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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갈래, 계약할래
먼저 나는 캐리온에게 적당한 회사를 물색해보라고 시켰다.
인수할 회사는 한국과 외국을 가리지 않았으며 직원이 다섯 명도 안 되는 소기업이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중소기업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직원의 인성과 능력은 굉장히 중요했다.
어차피 업무 대부분은 캐리온을 통해서 자동화할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규모보다는 직원의 질.
그렇게 캐리온은 각 회사의 서버를 돌며 내가 요구한 조건에 맞는 회사를 찾아보았고, 잠시 뒤 나는 얇은 보고서 한 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필승 기획이 가장 적절합니다.]
“필승 기획?”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획 회사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캐리온이 찾아낸 곳은 엔터테인먼트 쪽 회사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엔터테인먼트 쪽에 연이 깊은 이건우의 기억을 뒤져봐도, 그런 회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캐리온이 추천해준 회사라면 분명 괜찮은 회사일 텐데 말이야.
그리고 보고서를 읽어본 나는 그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소규모 사업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장이다.
사장이 직접 영업을 뛰고 일감을 물어오기 때문에 사장이 바빠야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필승 기획의 사장은 무능해도 너무 무능했다.
대부분의 계약이 성사 직전 사장의 손에 의해 틀어지기 일쑤였다.
사장이 한가한 편이 오히려 회사에 도움이 될 정도. 당연히 회사가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회사가 돌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군.”
[사장이 망치는 회사를 직원들이 겨우겨우 붙들고 있습니다. 맨 뒷장에 각 직원의 상세 이력을 첨부했습니다.]
나는 종이를 사르륵 넘겨 맨 뒷장을 펼쳤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거지?
*
필승 기획은 직원이 세 명밖에 없는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그 면면이 가히 어벤저스 급이다.
먼저 영업맨이라고 할 수 있는 차장.
유명 엔터테인먼트의 실장 출신으로, 회사에 들어온 일감의 90퍼센트가 차장의 작품이다.
혼자서 필승 기획을 먹여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심지어 필승 기획에서 기획한 그룹을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까지 내보낸 성과가 있는 사람이다.
캐리온의 조사에 따르면 제일 ENM의 스카우트 명단에도 있었던 사람이다.
제일 ENM에서 데려가려고 했다면, 그 전에 내가 먼저 채가는 게 옳지 않겠는가?
잘 먹겠습니다. 꿀꺽.
그다음에 내무부장관인 과장.
대기업 전략기획부장이었는데 내부 고발을 한 후 퇴사했다. 덕분에 동종업계에는 매장되다시피 했고, 퇴사 후 자영업을 차렸는데 쫄딱 망했다.
그 후에 어찌어찌 들어온 것이 필승 기획.
필승 기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온갖 내부 살림을 도맡은 덕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캐리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구직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자소서를 쓰고 있는 것이 꼭 퇴사 각을 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대기업 부장급 인재를 이렇게 싼값에 데리고 올 기회는 많지 않다. 나는 이 사람도 꼭 데려오리라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경리 한서진. 셋 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사람이다.
나는 단 세 줄로 정리된 보고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깨끗하네.”
여성. 35살. 아들 한 명.
그리고 끝.
나이를 서른 중반 먹었으면 인터넷에 흘리고 다닌 정보가 한 바가지쯤 될 텐데, 한서진은 클린 그 자체였다.
누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운 것처럼.
흥미가 돋아 캐리온에게 더 파보라고 시켰더니 재미있는 게 나왔다.
[정보에 락이 걸려있습니다.]
“락이 걸렸다고?”
역시나 보통 인물이 아니었구나. 나는 캐리온에게 해킹하라고 했지만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원격으로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자체 네트워크망을 쓰고 있으므로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해야 합니다.]
캐리온이 풀어내지 못하는 락이라. 엔간한 뒷조사는 다 해내는 캐리온이 평범한 여자 하나를 어찌하지 못한다고?
이거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군.
나는 필승 기획에 직접 가보기로 했다.
*
모두가 바쁜 시간, 필승 기획 사장 정필승은 의자에 앉아 고민하고 있었다.
‘벌써 한서진 씨가 들어온 지 세 달이나 됐단 말이지.’
한서진은 경리 일을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다. 첫 석 달은 수습 기간이라 월급의 70%를 지급하고 있었지만, 이제 정상적으로 월급을 줘야 한다.
정필승은 그 30퍼센트가 너무 아까웠다. 원래 나가지 않아도 되는 돈이 쓸데없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그냥 확 자르고 신입을 뽑을까? 솔직히 경리 일은 아무나 해도 되잖아.’
마음을 굳힌 정필승은 한서진을 불렀다.
“한서진 씨 이쪽으로 좀 오세요.”
사장의 부름에 한서진이 생글거리면서 왔다.
“네 사장님. 무슨 일이시죠?”
“흠흠, 다름이 아니고 서진 씨 요즘 근무 태도가 좀··· 그런 거 알지?”
“네?”
한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부터 귀여운 상이던 얼굴에 눈이 커지니 마치 토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정필승은 그 귀여운 모습에 괜히 혹했다.
다섯 살 애 딸린 아줌마라는 건 알지만 흑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크흠. 요즘 6시만 되면 집에 돌아가려고 하고 말이에요. 황 차장과 이 과장이 사무실에 남아있는데 수습사원이 먼저 가면 되겠어, 안 되겠어?”
한서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제 업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간 걸요? 혹시 제가 업무적으로 실수한 부분이 있었나요?”
“아니 이 사람이 말이야, 회사의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그렇게 개인주의적인 마인드가 회사 분위기를 망치는 거라고. 그리고 지난주에도 아프다고 이틀씩이나 휴가를 내지 않았어요? 그거 커버하느라고 이 과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한서진은 정필승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평소에는 이 과장 생각도 안 하던 사장인데 뭔 생색이람.
“그때는 분명히 사장님이 결재해주셨잖아요. 그리고 그건 제가 아픈 게 아니라 우리 지우가 아파서···.”
“그러니까 왜 아빠도 없으면서 애를 낳고 그래. 어쨌든 이런 식이면 나도 서진 씨랑 같이 일 못 해요.”
정필승의 입에서 아이의 얘기가 나오는 순간 한서진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 눈빛에 정필승이 깜짝 놀라 뒤로 흠칫 물러날 만큼.
한서진이 냉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그러니까 지금···.”
똑똑똑
그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정필승 사장님 되십니까?”
나는 한서진과 정필승과의 말싸움이 커질 기미가 보이자 즉시 노크를 했다.
캐리온은 아직 한서진에 대해 조사 중이다.
하지만 방금 보여준 한서진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는 떨어져서 지켜보던 나조차 흠칫 물러나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실례합니다. 정필승 사장님 되십니까?”
두 사람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서진이 독기어린 눈빛을 슬쩍 피하며 나는 정필승 사장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이건우라고 합니다.”
“아예. 혹시 그 스캐···아니, 제일 ENM의 이건우 본부장님···?”
역시나 정필승은 나를 바로 알아봤다. 스캔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유명해졌다.
“지금은 제일 ENM을 그만뒀습니다. 편하게 이름을 부르세요.”
“예 이건우 씨. 그런데··· 우리 회사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정필승은 제일 그룹의 사람인 내가 코딱지만한 회사에 왜 찾아온 건지 궁금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회사를 둘러보았다.
필승 기획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이준호 과장
영업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황민혁 차장
베일에 싸인 경리 한서진
온갖 횡령과 배임으로 점철된 회사가 굴러가는 건 이들 덕분이었다.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필승 기획을 인수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정필승이 눈을 껌벅거렸다.
“우리 회사를 산다고요? 저는 매각 의사가 없는데요.”
“곧 있으면 생기게 될 겁니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얘기할까요?”
나는 어안이 벙벙한 정필승을 막무가내로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필승 기획은 사장실도 따로 없는 작은 회사였다. 우리는 회사 근처의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정필승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매입가격을 말했다.
“필승 기획. 제가 5억에 인수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정필승은 코웃음을 쳤다.
“그 가격으로는 절대 안 팝니다. 그리고 내가 우리 회사를 왜 팝니까.”
내가 필승 기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정필승의 태도는 의기양양해졌다. 이런 인간일수록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지.
먼저 정필승의 기를 누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캐리온이 구해온 자료를 꺼냈다.
“먼저 소속 가수의 방송 출연료와 행사 출연료를 아들 계좌로 송금했네요. 그런데 소속 가수가 지금 정산이 안 돼서 생활고를 겪고있는 건 알고 있나요?”
“아, 그, 저 그게···.”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저작권 협회에 지급해야 할 저작권 사용료를 수년째 미납했고, 외부 업체에 기술 사용료를 지급했는데, 해당 기술료가 개인 계좌로 들어가기도 했군요. 근데 그 개인 계좌는 또 부인분 계좌네요. 어이쿠, 그것뿐만 아니라 취업 청탁까지 하셨네요?”
정필승의 턱이 툭 떨어졌다.
“뭐, 이것 외에도 자잘하게 많이 해 드셨네요. 횡령에 배임에, 이 정도면 사기도 해당하겠는데요? 나 제일 그룹 사람인 거 알죠? 우리 그룹이랑 친한 검사님이 있는데, 이거 싹 다 모아서 고소하면 몇 년형이 나올까요?”
내 말에 정필승은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정필승은 굴하지 않고 마지막 발악을 하였다.
“아니 이건우 씨.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자꾸 이러시면 대기업이 횡포를 놓는다고 언론에 뿌릴 겁니다.”
하지만 정필승의 마지막 발악은 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언론이라니. 내 앞에서 언론을 들먹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지금 내 앞에서 언론질하는 겁니까? 한 번 뿌려보세요. 기사 한 줄 나오나 봅시다.”
“······.”
정필승은 깨갱 하며 입을 다물었고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정도 겁을 줬으니 이제 얘기가 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만.
“자,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무것도 못 얻고 감방에서 몇 년 푹 썩으실래요? 아니면 순순히 이 계약서에 사인하실래요?”
눈앞에서 계약서를 흔드는 나를 보는 정필승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썩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