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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망나니가 되다
“끄으으···.”
나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술을 너무 퍼마신 탓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뱃속도 울렁거리는 것이 보통 숙취가 아니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을 돌리자 무척이나 화려한 경관이 보인다.
대리석 바닥과 고급스러운 가구들, 심지어 천장에는 작은 샹들리에까지 달려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재벌 집 풍경이었다.
‘음?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지?’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도 뭔가가 달랐다. 평범한 침대가 아닌 폭신하고 두툼한 매트리스가 내 등을 바치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옆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쳤고,
“우왁!”
웬 헐벗은 여자가 새근거리며 자고 있다. 깜짝이야.
“······.”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나도 모르는 여자와 한 침대에서 자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제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내가 소장을 맡은 연구소에서 신세대 인공지능을 개발해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와의 인공지능과는 차원이 다른 성능을 가진 녀석이었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생물학 연합 연구소와 협업을 해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고, 나는 연구원들과 함께 회식했다.
나는 인공지능의 성능을 입증했다는 기쁨에 술아일체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마셔댔다.
그렇게 만취한 상태로 술집에서 나오는데 갑자기 환한 불빛이 보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는 차에 치였다.
도로를 역주행하는 삐까뻔쩍한 페라리가 나를 들이받았다.
페라리에 치인 나는 말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의 비명과 야단법석 속에서 나는 그렇게 죽어갔다.
내가 죽는 순간을 생각하니 피가 서늘하게 식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숙취도 어느새 느껴지지 않았다.
맞아, 나는 죽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불이 스르르 떨어지며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오십 대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아니라 이십 대 청년의 균형 잡힌 몸이었다.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나는 누구?
옆에서 자는 여자를 깨워서 물어보려는 순간, 우렁찬 호통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 건 우!!!!!!!!!!”
깜짝이야.
여자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나도 몸이 굳은 채 방문을 연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는 기억이 물밀 듯이 전해져왔다.
늘 호통만 치던 남자. 잘 하는 것이 없다며 한심한 표정만 짓던 사람.
“끄응”
나는 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아버지?”
아버지. 제일 그룹의 자회사인 제일 ENM사장을 맡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와 여자를 번갈아 봤다. 여자는 몸을 움츠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집어 후다닥 빠져나갔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 아버지가 말했다.
“또 여자를 끼고 놀았던 거냐?”
나로서는 심히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또라이 기질과 반골을 섞어놓으면 그게 바로 나다.
아버지의 말에 기분이 상한 나는 삐딱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
아버지가 나를 노려보았다.
막 나가지 말 걸 그랬나 살짝 후회됐지만, 다행히 불편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마디만 남긴 다음 등을 돌려 나갔기 때문이다.
“이번 주 안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징계위원회를 열겠다.”
내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문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이건우”
나의 새로운 이름을 불러봤다. 처음 불러보는 이름인데도 원래 내 이름이었던 것처럼 착착 달라붙는다.
나는 이건우이다.
아니, 이건우가 됐다.
그것도 제일 그룹 회장의 손자이자, 제일 ENM 사장의 장남으로.
이건우가 가진 모든 기억이 전해졌다.
마치 이건우라는 몸과 동화되는 신비한 느낌이었다.
이건우는 제일 그룹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다.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녀서 전담팀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재킷을 뒤져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제일 그룹의 손자라···.”
반평생을 연구소에 처박혀 살았던 나에게도 제일 ENM은 익숙한 이름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회사였으니까.
그리고 이건우는 그곳에서 MCN(다중 채널 네트워크) 사업을 맡고 있었다.
MCN은 뉴튜브나 파프리카TV 같은 인터넷 방송 생태계를 바탕으로 출범한 사업이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관리해주는 일종의 매니지먼트이다.
크리에이터의 콘텐츠를 유통하고 저작권을 관리하고 광고를 유치해주는 대신, 크리에이터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 출연한다.
그것이 바로 이건우가 맡은 MCN인 픽쳐스 티비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건우는 거하게 사고를 쳤다.
소속 유명 여성 스트리머에게 성폭행으로 고소를 당한 것.
이건우의 망나니 이미지가 고소 건과 더해지자, 경찰의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기자들은 이미 성폭행이 기정사실인 것마냥 기사를 써재꼈고, 당연하게도 회사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소속 스트리머를 성폭행하는 임원이 있는 회사에 누가 들어가고 싶어 하겠는가.
후우.
나는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건우 이 새끼도 여간 골때리는 놈이 아니군.”
내가 개발한 인공지능 캐리온(Carry On)이 있다면 단숨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건 이 몸과 함께 사라져 버렸으니 아쉬울 대로 잘리지 않기 위해서 머리를 굴려야 했다.
바람이나 쐬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야겠다.
그리고 방문을 나가는 순간,
“이번에 또 사고 쳤다며?”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한 사람이 나에게 빈정거리며 말했다.
재수 없어 보이는 얼굴과 본능적인 거부감.
내 이복동생 이지훈이었다.
*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본 순간 기억이 났다.
우리 집안의 더럽게도 복잡한 가족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먼저 이건우와 이지훈은 이복형제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건우의 모친과 아버지가 정략 관계로 맺어진 사이였다면, 아버지는 이지훈의 모친을 진짜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지훈의 어머니라는 정인이 있던 아버지였지만, 할아버지는 강제로 아버지를 정략결혼 시켰다.
당연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관계가 좋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는 항상 이건우의 어머니에게 쌀쌀맞았고, 정략결혼을 당한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무관심했다.
아버지는 이건우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도 공공연하게 이지훈의 모친을 만나곤 했고, 이건우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은 후에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야말로 찐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괄시받는 걸 보고 자란 이건우는 점점 비뚤어졌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형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자란 이지훈은 엘리트의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형제의 능력과 행실이 워낙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은 항상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런 이지훈이 말했다.
망나니 형을 대놓고 비웃으면서.
“이번에 거하게 사고 쳤다며? 본부장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던데.”
이 새끼는 내가 본부장에서 쫓겨나는 걸 기정사실인 양 가정하고 말했다.
“근데 그거 알아? 형이 쫓겨난 본부장 자리, 내가 맡기로 했어.”
나는 실소가 나왔다. 장남의 자리를 뺏어다가 아끼는 자식에게 쥐여주다니.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다 옛말인가 보다.
물론 그럴만하게 행동해왔긴 했지만, 눈앞에서 비웃음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도 보통 성깔은 아니거든.
나는 소파 맞은편에 앉아서 들고 있던 담배를 녀석의 커피잔에다 꽂아 넣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담배가 꺼졌다.
“뭐 하는 짓이야!”
“아 미안. 재떨이인 줄 착각해서 말이야.”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이지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근데 그거 아냐? 네가 아무리 발광해도 회장님은 너한테 관심 없어.”
정곡을 찔렸는지 이지훈의 얼굴도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내게는 다행이게도 제일 그룹 회장, 그러니까 할아버지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집안의 반대 속에서 태어난 이지훈을 좋게 보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할아버지에게서 대신 받았다.
그리고 제일 그룹의 경영권은 할아버지가 아주 꽉 쥐고 계신다. 아버지와 삼촌들도 아직도 할아버지 앞에서 벌벌 기는 상황이다.
할아버지의 비호 앞에서는 지금 당장 이지훈이 깔짝거리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밖에 나와 바람을 쐬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캐리온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인공지능 캐리온만 있다면 험난한 재벌가 생활 속에서 든든한 천군만마 되어줄 텐데.
그때였다.
[부르셨습니까?]
머릿속에 기계음이 들려온 것은.
내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캐리온?”
[삐빅. 사용자 변경을 감지했습니다.]
[동일 인물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정보가 승계됩니다.]
[반갑습니다 이건우 님. 당신의 영원한 친구이자 비서 캐리온입니다.]
“······.”
네가 왜 여기서 나와?