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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온? 오리온! (2)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캐리온은 수백 개의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KW 미디어에서 사용할 최고의 시나리오를 추려낸 뒤 남는 시나리오를 JTBS에 보낸 것이었다.
독특하기도 하면서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은 JTBS사장의 호기심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펴는 순간 그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생동감 넘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 매력적인 대사, 자극적인 막장 요소를 섞었지만 탄탄한 스토리.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오랫동안 이 바닥을 굴러다닌 사장은 직감했다.
‘이건 무조건 먹힌다!’
드라마국의 제1본부는 이사회가 꽉 쥐고 있다. 반면 제2본부는 주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사장인 자신이 제2본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 드라마를 찍어서 대박을 낸다면?
드라마국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다른 국의 국장들이나 이사회를 휘어잡기 더욱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 공룡인 제일 ENM이 직접 추진하는 일이니 탄탄대로일 거고.’
그런 계산 끝에 그는 이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하하. JTBS 사장 주석영이라고 합니다. 제안서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
JTBS 사장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 나는 일이 잘 풀렸다는 걸 느꼈다.
나는 주석영 사장이 찍어준 주소로 향했고 거기에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한정식 식당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모르게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프런트에 이름을 대자 직원이 방으로 안내해줬다. 안에는 주석영 사장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KW 미디어 사장 이건우라 합니다.”
“허허, 반가워요.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죠?”
놀랍게도 이건우는 주석영 사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물론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이건우를 만난 것이지만 말이다.
당시 둘은 제일 ENM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만났고, 미디어 업계에서 일하고 있던 주석영 사장도 그곳에 자리했었다.
주석영 사장의 얼굴을 보자, 과거 이건우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 신년회 때 뵈었었죠. 아직 정정해 보이십니다.”
“어이쿠. 이 친구가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띄어주는 말도 할 줄 알고 그러네. 그래요. 아버님은 잘 있습니까?”
주석영 사장이 아버지의 근황을 묻는 건, 이번 OTT 플랫폼 출시에 제일 ENM이 얼마나 관여하는지 알고 싶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일 ENM에서 이 일에 전혀 관여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나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집안에 일이 있어서 아버지는 지금 조금 바쁘십니다. 그래서 제게 전권을 맡기셨지요.”
‘집안일’을 꺼내자 주석영 사장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마약 게이트에 동생인 이지훈이 연루됐다는 것을.
익명의 누군가가 이지훈의 마약 투여 사실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아, 그래요. 내가 실언을 했구먼.”
“아닙니다.”
대화가 민감한 주제로 넘어가자 주석영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나는 근황 토크는 이쯤에서 끝내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보내드린 제안서는 어땠습니까?”
주석영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요. 무려 제일 ENM이 콘텐츠 유통 파트너십을 체결했으니 KW 미디어의 발전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이겠지. 내부 논의를 거쳐야 하긴 하겠지만 별문제 없이 통과될 거요.”
다행히 계약 건은 큰 문제 없이 체결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주석영은 뭔가 궁금한게 있는 듯했다.
“혹시 뭐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주석영 사장은 몸을 앞으로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오리온 작가는 누군가요? 이번에 보내온 시나리오를 봤는데 아주 괜찮더구만.”
질문을 하는 주석영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주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흠뻑 빠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 회사에서 발굴한 신인 작가입니다. 본인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해서 필명을 썼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주석영이 우리 오리온 작가에게 푹 빠져있으니 잘 되었군. 준비해온 다음 사업 얘기를 꺼낼 타이밍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리온 작가의 신작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뭔가요?”
“저희와 함께 공동제작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8화씩 시즌을 2부제로 가고, JTBS에서 방영을 하는 겁니다. 대신 1부는 매주 2화씩 저희 플랫폼에 선공개를 하는 겁니다.”
“으음”
주석영 사장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발상이긴 했다.
본방이 있기 전에 선공개를 하다니, 그러면 본방 시청률이 떨어질 게 뻔했다.
내부 단속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모험을 하기에는 불안하겠지.
그 생각을 짐작한 나는 말했다.
“시청률이야 약간 떨어지겠지만, 저희 플랫폼은 해외에도 유통될 예정입니다. 그러면 수익의 단위가 달라질 겁니다.”
마지막 말이 주석영 사장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차피 시나리오는 잘 빠졌다. 플랫폼에 선공개하는 건 특별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외국인 유입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일이 잘 되면 드라마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게 메리트가 있어 보였다.
수십 년간 미디어 업계에서 몸담은 주석영은 오리온 작가의 시나리오가 가진 가치를 알았다.
그의 본능이 이건 실패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 명의 기업인이기도 한 주석영이 보기에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모든 계산을 마친 주석영 사장은 이건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좋아요. 같이 잘 해봅시다.”
*
일주일 후, JTBS에서 먼저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예능을 20편을 들여왔다.
그와 동시에 KW 미디어를 분리 발족하면서, OTT 플랫폼 ‘와칭’을 발족했다.
와칭을 만들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 가격과 마케팅이다.
국내 유료방송의 월평균 이용요금은 약 2~3만 원 선이며, 대부분 가입자가 이를 이동통신과 결합해 사실상 공짜 내지는 저렴한 가격에 이용하고 있다.
와칭의 이용료가 기존 유료방송보다 싸긴 하지만, 기존에 있던 유료방송을 해지하고 단독으로 와칭에 가입할지는 미지수이다.
심지어 이동통신과 연계하고 있기에 한번 가입한 플랫폼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나도 통신사와 제휴를 맺어 자사 IPTV 서비스에 와칭을 독점 제공하는 조건으로 계약 조건을 조율했다.
IPTV 가입자는 기존 셋톱박스로도 와칭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TV를 켜면 화면에 와칭 앱이 노출되고 이를 통해 바로 콘텐츠 시청이 가능하게 된 것.
이렇게 되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편의성이 높아지기에, 와칭을 구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통신사에서도 추가로 마케팅 비용을 투자해 기존의 가격보다 저렴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는 통신사와의 제휴로 안방 공략이 더 쉬워지는 셈이다.
캐리온의 예측에 따르면 제일 하이비전 가입자 400만 명 중 4%인 약 16만 명 정도가 와칭을 이용할 것이고, 통신사와의 제휴를 통해 그 숫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나는 광고를 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제일 ENM과 스튜디오 라이언, 그리고 JTBS의 콘텐츠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을 메리트로 삼아 구독자 공략에 나섰다.
유튜브, 티비 광고, 지하철 광고, 포털 사이트 광고 등 할 수 있는 광고는 모두 때려 박았다. 광고비에만 백억은 넘게 쓴 것 같다.
그리고 이 공격적인 홍보는 그 결실을 보이기 시작했다.
월요일을 시작하는 첫 회의, 이준호 과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일주일 만에 가입자 8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아마 입소문이 나면 더 늘어날 거예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돈을 쓴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지금 첫 한달 무료 이벤트로 유입된 가입자들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다음 달 유료 전환을 하면서 기존 고객이 이탈하지 않도록 신규 콘텐츠를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그 일환으로 JTBS와 협력하여 새로운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했다.
“황민혁 차장님은 계속해서 콘텐츠를 수급해주세요. 특히 이번에는 외국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은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으니 그쪽으로 파보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OTT 플랫폼 ‘와칭’은 순풍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
이정혁은 TV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수척한 얼굴의 이지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 검찰청 포토라인 앞에 서 있었다.
“성실히 조사받겠습니다.”
의례 하는 말을 남기고 검찰청 안으로 들어서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건우와 굴욕적인 계약을 맺은 후, 그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미 잡혀간 다른 자제들이 이지훈도 함께 마약을 했다고 실토했고, 이지훈이 마약을 입수했다는 명백한 증거 또한 있었다.
무엇보다 익명의 누군가가 이지훈이 마약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보한 것이다.
결국 구속수사는 피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인단을 붙여서 어떻게든 집행유예로 빠져나오게 하겠지만, 엘리트 코스만 밟으며 자신의 뒤를 이어 제일그룹을 물려받아야 하는 아들의 커리어에 큰 흠집이 나버렸다.
그 생각만 하면 이정혁의 속은 타들어 갔다.
이정혁은 나지막이 한 이름을 씹어뱉었다.
“···이건우”
그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이건우만 아니었어도 아들이 마약을 했다는 사실을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곤욕을 치를 이유도 없겠지.
거기다가 제일 ENM이 손해만 보는 계약을 맺었다.
계약 내용을 떠올릴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공동제작을 할 때 모든 비용을 제일 ENM이 부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그 대가로 얻는 게 고작 10퍼센트의 정산비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정혁은 이 계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곧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우가 출시한 OTT 플랫폼을 망하게 하는 것.
플랫폼이 망해버린다면 콘텐츠를 제공할 필요가 없어져 버리니 계약도 효력을 잃을 것이다.
이정혁은 자신이 공략해야 할 와칭의 약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와칭의 약점은 콘텐츠 수급이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지금 와칭에 제대로 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은 제일 ENM이 유일했다.
외국 드라마와 영화는 어찌어찌 들여왔다고는 쳐도, 지상파 3사가 그렇게 쉽게 콘텐츠를 내어줄 리가 없다.
이번에 이건우가 받아온 콘텐츠들도 나온 지 시간이 지난 것들이거나 시청률이 조금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OTT 플랫폼은 종국적으로 케이블 커팅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방송사와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우가 JTBS 사장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JTBS 내부 사정이라면 이정혁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신임 사장과 이사회 간의 알력 다툼은 업계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정보였다.
이사회 라인을 들쑤셔보니 쓸만한 정보가 나왔다.
이건우와 JTBS 사장이 드라마 공동제작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JTBS 사장은 드라마국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고, 이건우는 JTBS의 콘텐츠를 받아오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둘 사이의 관계를 끊으면 되겠지.’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새로 출시하는 드라마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방법만 수십 가지였다. 실력으로 찍어 눌러도 되고, 배우를 추문에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 이런 건 그가 전문이니까.
마침 주말 드라마 편성이 비어있다. 그것도 JTBS에서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와 같은 시간대이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이정혁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