남일 이사와 아버지는 제가 설득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드라마 제작은 그대로 가는 거로 하지요.”
“하지만···.”
주석영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대로 이사회에게 주도권을 뺏길 겁니까? 저들이 이대로 제일 ENM이랑 계약을 체결한다면, 사장님은 허수아비로 남은 임기를 보내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적나라하게 사실을 꼬집자 주석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주석영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주석영이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JTBS와 스튜디오 라이언과의 공동제작으로 갑시다. 당장 JTBS의 투자를 받는 건 무리이니, 제가 초기 투자를 맡도록 하지요. 대신 수익 정산 비율을 바꿔야겠지요?”
주석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렇게 되면 부담이 없을테니 거절할 이유도 없겠지. 대신 상당한 수익을 내게 내줘야만 했다.
만족스러운 협상 끝에 주석영이 나가기 전 물었다.
“그런데 김남일 이사는 어떻게 설득할 겁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동시에 캐리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김남일 이사에 대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이제 척하면 척이다.
어쨌든 이정혁과 김남일의 협잡질 때문에 지금 우리 와칭 서비스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내가 여기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그러려면 그 두 사람의 계약을 끊어야 하는건데, 내가 생각한 방법은 김남일을 설득(?)해 이쪽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내 설득 실력이라면 김남일도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걸?
‘그나저나 아버지가 또 방해를 놓는군.’
사랑하는 아들을 구치소로 보냈으니 머리 끝까지 화가난 건 이해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곤란하다.
사사건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방해를 하는 통에 일이 시원하게 진행되지를 못하고 있다.
단 명목상으로는 아버지인 데다가, 워낙 회사를 아끼시는 할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드리고 있었는데말야.
나도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버지도 이제 슬슬 은퇴하실 때가 됐지.’
억지로 은퇴시켜 드릴 수 밖에.
은퇴하시면 더 이상 자존심 상할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
나는 그렇게 불같은 효도를 계획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