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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정체 (3)
이정혁은 이번에 새롭게 옮긴 서초동 사옥에 방문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해주었다.
“반갑습니다 사장님. 요즘 자주 보네요.”
나의 능글맞은 태도에도 이정혁은 얼굴만 찌푸리고 말았다.
아마 지금쯤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겠지만, 남아있는 자존심이 그에게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게 했다.
반면 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를 대했다
평소라면 이정혁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정혁이 몸소 선물을 들고 찾아왔는데 안 반가울 수가 있나. 이정혁에게 뜯어먹을 것들만 생각하면 웃음이 났다.
“자,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회의실 안에는 다과가 세팅되어 있었고, 나는 온캐리 변호사가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한 번 읽어보시죠.”
계약서를 받아든 이정혁은 한 장, 한 장 넘겨 읽었다. 나는 여유 있게 차를 호로록 마셨다.
이정혁은 끝까지 읽고 난 후 내팽개치듯 책상에 내려놓았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야. 왜 조건이 이렇게나 달라진 거지?”
“뭐,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기는 합니다.”
나는 웃으며 수긍했다.
내가 제시한 계약서에는 제일 ENM뿐만 아니라 자회사인 스튜디오 라이언과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튜디오 라이언은 5년간 ‘와칭’의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을 맡고, 제작 비용을 모두 스튜디오 라이언 측에서 부담한다.
이것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양아치 짓이지만, 나는 한술 더 떴다.
제일 ENM이 보유하고 있는 드라마, 예능, 그리고 영화에 대한 유통권을 이쪽에서 확보한다.
수익 배분은 1:9, 당연히 내가 9를 가진다.
그리고 IDC(데이터 센터) 무료 이용권도 계약서에 적어 놓았다.
OTT 플랫폼을 서비스하려면 서버가 많이 필요한데, 나는 아직 데이터 센터를 구축할 만큼 자금의 여력이 없다.
처음에는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생각했는데, 마침 제일 ENM에서도 데이터 센터를 가지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면 굳이 돈 주고 남의 서비스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가족끼리 나눠 써야지.
마지막으로 제일 ENM의 또 다른 자회사인 ‘제일 하이비전’과 손을 잡았다. ‘제일 하이비전’은 케이블 방송 사업체로, 종합 유선 방송 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다.
초고화질 방송(UHD)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OTT박스에 와칭을 탑재할 예정이다.
이 모든 계약은 5년 동안 유지된다. 통상 2-3년을 계약 기간으로 잡는 것을 고려했을 때 두 배나 다름없다.
무려 한 번의 계약에서 4가지나 뜯어가는 거다. 그것도 5년 동안!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으실 건 아니잖습니까?”
“내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사회에서 분명 반대할 게다.”
“그건 제가 신경 써야 할 사항은 아닌 것 같군요. 아버지가 알아서 잘 설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들을 감방에 보내시기 싫으시다면 말이죠.”
내 말을 들은 이정혁의 표정은 붉게 달아올랐다. 실시간으로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는 모양.
아이고, 나이도 있는 양반이 저러다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몰라.
필사적으로 화를 참은 이정혁은 결국 나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이 쓰레기 같은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지.”
말을 마친 이정혁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신 너도 더 지훈이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라.”
나는 피식 웃었다. 눈물 나는 부정이구만.
“물론이지요.”
이정혁은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는 이정혁이 준비한 각서에 사인했다.
이걸로 나는 OTT 플랫폼을 서비스할 기반을 확실하게 다졌다.
내가 계약서를 보며 싱글거리며 웃고 있자 이정혁은 그 꼴이 보기 싫었는지 각서를 챙겨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이정혁이 떠나고 난 뒤, 캐리온이 나에게 물었다.
[이지훈의 일은 이대로 마무리할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감히 내 소속 아티스트를 건드렸는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각서의 내용은 내가 다시는 이지훈을 건드리지 않는 거였지?”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되지.
“그렇다면 익명으로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제보하면 되겠군.”
*
이정혁과 계약을 마친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거실 소파에는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저녁 어스름에 가려 인영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여리여리한 몸매에 생글거리는 눈웃음.
“서진 씨?”
나는 불을 탁 켰고, 역시나 소파에 앉아있는 것은 한서진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한서진은 싱긋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정도도 침입 못 하면 킬러라고 할 수 없죠. 아, 이건 암묵적인 비밀이었나요? 그런데 사장님 집도 보안에 좀 신경 써야겠어요.”
“······.”
나름대로 최신 보안 시스템이 지키고 있는 것이 내 집이다.
집에 가져갈 건 딱히 없지만, 경호원이라도 몇 명 배치해야 하나 싶었다.
나는 잔뜩 긴장했지만 태연한 척 말했다.
“맥주?”
“좋아요.”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편의점에서 4개에 만 원 하는 바로 그 캔맥주였다.
그걸 본 한서진은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재벌도 캔맥주를 먹나 보군요.”
그야 나는 껍데기만 재벌이니까 그렇지.
“이만큼 맛있는 것도 없거든요. 그래. 그동안 좀 알아봤나요?”
“렛이 꽤 실력 좋은 해커인데 그 보안망을 뚫었더군요. 솔직히 감탄했어요.”
나는 미소지었다. 캐리온이 칭찬을 받으면 괜히 나도 으쓱해진다니까.
“제 정보원이 능력이 좋죠.”
“그런데 필승 기획에 들어간 이유는 어떻게 알아낸 거죠? 그건 자료에 없었을 텐데.”
“당신이 예전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임승용이란 자를 만났다는 얘기를 알게 되었거든요.”
단 한 줄이었다.
그리고 캐리온은 그 한 줄의 단서를 가지고 모든 사건의 경과를 밝혀냈다.
“임승용이라는 사람, 필승 기획이 있는 건물을 지은 일용직 노동자였죠? 그리고 그는 우연히 건물주가 빌딩에 금괴를 숨겨놓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공사 도중에 벽에 금괴를 묻어버린 것이죠.”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가족들에게 유산으로 남겨둘 목적이었죠. 물론 상속세 탈세의 목적도 있었기에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난 금괴들이더군요.”
“하지만 건물주는 가족에게 금괴의 존재를 말하지 못하고 급사했고, 건물에는 필승 기획이 입주하게 되었죠.”
“그래서 당신은 금괴를 찾기 위해서 필승 기획에 취직한 겁니다.”
한서진은 미소를 띠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정확해요. 보면 볼수록 당신의 정보력이 탐나는군요. 예전에 나랑 같이 일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행히 한서진이 당장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한서진을 이용한 이유를 본격적으로 말해주어야겠지.
“제가 필승 기획에 있는 금괴를 찾도록 도와주죠. 나와 거래를 합시다.”
한서진이 팔짱을 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건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일단 필승 기획 건물의 소유주가 바로 저거든요.”
금괴가 빌딩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내가 바로 그 건물을 매입해버렸다.
“당신이 몰래 금괴를 꺼내려고 해도 벽 전체를 허물고 그 안에 들어있는 금괴를 옮기는 데 적어도 이틀은 걸리죠. 소음도 엄청날 거고요. 그거 몰래 가지고 갈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한서진이 금괴를 꺼내지 못한 이유였다.
정곡을 찔렸는지 한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한서진이 금괴를 훔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한서진의 아들, 한지우 때문이었다.
한지우는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 대학 병원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현재 난치병을 앓고 있는데, 꾸준히 병원에 다니고는 있지만, 증세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병원비라는 것이 엄청난 수준. 보험 처리도 쉽지 않고 치료 과정도 워낙 복잡한 까닭에 한서진이 모아놓은 돈도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그걸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병은 제일 의료원에서 꾸준히 연구 중이었다. 그와 연계해서 고모가 대표로 있는 제일 제약에서 치료제에 대한 임상 시험도 하는 상황.
“그리고 지우의 병 말입니다.”
“지우는 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서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한서진을 확실히 나에게 묶어둘 패를 찾았거든.
“지우가 걸린 병의 치료제, 제일 제약에서 임상 시험을 하고 있더군요.”
한서진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깍지를 끼며 한서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어때요. 우리가 좋은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습니까?”
그날 밤, 킬러 한서진이 정식으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다.
*
OTT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콘텐츠를 수급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일단 제일 ENM이 제공하는 채널은 13개이며, 드라마와 영화는 대략 100편 가까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이외에도 외주 방송사의 콘텐츠로 플랫폼을 풍부하게 해줘야 한다.
추가로 외국의 드라마와 영화도 수입해야 하며, 지상파와 종편에서도 콘텐츠를 수급해야 한다.
소비자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제작사의 콘텐츠가 들어와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회사에는 영업의 달인이 있었다. 황민혁 차장이 열심히 발로 뛰며 계약을 따내고 있었다.
콘텐츠 수입의 경우 절차가 조금 더 까다롭다. 단순히 수입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를 통해 따로 등급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게 또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예전에 국회에서 위원회 심사를 거치지 않고 자율 등급분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등급제를 내놓았는데, 만료 폐기한 바 있다.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콘텐츠 수급이 끝나면, 제일 하이비전에 전용 캐시 서버를 설치해서 인터넷 속도와 품질을 높여야 한다. 한국에서는 속도가 생명이니까.
시청하는 도중 화질이 떨어지거나 버퍼링이 느려진다면 끝장이다.
마지막으로 캐리온이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 등 다양한 디바이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버전의 인터페이스를 만들었다.
각종 유명 회사들의 인터페이스를 참조해 특허법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인터페이스가 준비되었다.
그리고 소비자 시청 정보를 축적하여, 원하는 채널과 프로그램을 추천하는 빅데이터 기반의 기술을 탑재했다.
캐리온의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콘텐츠 추천 시스템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다 돈이었으며, 캐리온이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마다 내 통장의 잔액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내 통장의 잔액이 아슬아슬한 상황이 왔을 때, 시바 코인이 화성을 향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