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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여자 (2)
나는 임시로 개설된 사이트에 들어가 채팅을 남겼다.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 말씀해주시면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 죄송하지만 비대면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해커 주제에 쓸데없는 신비주의를 고수하기는. 뭐, 이럴 때 제일 그룹의 사람이라는 게 또 도움이 되는구만.
“제일 ENM입니다. 예전에 의뢰 드린 일로 다시 찾아뵙고 싶습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원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마 그사이 누가 연락을 했는지 알아보았겠지.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럼 아래 주소로 오십시오.
나는 미소를 지었다.
*
나는 해커가 말한 주소로 찾아갔다. 인천 외곽에 있는 커다란 컨테이너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수백 대의 컴퓨터 장비가 열을 내뿜으며 돌아가고 있었고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작업하고 있었다.
[렛이 속한 해커 그룹입니다. 이곳을 본거지로 활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곳에 초대할 만큼 이정혁과 해커 렛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차차 알아보면 되고.
“보안망을 뚫고 정보를 빼내는 데 얼마나 걸려?”
[십오 분이면 충분합니다.]
“시작해”
나는 한 컴퓨터 앞으로 가 캐리온이 깔아준 프로그램이 담긴 USB를 삽입하였다. USB에 포팅된 프로그램이 작동하며 시스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건 건들면 안 됩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인상에 살짝 튀어나온 뱃살. 여느 회사원 아저씨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곳은 신기해서 그만. 당신이 렛이군요.”
렛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정혁 사장님이 아니군요.”
“아버지가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장남 이건우라 합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렛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마주 손을 잡았다. 그가 말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확인해보니 예전에 처리한 일에는 문제가 없던데요.”
“별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얼마 전 제일 ENM의 시스템이 털렸었거든요.”
물론 나와 캐리온이 벌인 일이다. 하지만 놈은 자신의 고객이 털렸다는 말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끄응, 이정혁 사장님이 조금만 더 보안에 투자하셨으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요즘 업체들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만 몰두하지 보안에는 영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쪽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겠지요. 아버지께서 당신이 최고의 해커라며 의뢰를 하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거라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렛은 최근에 개발한 툴킷을 꺼내 들며 어떻게 하면 보안을 강화할 수 있을지 설명했다.
나도 개발자 짬밥이 있었기에 대충 주워섬기며 맞장구를 쳐주자, 렛은 더욱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끌고 있는데 마침내 캐리온의 보고가 귓가를 울렸다.
[프로그램 코드 락을 뚫었습니다. 한서진에 대한 정보를 전송 완료했습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해주신 툴킷은 인상 깊었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아버지와 상의해보겠습니다.”
“어이쿠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이건우 씨와 이렇게 말이 잘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연락해주십시오.”
컨테이너 건물을 빠져나와서 나는 차 문을 걸어 잠그고 태블릿을 확인했다. 한서진에 대한 정보가 백 쪽이 넘는 문서로 정리되어 있었다.
초록을 대충 훑어본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무서운 여자가 여기 있었네.”
*
일주일 후 나는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내가 출근했을 때는 직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필승 기획의 트리오.
영업맨 황 차장, 내무부장관 이 과장, 그리고 문제의 한서진.
네 명이서 단출하게 첫 회사의 출범식을 시작했다.
나는 기대감에 똘망똘망 쳐다보는 세 사람을 앞에 두고 말했다.
“제가 제일 그룹 사람인 거 아시죠? 하지만 여러분은 제일 ENM과 경쟁해야 할 겁니다.”
엔터뿐만 아니라 영화, 커머스까지 장악한 미디어 공룡 기업 제일 ENM.
하지만 조만간 업계 최고의 이름은 바뀔 것이다.
왜냐고? 이제 그 미디어 왕좌에 오를 회사는 나의 KW 코퍼레이션이 될 거니까.
정확히는 KW 코퍼레이션의 자회사인 KW 미디어가 되겠지만.
“그러니 내 회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을 업계 최고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사장이 아니다.
업계 최고라는 말은 지켜야지.
“그러면 애사심이 들 수 있도록 연봉 협상을 시작해볼까요?”
그러자 직원들 사이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사장님 최고!”
우리 직원이 나를 이렇게 존경한다. 나는 황민혁 차장부터 불러서 연봉 협상을 시작했다. 필승 기획에서 넘겨받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필승 기획에서 받았던 연봉이 보자···.”
나는 금액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4300만 원이네요?”
“하하. 예”
황민혁 차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고충이 많은 듯하다.
애가 둘인 데다 큰애가 얼마 전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교육비 지출이 늘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정필승이라는 인간은 출장비와 유류비도 제대로 치러주지 않아 사비로 영업을 다녔던 모양이다.
“고생이 많으셨네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차장님의 실력에 걸맞게 대우해드릴 겁니다.”
캐리온이 파악한 바로는 황민혁 차장은 그만한 실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다.
유명 엔터테인먼트 실장 출신에 필승 기획을 이만큼 끌고 왔으면 말 다 했지.
“음··· 그럼 연봉은 팔천만 원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황민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하루아침에 월급이 두 배가 된다니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성과급에 대한 것도 집어넣죠. 그리고 자녀분들의 학비는 회사에서 보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황민혁 차장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허리를 접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열심히 안 해도 돼요. 대신 실적만 최고로 내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연봉이 순식간에 두 배로 오른 황민혁 차장은 회사에 절대 충성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애사심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더 주는 거란 말이지.
그다음에는 이준호 과장. 과장은 머뭇머뭇 들어오더니 말했다.
“사장님 저는···.”
그가 퇴사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말을 뚝 잘랐다.
“과장님. 업무는 좀 맞으세요?”
“아, 그게 말입니다. 사실···.”
“연봉을 육천오백으로 맞춰드리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아, 혹시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연봉을 듣는 순간 이준호 과장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없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부적인 얘기를 끝내고 마침내 한서진의 차례가 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한서진이 쌍꺼풀 없는 큰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저번에 알아본 결과 한서진의 정체는 은퇴한 킬러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손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였을 거로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처음인데. 왜인지 정필승에게 보여주던 그 서늘한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나 무사히 연봉 협상을 할 수 있겠지?
한서진은 특유의 생글거리는 미소를 띠며 쳐다보았고, 나는 긴장을 감추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에···. 세전 160만 원을 받으셨군요.”
“네”
나는 궁금해졌다. 킬러라면 모르긴 몰라도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왜 이런 자그마한 좆소기업을 다니고 있었을까?
그것도 한 달에 160만 원이라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
위장 취업인가? 아니면 신분세탁?
한서진에 대한 자료는 얻었지만, 그녀가 왜 필승 기획에 들어온 지까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진이 킬러이든,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 들어왔든 놓치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제일 ENM이라는 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정혁 사장은 음지에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처리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일에 한서진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 제 발로 굴러온 만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한서진 씨, 경리 말고 비서 일을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말이 비서지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경호원으로 쓸 생각이다.
“비서요? 하지만 해본 적이 없는데···.”
“괜찮아요. 당분간은 바쁠 일이 없으니 운전하고 스케줄 관리만 하면 됩니다. 한서진 씨는 아직 경력이 없으니 일단 연봉은 오천으로 맞춰드리지요. 물론 성과급과 각종 수당은 제외된 기본급입니다.”
한서진의 커다란 눈이 댕그래졌다.
“오천이요?”
어때? 애사심이 마구마구 솟아오르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란다. 우리 회사의 복지는 최고거든.
자고로 중소기업의 모토는 ‘가족 같은 회사’가 아니던가.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가족 같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마음이 있다.
“어린 아들이 있다고 하셨지요? 일하기 편하도록 회사 근처에 유치원을 주선해드리겠습니다. 아니면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전세자금 대출도 회사에서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학원과 각종 문화 시설, 그리고 병원까지 강남에서 최고로 누릴 수 있지요.”
“병원도요?”
오케이. 역시나 병원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군.
나는 자료를 읽어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아들이 아프다는 사실을.
한서진의 아들은 신경섬유종증이라는 유전성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데, 제일 의료원에서 해당 질병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범 제일 가의 창업주가 같은 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의료원은 이 병에 관한 연구가 제일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신경섬유종증을 앓는 환자가 입원하면 병원비를 지원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제일 의료원으로 한서진을 꼬시기 시작했다.
“네. 일원에 제일 재단의 제일 의료원이 있는 거 아시죠?”
“들어봤어요. 제일 의료원이면 한국 최고 의료진을 갖춘 곳이잖아요.”
“그렇지요. 삼성에서 일원까지는 차로 10분밖에 안 걸립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지요.”
“어머 그것참 마음에 쏙 드네요.”
한서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면접을 통과한 기분으로 하하 웃었다. 이걸로 킬러는 잡아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