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로 갑질하는 양아치 재벌-6화 (6/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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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하자마자 스캔들이라니 (4)

“······.”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나를 뜯어보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옛날에, 그러니까 내가 연구소장으로 있을 때, 이사회에 연구개발비를 올려달라는 말을 할 때처럼 긴장됐지만 내색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물었다.

“유산을 물려달라고?”

“예”

“이유는?”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려면 돈이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충 둘러댔다.

“제대로 사업 하나를 해볼까 싶어서요.”

“사업이라면 제일 ENM에서 해도 되지 않겠냐.”

“하지만 그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회사이지요. 저도 할아버지처럼 제 회사를 직접 일구어내고 싶습니다.”

“뭐라?”

할아버지는 얘가 뭘 잘못 처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긴 제일 ENM에서 적당히 일하다가 적당히 사업을 물려받아서 경영하면 되는 인생이다.

보장된 인생을 걷어차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말이 믿기지 않겠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의 망나니 이건우가.

하지만 내 생각은 흔들림이 없었다.

일단 제일 ENM의 사장은 이정혁이다. 이정혁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가 없다.

제일 ENM을 나가는 것은 내가 날개를 펼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리고 나는 시스템 개발자이고, 디지털 산업이야말로 내 전공이 빛날 곳이다.

트렌드 리서치, IT 서비스 기획, 시스템 아키텍트, 콘텐츠 커머스, 디지털 마케팅, AI 서비스 기획 및 알고리즘 개발까지.

디지털 산업에서는 시스템이 안 쓰이는 곳이 찾기가 더 어렵다.

게다가 요즘 북경에서 미확인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은 상승세를 보인다.

추후는 지켜봐야겠지만 이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흑사병이나 스페인 독감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팬데믹이 덮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전염병을 피해 집안으로 숨어들 것이고, 그러면 눈을 돌릴 데야 뻔하다.

즐길 거리가 필요하고, 디지털 산업은 팬데믹 특수를 입어 발전할 것이다.

이렇게 미래가 보장된 사업이 있는데 꽃길을 걷지 않으면 사업가라고 할 수 없지.

하지만 바이러스에 관한 정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만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이러스에 관한 말은 쏙 뺀 채 의사를 전달했고, 할아버지는 유심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럼···!”

“하지만 당장은 네 어머니의 유산은 물려줄 수 없다.”

밝아졌던 내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 내 편이었다.

“대신 내가 회사를 인수하는 데 도움을 주마. 그리고 네가 한 번 직접 경영해 보아라. 직접 성과를 보여서 네가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봐라.”

나는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챘다.

회사 창립에는 경영 이외에도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기존의 회사를 키우는 건 오로지 경영 능력에 달려있다.

내 얼굴에 자연스럽게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좋아하지 말거라. 조건은 하나 더 있으니까.”

“뭡니까?”

“동생과의 싸움은 여기서 덮어라. 집안싸움은 집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해서 좋을 거 하나 없다. 지훈이는 내가 유학을 보내서 회사 일에서 손을 떼게 할 테니까 이쯤에서 마무리 하자꾸나.”

내 표정이 미묘해졌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겠는데요.”

할아버지는 얼굴을 굳히며 경고했다.

“할애비가 이만큼 양보해줬으면 됐지. 너무 욕심을 부리면은 탈이 날게야.”

“그게 아니라 이미 동영상이 하나 더 올라왔거든요.”

“···?”

윤단아의 3부 시리즈 중 두 번째 동영상. 이지훈과 양소희가 만나서 계략을 꾸미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

이건우가 나간 후 이만호 회장의 얼굴은 인자한 할아버지에서 냉철한 사업가로 변했다.

그는 비서를 불러 물었다.

“저 녀석,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봤나?”

“윤단아 씨를 만난 걸 제외하고는 집에만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윤단아의 두 번째 동영상은 첫 번째보다 파급력이 더 컸다.

단순 꽃뱀 사건에서 재벌 3세들의 후계다툼으로 스케일이 커지니, 사람들이 다들 팝콘을 하나씩 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윤단아가 올린 동영상을 직접 본 이만호 회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소속 크리에이터를 건드렸다는 소식에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은 이건우였지만, 한순간에 여론을 뒤집어버렸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는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 도련님에게 동정표가 몰리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꽃뱀에게 물린 것도 계획의 일환이 아니었나 의심될 지경입니다.”

“하긴 일주일 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한 자료를 뿌려댔으니 말일세.”

이만호 회장은 저 꼴통 손자놈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이제 꼴통이라는 말은 손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싶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이미지를 구제 불능 망나니 재벌에서 꽃뱀 사건의 피해자로 바꾸어 버렸으니 말이다.

기업들이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소비하는 돈을 생각하면 손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낸 셈이다.

그리고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의 회사를 차리겠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가 싶어서 물어봤지만, 생활에는 딱히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이틀 전만 해도 집에 여자를 데리고 와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비서도 눈치껏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제 손으로 회사를 차리겠다니 마치 왕년의 회장님 같더군요. 이제야 적성을 찾으신 게 아닐까요?”

“그래. 그건 내가 높이 사는 면이지.”

자식 놈들은 다들 자신이 차린 밥에 어떻게든 숟가락을 올리려고 난리인데, 손자가 ‘자신의 회사’를 차리겠다고 나서니 기특했다.

손자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나 싶어 회장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젊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손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이지훈 도련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좋은 계기가 되었지요.”

“에잉. 이지훈 그 얌전하던 녀석이 먼저 제 형을 칠 줄이야.”

이만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찼다.

재벌가에서 골육상잔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모든 사람이 알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조용하게 끝나는 편이 좋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했다면 이만호 역시 크게 흠잡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렇게 시끄럽게 일을 벌여놓았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건우를 먼저 공격한 것인 이지훈이 아닌가.

“정혁이에게는 지훈이 녀석을 유학 보내라고 이르게. 하는 짓을 보아하니 일을 좀 더 배워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일을 정리한 이만호는 이건우의 말을 떠올렸다.

-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그의 눈초리가 추억으로 젖어 들었다.

“벌써 십 년이 지났구나.”

오랜 시간 함께한 비서는 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전옥란 여사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옥란 여사는 이건우의 모친으로, 이만호 회장이 가장 총애했던 며느리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 역시 이만호를 아버지처럼 따라서, 친가가 아니라 그에게 신탁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다.

“그래. 어린 건우를 두고 갈 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으니 감회가 새롭구나.”

“아마 하늘에서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늘 아픈 손가락이던 손자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자신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독립해서 어머니의 유산을 받아 보이겠다고 나서던 모습이 다 커버린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리고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건우가 원하는 회사를 사주게.”

“예. 알겠습니다.”

이건우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이정혁은 정신이 없었다. 이건우가 터뜨린 동영상 덕분에 저점을 기록하던 제일 ENM 주가는 다시 한번 더 바닥을 찍었다.

화가 난 대주주들을 달래주고 스캔들을 수습하려고 하니 아버지인 이만호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지훈을 유학 보낼 준비를 하라고.

“···알겠습니다.”

두 아들, 이건우와 이지훈의 싸움에서 이지훈이 패배한 것은 뼈아픈 일이었다.

‘이건우가 그런 준비를 하고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부자가 녀석한테 다 불어버린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반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정혁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쯧. 이건우가 사퇴하고 물러났으면 그림이 딱 좋았는데. 제 어미를 닮아서 교활하기는.’

둘째를 해임해야 하는 건 마음은 아팠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고 패배한 이지훈이 그 제물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일, 이 년 정도 해외에서 쉬게 한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때쯤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여 중책을 맡게 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을 때 비서가 들어왔다.

“사장님. 이건우 본부장님이 왔습니다.”

*

나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소리 없는 압박감이 질식할 것처럼 짓눌렀다.

“여기에는 또 무슨 일이더냐.”

서늘한 목소리. 이지훈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애정 한 톨이 담겨있지 않은 말투이다.

하지만 나는 피식 웃고는 흘러버렸다. 어차피 더이상 나는 그의 아들이 아니고, 그는 나의 아버지가 아녔다.

이건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는 그냥 적일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특정할 감정적 잔재가 남지 않았다.

나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사직서를 흔들어 보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사퇴하려고요.”

“뭐라고? 이 난리를 쳐놓고 사퇴를 한단 말이냐. 나이를 먹고도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

이정혁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시큰둥하기만 했다.

“아버지, 말씀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친 난리도 아닌데 제가 왜 책임을 집니까.”

“뭐?”

입바른 소리를 못 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했다.

“이지훈이 꾸미고 아버지께서 용인하신 스캔들이었죠. 저는 그냥 휘말렸을 뿐인데 제가 책임은 왜 집니까.”

“······.”

팩트를 날리는 것만큼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좋은 수단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날린 팩트를 맞은 이정혁이 입만 뻐끔거리는 걸 보니 괜히 통쾌해진다.

이정혁은 나를 자신의 테두리 안에 가둬놓고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의도에 놀아날 수는 없지.

“이제 집에서도 나갈 거니까 더는 찾지 마세요. 아, 그래도 명절에는 찾아뵐게요.”

“너, 너!”

나는 삿대질을 하는 이정혁을 무시하고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이제 새로운 집으로 가볼까.

사직서를 제출하기 전에 짐을 다 빼서 논현동에 있는 고급주택가로 옮겼다.

이 집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주신 것으로, 아버지와 (비공식적) 별거 상태일 때 논현동 사저에 머무셨다.

이사할 때 나는 서버 확충에 제일 공을 들였는데, 고성능 서버를 자체적으로 깔고 캐리온이 유출되면 안 되는 만큼 보안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덕분에 캐리온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갖춰줄 수 있었다.

캐리온이 말했다.

[이제 드디어 거지 같은 노트북에서 벗어나겠군요]

“······.”

거지 같아서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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