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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은 제대로 치러야 할 겁니다
큰 건은 대충 정리가 됐고, 이제 내부의 일만 마무리하면 JS생활건강의 인수가 정말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내부의 일이라는데 생각보다 많았다.
먼저 노후화된 장비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공장 앞 빈 부지에 새로운 설비를 들여서 생산라인을 늘이고 창고도 증축할 계획이다.
또한, JS생활건강에서 KW 제약으로 회사가 바뀌니 직원들도 고용 승계를 해주고 근로계약서도 다시 작성해야 한다.
이 모든 걸 내가 다 정리해줘야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물론 내가 직접 할 건 아니고 이준호 과장을 불렀다. 내무부 장관을 뒀다가 어디에 쓰겠는가.
화성시로 온 이준호는 마스크 공장을 보고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없자 내가 설명해줬다.
“마스크 공장입니다.”
“···아, 네. 마스크 공장. 요 며칠 안 보이시는가 했더니 마스크 공장을 인수하고 계셨군요.”
“네. 먼저 과장님이 장비 좀 점검하고 남는 부지에 공장 증축 허가를 좀 받아주세요.”
“···음,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직원들 고용 승계하면서 연봉 협상도 다시 하고 근로계약서도 작성해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
내 말에 이준호 과장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 갔다. 업무 폭탄에 잠시 그로기 상태에 빠졌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런데 조금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해요?”
“요즘 너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며칠 전에 스튜디오 라이언과 외주 계약도 맺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마스크 공장까지 인수했으니까요.”
나는 이준호의 걱정을 이해했다.
가뜩이나 인력도 적은데, 필승 기획을 인수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사업을 확장했다. 그것도 전혀 관계가 없는 분야를 건드리면서.
나도 상황이 급박하지 않다면 여유 있게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팬데믹이 일어나기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기에 빠르게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
‘하긴 이 부분도 직원들에게 설명해줘야겠군.’
나는 내 직원들이 단순히 내 명령만 받아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KW 코퍼레이션을 키워 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내 비전에 대해서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장님이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세한 건 회의에서 설명해드리지요.”
“주제넘은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회사를 이전하는 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내가 마스크 공장을 인수하는 동안, 회사는 어머니의 유산으로 받은 서초동 빌딩으로 이사를 시작했다.
삼성동에서도 잘 지내고 있는 회사를 굳이 옮겨야 하나 싶지만, 이건 전적으로 캐리온 때문이다.
캐리온이 주문한 설계대로 서버실을 만들려면 지금 회사 규모로는 턱도 없어서였다.
“짐을 옮기는 거야 금방 끝났지요. 서버실도 거의 완공되고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서버실을 증축하는 거라 기초작업은 빨리 끝났고, 남은 작업은 곧 마무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버실은 왜 그렇게 크게 지으시는 건지요?”
서버실은 2층에서 4층까지, 무려 3개 층을 쓰고 있다. 기존에는 두 층만 쓰고 있던 것을 캐리온이 한 층 더 늘렸다.
회사 건물의 30퍼센트가 서버실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
이준호가 ‘이것도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하는 얼굴로 물어봤지만, 나는 시선을 피했다.
“···다 쓸 데가 있습니다.”
차마 캐리온이 마음대로 주문한 서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
화성 공장 일을 마무리하는 건 이준호 과장에게 맡긴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운전을 하는 도중 서울에는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12월 31일.
연말인지라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송이송이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연말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이제 이 풍경도 얼마 가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조만간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려워질 거라는 것을.
한 달이 지나면 사람들은 전염병을 피해 집 안으로 숨어들 것이고 거리는 텅 비게 될 것이다. 아마 대비를 하지 못한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망하겠지.
나는 상념에 잠긴 채 화려한 거리를 달려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마땅한 가족이랄 것이 없었던 이건우는 이때쯤이면 항상 할아버지와 함께 새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궁궐 같은 대문을 지나 가로수길을 따라 들어가니 거대한 저택이 나왔다.
차에서 내린 나는 사용인에게 키를 건넨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회장님의 개인 비서가 나에게 상황을 말해줬다.
“회장님께서는 지금 사장님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중입니다. 거실에 있으면 제가 음료를 내오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생각해보니 연말마다 사장들을 불러 종무식 겸 회의를 했다. 한 해 성과를 보고 받고 새해 계획이 어떤지 브리핑을 하는 시간이다.
제일 그룹의 크고 작은 계열사 사장들이 모두 모여있다는 뜻이며, 이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과 고모까지 한 자리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저 안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 관심이 없는 나는 점점 조금씩 쌓이는 눈을 보며 호로록 차를 마셨고, 마침내 서재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회장님.”
“올해도 고생 많았어. 가서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야지.”
“예.”
그중에는 아버지 이정혁도 있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지훈이는 들어왔느냐?”
“오늘 저녁 비행기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알았다. 내일 가족끼리 밥이나 한 끼 먹자꾸나.”
그렇게 나가던 이정혁은 거실에 있던 나를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치고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저번에 사장실에서 부딪힌 이후로 처음 만나는 상황이다. 언성을 높이며 싸운 사이다 보니 서로 아는 체하기도 민망했다.
결국 이정혁은 나를 못 본 체하며 그대로 지나쳤고 나 또한 구태여 인사를 하지 않았다.
뒤에서 할아버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머쓱한 얼굴로 할아버지께 다가가려 하는 순간,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어휴 큰오빠가 저렇게도 무뚝뚝하다니까. 살가우면 좀 좋아.”
나는 이건우의 기억에서 그녀를 떠올렸다.
제일제약 사장 이정혜.
할아버지의 막내딸이며 나에게는 고모가 되는 분이다.
특이하게도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했는데, 고모부는 제일제약에서 평범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달리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으며 제일제약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제일그룹의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작은 아버지들과는 서먹한 사이였지만, 고모와는 꽤 잘 지낸 편이다.
특히 어머니가 별거하고 있을 때 고모가 종종 찾아와서 위로해줬던 기억이 가슴 속 깊이 남아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건우의 기억과 동화되어서 그런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느꼈다.
그리고 제일제약이라면 앞으로 볼 일이 많은 사이다. 무조건 친해져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고모. 아버지야 원래 그러셨던걸요.”
“그러니까. 저 성격은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질 않아. 그런데 건우, 너 이제 사업한다며?”
“네. 얼마 전에 시작했어요. 아직은 작은 회사에요.”
“그래. 뭐가 됐든 스스로 해보면서 성장해가는 거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감사합니다.”
제일 그룹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다. 조만간 고모에게 연락이나 한번 해야겠군.
그렇게 고모가 떠나가고 작은아버지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소소한 일상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고, 대화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무렵 할아버지가 먼저 운을 떼셨다.
“요즘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더구나.”
재미있는 일?
최근에 내가 진행한 일은 두 가지이다. 시바코인 투자와 마스크 공장 인수.
시바코인 투자를 진행한 KW 홀딩스는 내 지분이 100%인 비상장 회사이기 때문에, 아무리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자금 흐름 내역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면 마스크 공장 인수건을 말씀하시는 거겠군.
어차피 다 알고서 얘기를 꺼내신 것 같은데 나도 둘러서 말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흐음”
할아버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서초동 빌딩에는 대규모 서버실을 짓고, 갑자기 스튜디오 라이언과 계약을 추진하더니, 이제는 마스크 공장까지 인수하는구나.”
역시 내가 뭘 하는지는 할아버지께 빠짐없이 보고되고 있었다.
“네가 생각 없이 되는 대로 투자하는 건 아닐 테고. 내가 놓친 사실이 뭐가 있을꼬?”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라도 내가 왜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시겠지.
저 연관성 없는 사업들은, 단 한 가지의 상황을 위해서 준비되고 있었다.
바로 한 달 후에 일어날 팬데믹.
나는 이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는 게 내게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일 ENM 건으로 마찰을 빚기는 했지만, 일단 제일 그룹은 내 친정이다.
그리고 항상 내 편이신 할아버지가 아직도 회사의 경영권을 꽉 쥐고 계시고.
팬데믹이라는 정보를 이용해서 제일 그룹에 빚을 지워둔다면 언제고 내게 이득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물론 아버지가 계속해서 공격적인 스텐스를 취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는 내가 KW 미디어를 키워서 견제할 자신이 있다.
OTT 산업이 그 발판이 되어줄 것이고.
잠깐의 계산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요즘 북경에서 미확인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십니까?”
“며칠 전 뉴스에 나왔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저는 그 바이러스 때문에 세계적인 팬데믹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플루엔자 범유행이나 메르스와는 차원이 다른 대공황 말이에요.”
“설마 그 가정만 믿고 지금껏 투자를 했단 말이냐?”
할아버지는 실망이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정이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에요. 단지 할아버지께서 실감하지 못할 뿐이지요.”
할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할아버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조금 더 강한 비유를 들었다.
“모기지 사태 때를 생각해보세요. 당시에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징조는 분명히 있었지만 계속 망설이다 결국 금융위기가 닥쳤지요.”
“음···. 일단 네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들어보자.”
나는 캐리온이 분석한 결과를 하나씩 들어서 설명했지만, 할아버지는 영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하긴 일반 사람들이 내 말을 쉽사리 믿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도 저런 반응이겠지.
왜냐하면 지금까지 팬데믹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여럿 있었지만, 한국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사스는 감염자가 총 3명에 그쳤고, 3명 모두 완치되었다.
그리고 2009년의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초기부터 치료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전염성이나 치명률이 낮았으며, 한국의 경우 치사율이 0.035%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냥 독감 정도로 취급받았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메르스는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중동에서만 유행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빠르게 잡혔다.
하지만 이번 바이러스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애초에 종식됐다고 여겨졌던 두창 바이러스가 그 근원이기 때문에, 다른 질병과 달리 사람들의 면역 체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또한 공기 감염이 가능하다는 것도 전염성과 치명률을 높이는 데 한몫할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찾아보세요. 분명한 건 앞으로 한 달 내로 우리도 똑같은 상황을 겪을 것이란 점입니다. 미리 대비해놓지 않으면 휩쓸릴지도 모를 큰 풍파에요.”
“알았다 이놈아. 눈에 힘 풀어라.”
“그리고 제 말이 맞으면 값은 제대로 치러주셔야 할 겁니다.”
“알았대도.”
어찌 되었든 나는 분명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할아버지라면 분명 한 번쯤은 바이러스에 대해 찾아보실 거다.
캐리온이 틀릴 일은 없으니 할아버지 앞으로 빚 하나 제대로 달아놓았군.
*
새해가 밝았다. 친애하는 일론 형님은 새해 첫날부터 희소식을 들려주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 “시바코인으로 테슬라 상품 결제 허용”]
시바코인이 떡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